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한 디자인 아이콘을 만들어낸 이후 지금까지 왕성하게 작업하는 예술가.
아흔 살이 다 되어가는 페드로 프리데버그(Pedro Friedeberg)의 공간을 찾아, 그의 지난 생애와 현재를 엿봤다

2022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페드로(Pedro)>는 멕시코의 저명한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인 페드로 프리데버그(Pedro Friedeberg)에 대해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 몇 가지를 들려준다. 먼저 프리데버그는 자신의 이름에 따라붙는 예술 사조 운동과 자신을 조금도 동일시하지 않는다.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조나 마코’ 아트페어에서 한 젊은 기자가 “당신이 현존하는 마지막 초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자 그는 말했다. “나는 초현실주의자도 아니고 무언가의 마지막도 아니오.”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감독이 프리데버그의 작품에서 손과 발의 중요성에 대해 질문할 때도 그는 발끈하며 답한다. “그것들엔 아무런 의미가 없소. 어쩌다 생각해낸 것뿐이고, 그런 작품이 히트한 덕분에 나는 1만7,000번이나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했소. 이제는 저 의자들에 신물이 나.” 문제의 의자는 1960년대 초 프리데버그가 즉흥적으로 디자인한 ‘핸드 체어’(스페인어로는 ‘Mano-Silla’)에 변주를 준 작품이다. 언젠가 그는 목수에게 ‘사람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손’을 조각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의자를 만드는 일이 그저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핸드 체어가 특별해진 데는 조르주 켈러라는 아트 딜러 역할이 컸다. 프리데버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해 프로토타입을 본 이 명민한 아트 딜러는 그 자리에서 여러 개의 의자 제작을 주문했고, 완성된 의자들은 뉴욕과 파리, 스위스로 보내져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그 독특한 손 모양 의자는 초현실주의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 1960년대를 상징하는 디자인 아이콘 중 하나로 떠올랐다. 1936년생인 페드로 프리데버그가 유명해진 건 물론이다.
위용을 뽐내며 고고한 성당의 앞문을 지키는 괴물 문지기처럼, 거대한 핸드 체어는 멕시코시티의 독특한 건물들 위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마호가니를 사용하거나 금박을 입혀 의자로서의 실용성을 살린 것들은 퍼스트딥스(1stDibs) 같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손쉽게 구입 가능하다. 켈리 웨어슬러(Kelly Wearstler) 같은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프리데버그가 디자인한 독특한 의자를 귀중한 소장품으로 꼽는다. 벼룩시장과 골동품 가게에는 무단 복제품이 넘쳐난다. <페드로>에서 한 작가는 말했다. “프리데버그는 1960년대 문화 예술의 중심이었어요. 모든 사람의 집에 프리데버그가 살고 있었죠. 핸드 체어가 없는 집이 없었으니까요.”


프리데버그의 거대한 존재감이 핸드 체어가 가져다준 디자이너로서의 세계적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회화, 조각, 판화, 설치 예술을 넘나들며 찬사를 받는 시각예술가다. 1959년 첫 개인전 후 그의 작품은 멕시코와 미국, 유럽 전역에서 전시되었다. 뉴욕 MoMA, 루브르, 스미스소니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등 50여 개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페드로>가 미국 넷플릭스를 통해 스트리밍되기 시작하면서, 이탈리아 태생의 멕시칸 노장은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이로운 건 그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예술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왕성하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 예술’을 사랑하는 그는 여러 브랜드와의 상업적 협업에도 적극적이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인 코럼을 비롯해 몽블랑, 테킬라 브랜드 호세 쿠엘보 및 코로나 맥주 등을 위해 아름다운 디자인을 선보인 바 있다. 최근에는 실제 작품으로 탄생한 그의 스케치 수백 점을 한 권에 모은 출판물, <아테르빌 오골라탁(Aterbil Ogolatac)>도 나왔다.
프리데버그는 독일계 유대인 부모 아래서 자랐다. 그가 어릴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가족은 피렌체에서 멕시코시티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할머니 댁 선반에 있던 여러 미술 서적을 보며 일찌감치 예술적 감각을 키웠다. “부모님은 미니멀리스트였다오.” 자신의 멕시코시티 자택과 스튜디오를 ‘쓰레기 박물관’이라고 익살스럽게 표현한 프리데버그가 말했다. 그는 평생 선과 색, 여러 문양으로 가득해 현란하고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만들었지만, 정작 유년 시절 방 안에는 사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테이블과 의자 네 개, 복제된 그림 한 점만 있었지. 나는 촌스럽고 이상한 물건이 가득한 할머니 댁을 좋아했어. 거의 두 세대에 걸친, 예술이 정말 재밌는 시대였던 1912년쯤의 물건들! 아홉 살 때는 아르놀트 뵈클린의 1883년 작 <죽은 자들의 섬(The Isle of the Dead)> 같은 놀라운 그림이 가득한 책을 좋아했으니까. 그렇게 예술과 사랑에 빠진 거지.” 성인이 된 프리데버그는 멕시코시티의 이베로아메리카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엔지니어가 되길 바란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는 당시의 거대한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에 환멸을 느꼈지만, 독일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마티아스 괴리츠(Mathias Goeritz) 교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괴리츠라는 인물과 그의 독특한 교수법 아래서 기량을 닦은 프리데버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건물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비관념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프리데버그는 결국 건축 전공을 관뒀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면서도 마티아스 괴리츠가 속해 있던 특정 모임의 핵심 인물이 프리데버그였다는 것이다. 모임에는 외국인 신분으로 멕시코에 거주하던 영국인 화가 리어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시인 에드워드 제임스(Edward James), 화가 브리짓 바테티체노르(Bridget Bate Tichenor),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커티 호르너(Kati Horna), 멕시코의 예술 역사가 이다 로드리게스 프람폴리니(Ida Rodríguez Prampolini) 등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 유명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부모님께는 계속 건축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 내 인생 최대의 거짓말이었소. 실은 여러 사람들의 집에 놀러 다니기만 했는데. 덕분에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지.” 프리데버그는 괴리츠 교수와 자주 합을 맞춘 유명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운전기사 노릇도 했다. “나한테 작은 폭스바겐 리틀 한 대가 있었소.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루이스 바라간은 운전을 하지 않았고, 마티아스 괴리츠 교수는 멕시코의 교통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는 몇몇 건축물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건축 전공을 그만두었지만, 건축과의 끈은 계속 이어간 셈이다. 산루이스포토시 실리틀라 마을의 정글 속에 자리한 조각 정원, 라스 포사스(Las Pozas)에 그의 아이디어대로 우뚝 솟은 스튜디오가 들어섰다면 볼 만했을 것이다. 라스 포사스는 에드워드 제임스가 만든 환상적인 복합 단지다. 그곳을 위해 프리데버그는 빅토리아 시대 건축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을 디자인했다. 아티초크 모양의 구체가 꼭대기에 놓여 있고, 그것을 거대한 잎처럼 뻗어 나온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디자인. 프리데버그는 여기에 ‘성령의 탑’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설계 단계를 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에드워드 제임스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소. 오직 자기 디자인만 좋아했지. 그 디자인들은 별로 훌륭하지도 않았고, 대부분 영국 브라이턴에 있는 로열 파빌리온을 그대로 베낀 것들인데 말이야.”
멕시코시티 예술계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던 그 전설적인 시기에 마티아스 괴리츠는 현대 예술의 허세를 조롱하며 한 단체를 설립했다. 단체 이름은 ‘진절머리가 난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로스 하르토스(Los Hartos)’. 단체의 핵심 멤버가 바로 프리데버그였다. 프리데버그는 1961년 라 갈레리아 데 안토니오 소우사(La Galería de Antonio Souza)에서 열린 그룹 전시의 데뷔작으로 특유의 유머가 돋보이는 테이블을 선보였다. 과장되게 구불거리는 바로크 양식의 다리가 있는, 그 다리로 마치 달아나려는 듯한 기이한 모습의 테이블이다. 단체의 또 다른 유명 멤버는 ‘이노센시아’라는 이름의 암탉이었다. 오프닝 리셉션 동안 이 암탉은 알을 하나 낳았는데, 알이 금세 깨지고 말았다.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인 앨리스 라혼이 우리 그룹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질투했지. 심술이 난 그녀가 마티아스 교수의 머리 위에서 알을 깨뜨려버렸다오.”
프리데버그의 자택과 스튜디오는 형형색색의 집이 가득한 멕시코시티의 콜로니아 로마 지역 한 길가에 숨어 있다. 그곳은 그가 수십 년간 수집하고 창조해온 기묘한 보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1층에는 작은 액자에 장식된 만 레이,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 루피노 타마요의 작품이 담쟁이덩굴처럼 벽 위로 이어져 있다. 돼지 저금통, 고양이 인형, 오래된 태엽 장난감과 장난감 비행기 등은 커피 테이블을 차지하기위해 서로 자리싸움을 하는 듯하다. 프리데버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작은 골동품들은 소형 핸드 체어 군단이 주둔하는 널찍한 진열장 선반에 줄 지어 있다. 추상적인 그림들, 황금 손과 발이 돋아난 나무 시계,
카드로 세운 위태로운 성 같은 멀티미디어 예술품 등등.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복작거리는 거대한 갤러리다. 위층 스튜디오로 들어서면 벽을 따라 촘촘하게 책장이 있다. 미술용품, 스케치, 작업 중인 작품이 가득한 긴 테이블 위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진다. 고무 도장과 클래식 CD 더미, 살롱 스타일의 그림 여러 점으로 넘쳐나는 쓰레기통이 보인다. 옥상에 보관돼있다는 초대형 핸드 체어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자, 프리데버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끔찍한 갤러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프리데버그의 공간은 한때 그가 ‘네오바로크 키치(Neo-Baroque Kitsch)’라고 묘사한 그의 독특한 미학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타로 카드와 백과사전, 골동품 정기간행물, 독일 동화, 그 외 수많은 요소에서 영감을 얻는 그는 일종의 연극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배경을 그리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기둥과 돔, 아치로 배경을 구성하고 나면 기하학적인 패턴과 연금술 기호, 해부학적 요소, 반복되는 동물 그림, 우리 눈에 익숙한 만화 캐릭터들로 빈틈을 채운다. 미키 마우스, 고양이 펠릭스, 미스터 피넛은 꿈속을 걷는 듯한 아찔한 풍경 속에서 춤을 추며 과거의 향수를 더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프리데버그의 작품들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여백의 부재다. 숨 쉴 틈이 없을 정도의 빽빽함.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라틴어로 ‘호러 바쿠이(Horror Vacui)’, 즉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는 캔버스의 모든 공간을 꼭꼭 채워 넣는다. 미니멀리즘이나 여백을 실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까? 그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미니멀리즘이 싫어.”
노장은 매일 오전 9시 스튜디오에 들어가 이른 오후까지 자리를 지키며, 주로 네 가지 작품을 동시에 작업한다. 각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 그가 자신의 작품을 여러 기법이 혼재하는 ‘합성품’으로, 또 그 속에 담긴 주제를 ‘로고타이프’에 비유하며 자조적인 농담을 건넸다. “내가 하는 일은 동물 혹은 동화 속 존재에 주목한 19세기 예술과 건축을 단순화하는 것뿐이오. 나는 코끼리의 모양과 실루엣을 좋아해. 하지만 그 특유의 미학을 사랑하는 거지, 상징주의와는 무관하다오. 말도 자주 활용하지. 못생긴 말이라도 시선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소. 당나귀라면 모를까, 말은 절대로 못생길 수 없기도 하고.” 프리데버그는 확실히 과거 시대를 더 사랑했다. 그 시대들을 떠올리며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나는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의 시대였던 100년 전이나 다다이즘이 출현한 시기에 속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그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오. 1915년 파리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을 알고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거트루드 스타인을 매우 존경하거든.”
워낙 알록달록한 색들로 작업하는 프리데버그지만, 사실 그는 오랫동안 작품에 초록색을 사용하는 걸 피해왔다. “개인적으로 그 색깔에는 과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 사실 나는 흑백을 가장 좋아한다오. 하지만 사람들은 흑백으로만 된 그림은 사질 않지. 최소 두 가지 색이 더 필요해. 참, 시리즈로 연속되는 것들도 좋아해. 검정, 파랑, 그리고 빨강을 사용한 작품을 하나씩 더 만들어야겠어.” 작업 중인 작품 더미를 정리하던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고백한다. “부끄럽게도 이 그림에는 초록색이 좀 들어가 있긴 하네?”
테이블 위에 가득한 스케치북 중 하나를 훑어보던 그가 2011년에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근 그 그림에 묘사된 크기대로 실물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가끔은 나 자신에게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오.” 이때, 그의 반려묘 ‘넷플릭스’와 마주쳤다. 넷플릭스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지켜봤다는 듯 각종 독특한 물건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몸을 쭉 뻗으며 특유의 나른한 눈빛을 보냈다. 반려묘 이름에 대해 묻자 프리데버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소. 넷플릭스가 뭔지도 몰랐지만, 철자가 ‘X’로 끝난다는 점이 중요했으니까. 내가 종종 그린 고양이 펠릭스도 X로 끝나는 이름이었지. 그냥 ‘고양이의 이름은 X로 끝나야 하나 보다’ 그랬소.” 이 반려묘가 인스타그램에서 주목받은 순간이 있다. 프리데버그가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사용하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정교한 대형 체스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모습이 포스팅됐을 때다. “집에 종종 체스를 아주 잘하는 랍비가 찾아와주곤 한다오. 체스 실력이 제법인 내 아들이 오기도 하고. 예전에는 내가 다 이겼는데, 요즘엔 지고 있지.”

프리데버그는 자신을 화가라고 말하지만, 그가 만든 조각품 역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훌륭하다. 마티아스 괴리츠 밑에서 공부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절부터, 그가 만든 입체 작품은 ‘사실상 존재 불가능한 건물’의 형태를 띠곤 했다. 실용성이 없을 뿐 아니라 다양한 건축 양식에서 차용한 골격 구조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줄무늬 기둥과 금색 돔부터 동물과 신체 부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혼합된 작품들이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교회와 성당, 모스크를 떠올리게 하지만, 고대 신화 도시나 환상 속에서나 볼 법한 모양새다. “건축은 세상을 비틀어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분야라고 생각하오.” 프리데버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은혜로’ 철저한 무신론자다.
이미 여러 번 설명했듯이, 프리데버그는 1950년대의 천재들과 틀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그들의 성향에 지루함을 느껴 건축 공부를 중단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축가가 두 명 있었다. 프랑스 오트리브에서 33년 동안 모래성을 연상시키는 팔레 이데알(Palais Idéal)을 건설한 우체부, 페르디낭 슈발(Ferdinand Cheval). 그리고 LA에서 역시 33년 동안 와츠 타워(Watts Towers)를 이루는 17개 건물을 건설한 이탈리아 예술가 시몬 로디아(Simon Rodia)다. 혹시 페드로 프리데버그가 건축계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쎄, 아무도 나에게 의뢰비를 주려고 하지 않았겠지. 나는 아마 굶어 죽었을 거요.”
- 포토그래퍼
- BRYAN RINDFUSS
- 글
- BRYAN RINDFU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