잠들지 않는 도시, 홍콩에서

전여울

예술과 스포츠의 중심이 되는 홍콩의 3월

3월, 홍콩의 밀도는 다른 때보다 훨씬 촘촘하다. ‘슈퍼 마치(Super March)’로 통하는 이맘때면 ‘아트바젤 홍콩’을 중심으로 수많은 아트 이벤트가 쏟아지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럭비 대회 ‘캐세이/HSBC 홍콩 세븐스’가 막을 올리며 홍콩은 말 그대로 예술과 스포츠의 중심지로 얼굴을 바꿔 든다. 홍콩의 진짜 얼굴은 어쩌면 이 짧은 계절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트바젤 홍콩과 M+ 미술관의 4번째 파사드 협업 프로젝트. 싱가포르 예술가 호 추 니엔(Ho Tzu Nyen)의 ‘Night Charades’가 홍콩의 밤을 밝혔다.

| 도시에 예술이 내려앉을 때 |

3월의 홍콩은 분주하다. 도시 전역이 하나의 전시장처럼, 혹은 경기장처럼 살아 움직인다. 이른바 ‘슈퍼 마치(Super March)’. 세계적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시가 쉴 틈 없이 열리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럭비 대회 ‘캐세이/HSBC 홍콩 세븐스’가 열리는 경기장에선 환호와 박수가 밤늦도록 그치지 않는다. 예술과 스포츠, 겉보기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이 도시에선 하나의 흐름으로 엮인다. 홍콩이 가장 홍콩다워지는 순간, 그렇기에 매년 이맘때면 홍콩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매년 3월 말이면 아트바젤 홍콩을 알리는 현수막이 거리 곳곳을 장식한다.

올해 역시 조용할 틈 없이 3월의 홍콩을 누볐다. 우선 이 기간이 되면 거리 곳곳은 아트바젤 홍콩의 개최를 알리는 대형 사이니지와 현수막으로 화려하게 물든다. 매년 이맘때면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낯설지 않은 설렘을 안긴다. 2010년대 초반, 아트바젤 홍콩은 이 도시를 아시아 문화의 허브로 자리매김하게 한 결정적 이벤트였다. 그리고 최근의 3년, 그 여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거다. 귀환의 2023년, 정상화의 2024년, 회복의 2025년.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빗장을 풀고 개최한 2023년, 다시 팬데믹 이전의 풀스케일 규모로 치러진 2024년, 그리고 여전히 얼어붙은 미술 시장 한가운데서도 회복의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된 올해. 올해는 42개국 240개 갤러리의 참여를 기록했는데, 비록 작년보다 참여 갤러리 수는 줄었지만 페어가 남긴 세일즈 리포트나 현장에서 만난 갤러리스트들의 증언은 다시금 아트바젤 홍콩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VIP 개막 당일인 3월 26일 메가 갤러리들에선 꽤나 자신 있게 판매 실적을 보고했는데, 여기에는 데이비드 즈워너에서 350만 달러(약 50억원)에 판매한 쿠사마 야요이의 ‘Infinity-Nets’(2013)도 포함되어 있다. 소위 7~8자리 숫자 작품, 그러니까 초고가 작품이 호황기처럼 줄지어 판매되는 광경은 보기 어려웠지만, 중저가대 작품은 이전보다 한결 가벼운 호흡으로 시장을 순환했다. 천문학적 가격의 이름값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서 ‘살 수 있는 예술’을 찾는 움직임이 뚜렷했다는 것, 수집가의 세대 교체가 이뤄지며 신중한 성향을 보이는 젊은 컬렉터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것, 부진한 시장 상황 속 여전히 ‘슬로 다운’의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모두 반영한 결과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아트바젤 홍콩의 맥박, 그 작은 진동은 어쩌면 내년을 기대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트바젤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잘 아는 이들이라면, 이 시기 도시 전역에서 열리는 수많은 아트 이벤트도 촘촘히 챙긴다. 올해로 10회라는 기념비적 에디션을 올리는 아트페어 ‘아트 센트럴 홍콩’도 그중 하나다. 초고층 빌딩 사이, 하얀 텐트 아래에서 펼쳐지는 페어는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파릇한 기운으로 튀어 오르는 이머징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는 창구다. 대부분의 아트페어가 갈수록 글로벌화, 대형화되는 흐름 속에서 매 에디션마다 비슷한 갤러리와 작가군을 보는 것에 따분함을 느낀 이 라면, 분명 아트 센트털에서 신선한 발견의 기쁨을 건져 올릴거다. 홍콩 출신의 젊은 작가 나딤 압바스(Nadim Abbas)가 건축가 안드레아 브란치의 미사용 건축 도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대형 커미션 설치작 ‘Brazen Rift(2025)’부터 페어 기간 동안 텐트 안에 임시로 마련한 극장에서 비디오 아트 작품을 상영하는 섹터 등에 이르기까지. 신진 작가들의 실험과 새로운 지역 갤러리의 독립적 큐레이션이 빚어낸 이 페어는, 반복되는 글로벌 아트페어의 프레임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낸다. 예측가능한 풍경 사이에서, 아트 센트럴 홍콩은 여전히 발견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오프사이트 인카운터스’ 섹터의 프레젠테이션 중 하나로, 몬스터 쳇윈드(Monster Chetwynd)가 퍼포먼스와 조각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였다.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가한 올해의 아트바젤 홍콩 풍경.

아트페어로 도시가 들썩이는 일주일, 조금 더 시야를 넓히면 또 다른 결의 예술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구룡지구에 위치한 미술관 ‘M+’다. 빅토리아 하버를 마주한 이곳은 이제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홍콩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처럼 작동한다. 올해 M+에서는 10년 만에 홍콩에서 개최하는 피카소의 대규모 전시를 개최하며 관객몰이에 나섰다. 이 야심 찬 전시는 개막 전부터 미술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전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피카소 작품을 소장 중인 프랑스 ‘국립 피카소 박물관’의 소장품 60여 점뿐 아니라, M+ 컬렉션에서 아시아 및 아시아 디아스포라 예술가 30여 명의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피카소라는 절대적 이름 아래, 아시아 작가들의 목소리가 어떤 방식으로 공명하고 충돌하는지를 탐색하는 실험적 전시인 셈이다. 한편 M+에서 국적과 시대를 초월한 진지한 예술적 대화를 경험했다면, 그다음 다소 산뜻한 마음으로 향할 곳이 바로 센트럴 지역에 위치한 ‘H퀸즈’ 빌딩이다. 데이비드 즈워너, 페이스, 하우저앤워스 등 메가 갤러리가 밀집한 센트럴 지역은 흔히 ‘갤러리 호핑’의 중심지로 통한다. 그중에서도 총 24층 규모의 H퀸즈는 입주 점포의
2/3가량이 갤러리이기 때문에, 층층이 입주한 갤러리를 탐방하다 보면 일종의 ‘수직형 아트페어’를 경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올해 특히나 주목할 만한 전시는 페이스갤러리에서 선보인 로버트 인디애나의 개인전 . ‘Love’ 조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로버트 인디애나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제작한 조각, 회화, 판화 등을 소개한 전시로, 이번 전시장에서는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이자 작가 자신이 ‘사랑’으로 인식한 숫자 ‘2’에서 출발한 작품 ‘Two’를 만날 수 있었다.

홍콩에서의 일주일, 페어가 하나둘 막을 내리고 도시의 리듬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즈음. 올해 홍콩은 단순한 복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줬다. 3월 28일, 크리스티 홍콩의 이브닝 세일에서는 비록 하한가 기록이지만 장 미셸 바스키아의 ‘Sabado
por la Noche’(1984)가 9,500만 홍콩달러(약 174억원)에 낙찰됐고, 대안적 아트페어 ‘서퍼 클럽’은 두 번째 에디션을 성공적으로 올리며 작지만 강한 파동을 보여줬다. 작년보다 높아진 관심도는 서퍼 클럽이 홍콩 아트 위크를 구성하는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완전한 회복이라 말하기에 아직은 이를지 몰라도, 적어도 올해의 홍콩은 다시금 예술을 중심에 놓을 준비가 된 도시처럼 보인다. ‘여전한’ 홍콩 너머의 ‘여전할’ 홍콩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스친다. 이 여전함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아트 센트럴 홍콩의 풍경.

| 함성이 시작되는 곳 |

3월의 홍콩에 ‘슈퍼 마치’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예술의 물결이 한쪽에서 넘실대는 동안, 반대편
에선 또 다른 역동적 파장이 일어난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럭비 대회 ‘캐세이/HSBC 홍콩 세븐스’(이하 ‘홍콩 세븐스’)의 개최가 바로 그것이다. 홍콩 세븐스는 7인제 럭비 국가 대항전 ‘국제 럭비 세븐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대회로 꼽힌다. 전통적인 럭비가 15명씩 맞붙는 80분짜리 경기라면 세븐스는 이름 그대로 단 7명이 팀을 이뤄 전후반 각 7분씩, 총 14분의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쏟아붓는다. 짧고,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게 승부가 갈리는 만큼 훨씬 더 대중적인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 럭비는 비인기 종목에 머물지만 홍콩에서는 사뭇 다르다.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적 배경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포츠와 파티 문화를 결합한 홍콩 세븐스만의 독특한 풍경 탓에 이를 경험하고자 홍콩행 비행기에 오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제 작년 티켓 소지자의 약 40%가 해외 입국객이었을정도다. 단순한 스포츠 경기 그 이상의 홍콩 세븐스는 3월의 홍콩을 기억하게 만드는 상징적 장면 중 하나인 셈이다.

활기 넘치는 2025 홍콩 세븐스의 풍경. 올해 남자부 우승은 아르헨티나, 여자부 우승은 뉴질랜드가 거머쥐었다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한 올해의 홍콩 세븐스. 남녀부 각각 12개 팀이 참가한 경기는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대회의 진짜 묘미는 경기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홍콩 세븐스는 럭비를 몰라도 재미있는 경기다. 빠르게 휘몰아치는 매치 사이사이, 영국 록 밴드 카이저 치프스의 무대를 비롯해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고, 무엇보다 ‘사우스 스탠드’라 불리는 관객선에서는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이 구역은 쉽게 말해 하드코어 팬들의 놀이터다. 특정 응원
팀도, 드레스 코드도 없지만 ‘가장 창의적인 복장을 한 사람이 진짜 주인공’이라는 암묵적 룰이 존재하는 구역이다. 기상천외한 코스튬 복장은 기본, 이 구역만의 카니발적 분위기는 그라운드 위의 움직임만큼이나 강렬한 풍경을 완성한다. 한편 올해 홍콩 세븐스는 ‘카이탁 스포츠 파크’로 새롭게 보금자리를 옮기며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기도 했다. 한때 홍콩의 하늘길로 통한 옛 카이탁 국제 공항 부지에 들어선 이 스타디움은 총 5만 석 규모를 자랑한다. 자동 개폐식 돔 지붕, 개별 좌석 냉방 기술, 최첨단 음향 및 조명 시스템까지 갖춘 복합형 경기장에서 대회를 개최하며 홍콩 세븐스는 경험의 무대를 완전히 새롭게 리셋했다.

이 축제를 가능하게 만든 또 하나의 큰 축은 바로 스폰서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선 이름은 단연 홍콩을 베이스로 한 ‘캐세이퍼시픽’이다.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온 메인 스폰서답게 단순한 로고 노출을 넘어선 방식으로 관중의 체험을 끌어냈다. 올해 처음으로 스타디움 내 선보인 ‘VIP 라운지 캐세이 윙’은 그런 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공간이다. 이는 홍콩국제공항에 자리한 캐세이퍼시픽 라운지의 감각을 경기장 안으로 옮겨온 것으로, 라운지가 외부 부스와 연결돼 현장의 열기를 실시간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라운지의 안과 밖, 쾌적함과 긴장감 사이를 오가는 경험. 캐세이 윙은 가장 정제된 방식으로 이 축제의 성격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왔다.

홍콩국제공항에 자리한 캐세이퍼시픽의 라운지 ‘더 피어’.
3월 30일, 카이탁 공항 100주년을 기념해 펼쳐진 캐세이퍼시픽의 특별 비행.

피치를 달리는 선수들과 관중석을 가득 메운 함성, 경기장 바깥으로까지 퍼져 나가는 열기. 그와 나란히 예술의 장면들이 평행선을 이루듯 지나간다. 이 두 교차하지 않을 듯했던 그림이 하나로 완성되는 게 바로 3월의 홍콩이다. 이맘때 이곳을 찾은 이들은 전시장을 들렀다 경기장으로 향하고, 낮과 밤을 나눠 전혀 다른 방식의 체험을 쌓는다. ‘슈퍼 마치’의 홍콩은 서로 다른 리듬과 맥락이 하나의 도시 안에서 공존하는 예시다. 도시를 읽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3월의 홍콩은 그 조합이 유독 다채로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음에 이 도시를 마주할 때를 새롭게 상상하게 만든다.

영상으로 만나는 2025 홍콩 아트 위크

Super March! 일 년 중 가장 예술적 모습을 꺼내드는 3월의 홍콩

아트바젤 홍콩 2025의 생생한 현장 속으로

홍콩 M+에서 열린 파블로 피카소의 대규모 전시

제1회 아트바젤 홍콩 ‘MGM 디스커버리 아트 프라이즈’ 수상자 신민 작가

홍콩의 밤, 글래드스톤 갤러리가 주최한 예술적 파티

올해 10회째 에디션을 개최한 아트 센트럴 홍콩

루이 비통과 손잡고 특별한 전시를 개최한 무라카미 타카시

페이스갤러리 홍콩에서 개최된 로버트 인디애나의 전시

타이쿤에서 막을 올린 아트바젤 아티스트 나이트

스폰서
HONG KONG TOURISM BOARD KOREA, CATHAY PACIFIC
사진
COURTESY OF ART BASEL, ART CENTRAL HONG KONG, M+, CATHAY PACIFIC, HONG KONG SEV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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