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 그 낙인으로부터 구원해주려는 남자
드라마 <마녀>는 상처로 점철된 삶이지만 이윽고 서로의 존재로 구원받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배우 박진영, 노정의 두 사람이 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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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Korea>두 분 오랜만의 만남이죠? 채널A <마녀> 촬영이 일찍이 재작년 끝났다고 들었어요.
박진영 그렇죠. 그런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간간이 통화하긴 했어요. 후시 녹음은 잘하고 있는지 얘기하거나 가끔 하소연도 하면서(웃음).
노정의 <마녀> 팀이 다 같이 면회를 간 적이 있는데 하필 저만 일정이 있어 못 갔거든요. 사죄 차원에서 통화를 나눈 적도 있죠.
작년 11월 전역이었죠? 전역 당일 어머니에게 군번줄을 걸어주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어요.
박진영 그 장면을 만화에서 본 적이 있거든요. 입대할 때부터 계획한 그림이에요(웃음).
<마녀>는 로케이션 촬영이 유독 많은 현장이었다 들었어요. 지방 촬영의 묘미로 맛집 탐방을 빼놓을 수 없는데, 기억에 남는
곳이 있나요?
박진영 맛집과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서 촬영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노정의 한겨울 새소리만 들려오는 곳에서 군고구마를 사이좋게 나눠 먹은 기억이 많죠.
박진영 영화 <암수살인>을 연출한 김태균 감독님의 첫 드라마 연출작이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감독님이 로케이션에 공을 많이 들이셨어요. 춘천에 메인 야외 세트장을 지었는데, 천호동을 그대로 옮겨와 굉장한 규모로 완성했어요. 사거리 골목부터 만두 가게까지 디테일이 상당해요. 총 10부작 드라마인데 개인적으로 감독님이 단편영화 10편을 만드셨다 싶을 정도로 영상미가 뛰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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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강풀의 웹툰 <마녀>를 원작으로 하죠. 장르는 멜로지만 설정이 굉장히 독특해요.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마다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해 ‘마녀’라 불리게 된 ‘미정’(노정의)과 그녀를 고등학생 때부터 짝사랑하며 ‘미정’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동진’(박진영)의 이야기를 다뤄요.
박진영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다가가면 다치거나 죽는다.’ 굉장히 생경한 설정이잖아요. 덕분에 남녀 주인공이 붙는 신이 가장 적은 멜로 드라마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어요. 저희끼리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어요. ‘우리 다음엔 꼭 같이 작품 하자.’(웃음)
노정의 대사도 멀찍이 떨어져서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멀리서 ‘자, 시작할게!’ 외치면 ‘오케이!’ 하는 식으로.
박진영 그런데 그게 묘하게 매력적이었어요. 분명 떨어져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진한 감정이 느껴질 때가 많았거든요.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보자.’ 강풀이 <마녀>를 집필할 당시 떠올린 생각이었다죠. 드라마 역시 원작에 충실해 제작됐는데, 대본을 본 첫인상은 어땠어요?
박진영 지금 나이에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진한 감정을 담은 작품이란 인상이 있었어요. 여태 받아본 대본 중 가장 감정이 짙게 묻어나 있었거든요. 대본을 읽다 순간 빨려들어 ‘하고 싶다’는 불씨가 지펴질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은 읽자마자 바로 그랬어요. 또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동진과 미정의 얼굴을 따라가고 싶다.’ 10부 내내 인물들의 감정에 포커스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이런 작품에 욕심을 내지 않을 배우는 없죠.
노정의 좀 힘찬 자신감이긴 한데요. 제가 시청자여도 <마녀>를 인생 드라마로 꼽을 것 같아요. 그만큼 글이 좋아요. 사실 <마녀> 제작 소식이 알려진 당시만 해도 제가 이 작품에 합류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나이대가 문제였거든요. 원작상 ‘미정’은 30대인데 그 당시 제가 갓 스물을 넘긴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대본을 읽고 너무 미련이 남더라고요. 어떻게든 감독님을 직접 만나 설득해보자 싶었어요.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꽤 호기롭게 말씀드린 것 같아요. ‘감독님, 캐릭터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배님들께 들었습니다. 저, 이 작품 정말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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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의에게 <마녀>는 쟁취에 가까운 작품이네요.
노정의 그렇죠. 감사하게도 감독님이 제 진심을 알아봐주신 기분이에요. 나이대를 조금 낮춰서라도 같이 해보자고 말씀해주셨으니까요. 사실 감독님을 뵌 첫날 이 작품에 더 욕심이 생긴 것도 있어요. 대화가 즐거웠던 건 당연하고, 말씀 하나하나에서 ‘이 작품을 정말 사랑하는구나’가 느껴졌거든요. 그 누구보다 원작에 대한 이해가 깊으셨어요. 감독님과는 꼭 <마녀>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함께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박진영 그런데 감독님도 첫 만남에서 정의에게 사랑에 빠지신 것 같아요.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날 정의가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데 ‘미정’인 줄 알았다고 하셨거든요.
극 중 ‘미정’의 주위에선 늘 비극적인 사건·사고가 일어나요. 불행, 낙인, 고독은 이 캐릭터를 설명하는 단어들이죠. 노정의가 ‘미정’을 연기하며 품고 간 캐릭터의 중심 심리는 무엇이었어요?
노정의 신기하게도 이 작품을 촬영하면서는 ‘연기한다’는 마인드가 없었어요. 현장에 가면 그냥 늘 외로웠어요. 슬픈 감정이 훅 들어왔어요. 생각해보니 정말 머리로 계산해서 찍은 신이 거의 없네요. 슬픔, 외로움, 헛헛함, 공허함. 이 감정들에 집중한 게 전부였어요.
반면 ‘동진’의 경우 치밀히 계산해 접근해야 하는 캐릭터였을 듯해요. ‘미정’에 얽힌 미스터리를 하나하나 추적해가는 인물이고 이런 ‘동진’의 시점에서 극이 전개되잖아요.
박진영 그렇죠. 이번 작품에서 시도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목소리에 캐릭터의 역사가 있다.’ 언젠가 들은 이 말을 ‘동진’에 적용해보고 싶었어요. ‘동진’의 직업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이터 마이너’예요. 업계 최고 대우를 받는 실력자고, 한마디로 천재 기질이 있는 사람이에요. 엄청나게 똑똑하지만 엄마나 친구 앞에선 한없이 평범해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기도 하고요. 이 친구의 삶의 태도를 바탕으로 목소리를 상상했을 때, 평소 제 목소리보다는 톤이 조금은 높고 또 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첫 촬영 때 두 가지 버전으로 가봤어요. 그냥 제 목소리, 또 제가 만든 인물의 목소리로. 다행히 감독님께서도 좋은 설정인 것 같다고 해서 새롭게 잡아본 톤으로 계속 찍을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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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전개되면서 ‘동진’은 죽음을 무릅쓰고 ‘미정’에게 다가가며 그녀에 얽힌 비밀을 풀고자 해요. 상식적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죠. 왜 ‘동진’은 목숨까지 내걸면서, 그토록 무모하게 ‘미정’을 구하려 했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요?
박진영 저도 그 부분을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사실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를 찾거나 계산을 하지는 않죠. 저는 그래서 ‘동진’의 행동이 더 사실적이라 느껴졌고 지극히 현실에도 존재할 법한 사랑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진’은 냉철한 전략가지만 사랑 앞에선 한없이 무모해지곤 해요. 두 사람 역시 사랑에 빠졌을 때만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있어요?
박진영 아, 이 질문은 좀··· 제가 11년째 ‘아가새’들과 연애 중이라···(웃음).
노정의 아직 갓세븐 콘서트가 끝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서···(웃음).
박진영 저는 어떻게든 상대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요. 연인과 깔깔대면서 노는 걸 좋아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웃을 때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웃을 때까지 열심히 개그를 치곤 해요. 아, 물론 이번 콘서트 때를 말하는 거예요(웃음).
노정의 아···(웃음). 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가 해줄 수 있는 친절의 끝까지 가요. 그리고 ‘뚝딱이’가 되죠. 좋아해서 챙겨주고픈 마음을 상대가 눈치채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오히려 상대를 멀리하기도 하고요. 반대로 아예 편하게 대해버리거나.
‘미정’은 마녀라는 낙인, 오해 속에 살아가는 인물잖아요. 그렇다면 흔히 사람들이 두 분에게 갖는 오해 같은 것도 있을까요?
박진영 여태 작품을 하며 가벼운 캐릭터를 맡아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인지 저를 진지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최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며 ‘너 마냥 진지하진 않구나’라고 말한 분들이 여럿 있었어요.
노정의 저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서인지 저를 마냥 어리게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네가 벌써 스물이 넘었어? 아직 아기 같은데?’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거든요.
박진영 어찌 보면 내면은 누구보다 빨리 컸을 수도 있는 건데, 그치?
노정의 물론 아직 멀었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이 단단해지고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찌 됐든 제가 더 열심히 시간을 보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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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한겨울 가장 시린 때 촬영했지만, 두 분이 호흡하며 어느 때보다 뜨거운 한 철을 보낸 셈이잖아요. 가까이서 바라본 서로는 어떤사람이자 배우로 느껴졌나요?
박진영 정의는 좀 누나 같아요. 저보다 어린 데도 현장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무척 어른스러워요. 굉장히 포용적인 성격이라 동생이지만 선생님, 우리 노 선생님에게 노련함을 느낄 때가 많았죠.
노정의 저는 오빠에게 고마움도 있지만 미안함이 커요. <마녀>를 찍은 게 벌써 2~3년 전이니까, 그때 당시 저는 여러모로 한참 부족했거든요. 촬영이 끝나고 1년이 지나고, 또 오빠가 군대에 있으니 옛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촬영하며 제가 놓치고 간 게 선명히 떠오르면서 오빠가 저 대신 짊어지고 간 게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어요. 내가 그걸 몰라줬구나 싶어서 군대에 있는 오빠에게 전화해서 사과한 적도 있어요. 기억나죠?
박진영 아니, 그런데 그것조차 노정의 그 자체 같은 거예요. 저는 불편한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정의가 워낙 세심해요.
노정의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더 성장한 시간이었어요. 또 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 것도 컸고요. 마냥 어린 동생으로만 대했다면 저는 오히려 불편했을 것 같거든요. 상대 배우를 이렇게까지 존중하고 챙길 수도 있구나를 자주 확인했어요. 물론 한파가 불던 어느 날 이런 말을 하긴 했지만···. “야 춥지, 춥지. 나도 춥다? ”(웃음)
박진영 와, 정말 못났다!(웃음)
하하, <마녀>란 작품이 두 사람에게 남긴 것은 뭘까요?
박진영 연기하는 데 예전보다 자유로움이 생긴 느낌이에요. ‘동진’이란 캐릭터에 접근할 때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란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동진’은 누가 봐도 천재지만 지극히 평범한 구석도 많거든요. 천재성과 평범함은 사뭇 다른 성질인데, 사실 사람에겐 누구나 양면적인 모습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엔 ‘이 캐릭터라면 이러지 않을 텐데’라고 단정 지어 연기했다면, 이걸 ‘동진’을 만나고부터 많이 깰 수 있었죠.
노정의 연기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원래는 불안, 걱정이 많은 타입이었어요. 내가 가는 방향이 맞나, 내가 해석한 게 맞나, 지금 잘하고 있나를 계속 검열했어요. 그런데 <마녀>는 누구 하나 ‘너 자신을 믿고 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그걸 듬뿍 느끼게 해주는 현장이었어요. 사실 이전까진 스스로 불안하다 보니 즐기는 법을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을 통해 연기를 온전히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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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에 이어 두 분 모두 차기작이 기다리고 있죠. 노정의는 MBC <바니와 오빠들>, 박진영은 tvN <미지의 서울>에 출연해요. 상반기 두 편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가닿은 후, 가장 듣고 싶고 기대하는 피드백이 있어요?
박진영 ‘너 잘 살았구나.’ 연기할수록 느끼지만, 배우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갖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 같아요. <마녀>나 <미지의 서울>에서 제가 맡은 캐릭터는 특히나 그 배우가 가진 삶의 태도, 거기서 나오는 질감이 잘 버무려졌을 때 온전히 표현된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얘가 잘 살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구나, 그게 작품과 캐릭터에서 드러나고 있구나’ 이 말을 들으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노정의 ‘축하해’라는 말. 사실 <마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그래서 이 작품을 마음 가득 담아서 온전히 축하해주고 싶어요.
“나 그녀에게 간다.” 죽음을 무릅쓰고 ‘동진’이 ‘미정’에게 달려갈 때 남기는 이 한마디는 <마녀>란 작품을 관통하는 한 문장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두 사람이 올해 새기며 가고 싶은 한 문장이 있을까요?
노정의 ‘나, 뱀띠.’ 올해가 뱀의 해인데 제가 뱀띠예요. 최근 친구가 장난삼아 이런 말을 해줬거든요. ‘뱀띠, 올해는 네가 먹는 거다!” 이 귀여운 한마디에 헤실헤실 웃음만 나왔어요.
박진영 그렇다면 갓세븐의 신곡 ‘Python’을 듣지 않을 수 없겠네요. 뱀의 해, 멤버 뱀뱀이 작곡한 비단뱀에 관한 노래!
노정의 아… 열심히 듣고 있어요. 나 진짜 공개된 날 세 번 들었어(웃음). 올해는 정말 ‘나 뱀띠’란 생각을 자주 하려고요. 이 자신감을 밀고 가보자란 생각이에요.
박진영 저는 작년 연말 우연히 읽고 아직도 좋은 영향을 얻고 있는 글귀가 있는데요. ‘뭐든 일어나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이든 조금은 거리를 둔 채 생각하는 습관을 키우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어딘가 더 단단해질 것 같아요.
- 포토그래퍼
- 양중산
- 스타일리스트
- 황금남, 구민아(박진영)
- 헤어
- 안홍문(박진영), 배경화(노정의)
- 메이크업
- 최수일(박진영), 조혜미(노정의)
- 어시스턴트
- 김수림, 나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