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던 혹은 모른 체하던 미술사 속 흑인의 형상에 눈을 뜨다.
서양 미술사에서 화폭에 등장하는 흑인은 대부분 출신과 이름을 알 수 없고, 이국적이며, 성적 대상에 그치거나 비천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여기서 벗어나 그림 속 흑인을 주체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탐구할 수는 없는 걸까?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전통적 시선에서 벗어나, 가장 지금의 ‘블랙’을 제시하는 대규모 그룹전이 열렸다. 이 뮤지엄 전시는 그간 우리가 몰랐거나 모른 체한 세계에 대해 눈뜨게 만든다.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가득 메운 총 60여 점의 구상화들, 그 화폭에는 흑인의 삶과 일상에서 영감을 얻은 숱한 장면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지난 2월 9일까지 이곳에서 열린 대규모 그룹전 <그때는 언제나 지금이다: 예술가들이 흑인 형상을 재구성하다(The Time Is Always Now: Artists Reframe The Black Figure)>의 풍경이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이자 영국 출신의 작가 에코우 에슌(Ekow Eshun)은 말했다. “20세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서양 미술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흑인 형상은 흑인이 아닌 백인 예술가들이 묘사한 것이었어요.” 1770년경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이 그린 흑인 상류층 여성 디도 엘리자베스 벨(Dido Elizabeth Belle)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귀엽게 미소 짓는 모습이 인상적인 그녀의 초상화는 2013년 영화 <벨>에 깊은 영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아마 아산테가 감독한 영화는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흑인 노예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주인공 ‘벨’의 이야기를 담는다. 한편 19세기 자메이카 여성인 패니 이튼(Fanny Eaton)은 런던 왕립예술원과 라파엘 전파(前派) 예술가들을 위한 그림 모델로 활동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모델이었던 로르(Laure)는 마네의 1863년 작 ‘올랭피아(Olympia)’에서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백인 여성에게 꽃을 건넨다. 하지만 이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서양 미술사에서 회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흑인은 출신과 이름을 알 수 없고, 이국적이며, 성적 대상에 그치거나 비천한 모습을 하고 있다. 풍요로운 물질의 지복을 누리는 그림 속 주인공들과 달리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셈이다.

세상에 변화를 촉구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발언에서 제목을 딴 이번 전시는 동시대 흑인 및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현대미술가 28명을 한자리에 모아 가장 최근까지 흑인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예술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서구 미술의 전통 기준에 질문을 제기하고 저마다 색다른 시각을 제시했어요. 흑인의 삶이 가진 풍부함과 복잡성을 작품 속에 담아냈죠.” 에슌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미술계에서 흑인 구상화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바로 이 순간을 기념하는 전시로, 모든 전시작은 2007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바로 ‘지금’의 흑인 구상 미술을 제시한다. 전시장을 메운 그림들은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표현 방식을 띠고 있지만 모든 작품을 하나로 묶는 큰 특징이 있다. 바로 흑인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 그림 속 흑인을 주체적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흑인 정체성을 예술가 본인의 시각에서 탐구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접근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총 60여 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섹션은 사회학자이자 시민권 운동가 W.E.B. 듀보이스(Du Bois)가 ‘흑인성(Blackness)’을 설명하며 언급한 ‘이중 의식(Double Consciousness)’이다. 듀보이스는 흑인들이 신체적으로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속해 살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밖에서 살아가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이중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이것은 매우 특별한 감각이다. 항상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고, 경멸과 연민으로 가득한 세상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영혼을 평가한다”고 언급했다.
‘이중 의식’ 섹션에서는 강렬한 작품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영국 출신의 작가 클로데트 존슨(Claudette Johnson)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존슨의 그림은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을 크게, 그리고 단일 주인공으로 내세워 지금껏 보아온 전통적 그림과 확연히 다른 반응을 끌어낸다. 대표작 ‘Standing Figure with African Masks’에서 작가는 직접 캔버스 속 인물이 되어 차가운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이는 아프리카 예술을 향한 피카소의 인식과 좁은 견해가 반영된 큐비즘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 응수하는 마음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한편 미국의 화가 너새니얼 메리 퀸(Nathaniel Mary Quinn)은 가족과 친구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노동자 계층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만난 인물들의 얼굴을 여러 조각을 이어 붙인 형태로 완성하여 표면적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혼란스러운 내면의 이중 의식 상태를 그대로 그려냈다. 작품 ‘Homeboy Down The Block’은 과장된 눈과 살짝 뒤틀린 입술, 아름다운 플로럴 패브릭 패널이 한데 어우러져 인물의 취약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퀸은 ‘겉모습만 보면 길거리 폭력배처럼 보이는’ 실제 지인을 그려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런 사람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대부분 반대쪽으로 급히 발길을 돌리고 말겠죠. 하지만 그가 지닌 장벽을 깨고 들어가 보니, 제가 마주한 건 누구보다 연약하고, 불안정하고, 의심을 잔뜩 품은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꿈이 있고, 삶에서 언젠가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지만 그 방법을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었죠.” 퀸의 설명이다. 한편 실재와 비실재가 동시에 이뤄지는 독특한 의식 상태인 ‘이중 의식’은 미국의 예술가 케리 제임스 마셜(Kerry James Marshall)의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강렬한 색감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매우 짙고 과감한 블랙 컬러로 흑인의 피부색을 표현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인물에게 집중시키는 동시에 ‘흑인성’이라는 개념이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또 다른 예술가인 에이미 셰럴드(Amy Sherald)는 단색을 사용하는 르네상스 페인팅 기법 ‘그리자유(Grisaille)’를 활용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피부색은 회색으로, 그들이 입은 옷은 생동감 넘치는 밝은 색상으로 표현한다. 이는 인물 자체에 시선이 모아지도록 하는 전략인 셈이다.


긴 서양 미술사에서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편견이 존재해왔다. 전시의 두 번째 섹션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ce)’에서는 이러한 과거의 편견에 맞선 현재의 탐구를 보여주는 작품이 자리한다. 전통 서양화 속에서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는 흑인의 모습을 흑연 연필로 강조한 바버라 워커(Barbara Walker)의 작품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1600년대 활동한 프랑스 궁정화가 피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의 1682년 작 ‘Louise de Kéroualle, Duchess of Portsmouth, With an Unknown Female Attendant’를 엠보싱 페이퍼 위에 흑연으로 옮긴 뒤, 화면 가운데를 차지한 백인 여성(포츠머스 공작부인)보다 진주와 빨간 산호를 손에 쥔 흑인 소녀를 더욱 정교하게 그려낸다. 이는 원화 속 주변에만 머물러 있던 흑인 소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시도였다. 한편 이 흑인 소녀는 타이터스 카파(Titus Kaphar)의 작품 ‘Seeing Through Time 2’에서도 등장한다. 그는 포츠머스 공작부인의 모습을 윤곽선만 남긴 채 완벽히 지우고, 빈 공간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흑인 여성의 얼굴로 채워 넣었다. “예술사를 살펴보면 흑인을 묘사하는 유형이 몇 가지로 정리됩니다. 막 노예가 됐거나, 이미 노예 상태이거나, 가난에 찌들어 있죠. 대개 이런 흑인 인물은 백인이 사랑을 주어야 하는 존재로 비칩니다. 이런 장면을 보며 저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 두 인물을 모두 흑인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역사적인 그림들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나지 않을까?’라고요.” 카파의 말이다.

전시 큐레이터인 에슌은 이러한 의식 있는 예술가들에게 역사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역사적 기록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런 과거와 계속해서 대화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흑인의 존재는 다른 것 이상으로 부각될 수 있고, 새로운 존재로 소환될 수 있으며, 오늘의 시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Our Aliveness)’이라는 제목으로 분류된 세 번째 섹션에서는 생명력을 가진, 기쁨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흑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덴질 포레스터(Denzil Forrester)는 인종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 아프로-캐리비안 커뮤니티에 안식처가 되어준 1980년대 런던 ‘덥(Dub)’ 신의 열기와 에너지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덥’은 자메이카에서 시작된 레게 음악의 일종이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 토인 오지 오두톨라(Toyin Ojih Odutola)는 같은 주제를 허구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의 작품에는 화려한 소파에 느긋이 기대어 있거나 식민주의를 통해 축적된 풍요를 상속받아 편안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흑인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던 캐스틸(Jordan Casteel)의 대형 캔버스에는 할렘가 사람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이 담겨 있다. 캐스틸은 만남이 선사하는 본질적인 기쁨과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자 한다. 이런 그녀의 작품 세계를 완벽하게 담아낸 작품이 ‘James’와 ‘Yvonne and James’다. “제임스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요. 할렘의 125번가였고, 이 지역의 유명 식당인 ‘Sylvia’s Restaurant’ 앞에서 CD와 각종 생활용품을 팔고 있었죠. 우린 금세 친구가 됐어요. 제임스는 매일 스튜디오를 오갈 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고, 그를 통해 제임스의 파트너이자 제 삶에 큰 빛이 되어준 이본까지 알게 됐어요. 두 사람은 제게 할렘에 있는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캐스틸의 설명이다. 캐스틸은 ‘흑인 여성으로서 내가 그린 모든 작품은 자연히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전시는 그림을 둘러싼 정치성을 바라보는 대신 한층 단순한 관점으로 오로지 작품과 교감해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작품 사이로 터져 나오는 캐스틸의 열망은 전시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에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캐스틸이 말했다. “조금 더 깊이, 가까이, 천천히 바라봐주었으면 합니다. 구상화, 특히 흑인 구상화를 감상하는 일은 관람객에게 그들의 내면에 있는 가설과 경험에 질문할 기회를 제공해요.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눈뜨게 하는 선물 같은 순간이 되기도 하죠.
- 글
- NANCY DURR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