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덕질 연대기

권은경

‘한국’이라는 이름 아래 파생되는 문화가 전 세계 곳곳에 스며드는 시대, 그중 하나씩만 골라 100분 토론을 펼쳐도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 모든 산업과 창작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순수한 ‘덕심’이다. 여기, 개인의 취향과 열정을 삶으로 발전시킨 이들이 그 애호의 역사를 고백한다.

가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좋아하는 마음

‘좋은 신발을 신으면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이 있다. 같은 문장에 나의 경험을 녹여 응용하며 살았다. 누군가 평생 좋은 신발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평생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맸다. ‘좋아하는 마음’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아름답고 멋진 것을 볼 때마다 기필코 피어난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그걸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다는 답지 않은 부지런함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시작은 비교적 평범했다. 집에서 먼 학원에 다닌 탓에 학원 봉고차에 가장 일찍 타고 가장 늦게 내리는 건 언제나 나였다. 덕분에 매번 기사님 옆자리를 독차지하며 라디오 주파수 결정권이라는 소소한 권력이 주어졌다. 주로 89.1MH과 91.9MH 사이에서 고민했다. 두 채널 모두 진행자의 말보다 음악을 더 틀어주고 싶어 하는 제작진의 무언의 노력이 어린 나에게도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두 채널 사이에서 방황하던 어느 토요일 아침, 꿈결 같은 전주가 흘러나왔다. 윤상의 ‘행복을 기다리며’였다. 이 노래가 실린 윤상 1집 <이별의 그늘>은 내가 태어나 처음 구입한 카세트테이프가 되었다. 초등학생의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한 푼이라도 저렴한 ‘길보드’ 구매였던 점, 이제와 늦었지만 윤상 씨와 지구레코드에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

하드웨어(카세트 라디오)와 소프트웨어(카세트테이프)를 겸비하고 나니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눈을 뜬 모든 순간에 라디오를 들었고,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면 인트로가 잘리지 않거나 DJ의 멘트가 겹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공테이프에 녹음했다. 이 취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영어 교재 카세트테이프가 희생되었는지, 부모님께는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다. 라디오는 정말이지 훌륭한 음악 선생님이었다. 이불 속에서 신해철의 ‘음악 도시’ 같은 심야 음악 프로그램을 몰래 들으며 낄낄댔고, 주말이면 배철수 아저씨가 버터리한 발음으로 소개해주는 ‘아메리칸 톱 40’ 순위를 들리는 대로 노트에 받아 적었다.

아무튼 음악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좋아하는 가수를 실제로 보고 싶어 방송국을 찾은 것도,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 모여 있다는 PC통신이 궁금해 컴퓨터가 있는 친구 집을 하굣길 참새방앗간처럼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쓸데없이 열심이다 보니 같은 학년에 금방 소문이 퍼졌다. 반에서 음악 좀 듣는다는 장르별 무림 고수들이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을 찾았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홍대 인디 음악 예비 전문가에게서 밴드 델리 스파이스를, 자타공인 일본 음악통 친구에게선 밴드 스피츠를 영업당했다.

한층 넓어진 음악 세계는 결국 나를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넓은 세상으로 이끌었다.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대학을 졸업한 후, 대부분의 곡을 직접 쓰고 부르는 밴드 스피츠 보컬 구사노 마사무네의 노랫말을 번역 없이 이해하고 싶다는 ‘덕심’ 하나로 현해탄을 건넜다. 히라가나나 가타카나 같은 기본적인 글자 하나 읽지 못한 상태였다. 변변한 친구도 없어 처음엔 줄곧 라디오만 끼고 살았다. 그곳에서 램프나 후지 패브릭 같은, 당시 신에서 한참 떠오르던 젊은 일본 밴드를 잔뜩 알게 되었다. 입과 귀가 조금 트인 후에는 틈날 때마다 시부야나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라이브 클럽을 찾았다. 공연장에 갈 돈이 부족한 주말이면 정기권으로 갈 수 있는 거리 내에 있는 중고 서적과 음반 판매점 ‘북오프(BOOKOFF)’를 싹 훑었다. 비싼 음반은 관심 없었다. 300엔, 500엔, 1,000엔짜리 특가 매대가 목표였다. 음악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놀거리는 정말이지 무궁무진했다.

어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 상황은 떠나기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가수 보아가 일본 오리콘 차트와 무도관을 누비며 한창 ‘국위선양’ 중이었고, 덕분에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부쩍 높아져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일본에서 드라마 <겨울연가>와 ‘욘사마’의 인기가 터진 것도 유효했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제이팝을 소개하는 오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90년대의 격동기를 거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한국 홍대와 인디 음악을 디깅하기 시작했다. 몸으로 익히고 귀로 체득한 한국 음악은 메이저와 인디 할 것 없이 완성도와 음악적 깊이를 빠르게 높여가고 있었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는 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였다.

@smtown

보아에 이어 동방신기, 빅뱅 같은 아이돌 그룹이 일본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며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 사이 케이팝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일본 친구들이 나에게 ‘일본에 올 때 케이팝 CD를 사다 줄 수 있냐’고 요청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어났다. 일본 음반을 사달라는 한국 음악 친구들의 부탁이 일상이던 유학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이후 큰 파도가 한 번 더 밀려왔다. 특히 영미권 시장에 케이팝 인기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유명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터진 2012년, 나는 공교롭게도 마침 미국 시애틀에 있었다. 하고 많은 도시 중에 시애틀을 택한 건, 친구도 친구였지만 역시 그런지와 서브팝 레코즈, 그리고 음악 방송국 KEXP 때문이었다. 짧고 굵은 직장 생활을 마치고 12월 31일 운명처럼 마주친 유학상담소 간판에 이끌려 무작정 건너온 그곳에서, 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입었던 의상을 재현한 싸구려 코스프레를 한 채로 밤새도록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췄다. 그야말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핼러윈이었다.
멋 따라 음악 따라 제멋대로 굴러온 나의 인생은 결국 이 모든 걸 빠짐없이 아우르는 ‘마라탕후루딸기김치찌개’ 같은 조금 괴상한 메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 번 좋아진 마음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윤상이 프로듀싱한 걸 그룹 러블리즈의 음악을 여전히 좋아하고, 일주일에 최소 한두 번은 공연장에 간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받아 적던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린 케이팝 가수 이야기를 하는 데도 익숙해졌고, 한국 음악에 대해 쓴 책이 영광스럽게도 내년 초 번역을 거쳐 일본 현지 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은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를 내밀며 윤상 1집 카세트테이프를 사던 그때 그대로다. 다만 내가 좋아한 것들의 위상과 좋아하는 마음이 이어준 인연의 숫자가 변했다. 덕분에 좋아하는 마음으로 먹고살며 대중음악 평론가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도 얻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빽도’는 없는 이곳에서 좋아하는 음악에 매일같이 인사를 건넨다. 지금까지 고마웠고, 줄 수 있는 게 이 마음밖에 없는 나를 앞으로도 부디 잘 부탁한다고.
글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한국 무용
나, 춤추는 나무

최근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는 내게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순간들의 기록이다. <정년이>에 등장하는 72개 장면의 안무를 맡는 프로젝트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나는 한국무용 전공자가 아닌 30명 정도의 배우들과 연습하며 그들이 극 중 오디션을 보거나 국극에 임하는 장면을 완성했다. 내가 가진 욕심이라고 하면 전공자가 봐도 인정할 수 있을 만한 한국무용의 멋과 미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움직임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극에서는 풍자와 해학이 담길 수 있도록 표현하고 싶었다. 최종화에 등장한 ‘쌍탑전설’ 공연에서 정년이(김태리 배우)는 술을 좋아하는 ‘아사달’을 맡았다. 그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나는 밤마다 술에 취한 자들을 관찰하러 나갔다. 우리는 연습 때도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기분 좋게, 혹은 슬프게 취한 몸으로 움직여보기도 했다. 칼춤 추는 장면을 연기한 혜랑(김윤혜 배우)의 팔에는 늘 멍이 가득했다. 그 모습은 내가 겪은 과거의 고통과도 닿아 있었다.

나는 춤을 추기 전까지 내가 하던 것이 춤인지조차 몰랐다. 그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걸 좋아했을 뿐이다. 내 몸이 음악에 이끌리는 순간들조차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적 어느 날, 그 분홍치마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무용학원 차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분홍빛 치마가 어쩐지 빛나 보였다.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 장면이 내게는 한 편의 영화처럼 남았고, 분홍치마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게 뭔지, 어디로 가는 건지 알아야 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저게 뭐야? 무슨 학원이야?” 그날 이후, 나는 그 문턱을 넘었다. 춤이 아니라 분홍치마에 이끌려 운명처럼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내 인생의 첫 페이지가 거기서 열리는 것만 같았다. 춤은 그렇게 첫사랑처럼 찾아왔다.

그러나 키가 작은 나는 입시라는 차가운 제도 앞에서 선생님들의 우려를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높이 뛰어야 했다. 5분짜리 콩쿠르 작품 안에서는 단 한 번도 뒤꿈치를 온전히 땅에 붙이고 설 수 없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내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버텨야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새벽 6시 연습 시작’을 거른 법이 없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하루를 마치는 날이 이어져도 마음 한구석엔 늘 아쉬움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가장 잘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그 답은 ‘존재감’에 있었다. 무대 위에서 남들과 다른 빛을 내는 무언가. 그것은 단순한 기교나 동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몸속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특별한 에너지다. 그 점을 깨달은 후 매일같이, 심지어 지하철을 탈 때도 나만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연습을 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볼 때까지,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뒤돌아볼 때까지 말이다. 나는 신체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힘, 내가 가진 특별한 에너지가 존재감을 만들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연습은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안무’에는 때가 있다고들 한다. 나는 춤을 사랑했지만, 그 춤으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몰랐다. 안무가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던 내가 달라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항암 치료로 몸무게가 15kg이나 빠진 어머니는 낙엽처럼 보였다. 삶의 희망을 잃은 어머니를 보며 나는 결심했다, 그녀와 함께 무대에 서기로. 관객들의 박수가 어머니를 다시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한 여인의 삶을 움직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의 안무는 그녀의 이야기였고, 고통이었으며, 동시에 그녀에게 건네는 나의 간절한 위로였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첫 안무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씨앗이 되어 이후의 안무들도 자연스럽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주제로 삼았다. 슬픔과 위로, 희망과 사랑. 나는 안무란 결국 무수한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은 오로지 진심에서 비롯된다. 지금도 내가 움직임을 만들 때면, 어머니와 함께했던 그 첫 무대가 떠오른다.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께서 언젠가 한국의 미를 이렇게 표현하신 적이 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을 묘사할 때 등장한 이 말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무용에도 그대로 닿아 있다.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한국무용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한옥의 곡선이 그렇듯 무용에는 직선도, 각진 선도 없다. 오히려 가장 정점에 이르는 순간은 호흡을 놓아버릴 때다. 힘을 빼면서도 정점에 닿는 춤. 이것이야말로 한국무용의 정수다. 그러한 춤의 본질이 우리 삶과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갓 두 발로 선 아이가 뭔지 모를 리듬에 따라 몸을 흔들 때, 그 동작은 어딘가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논밭에서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어르신들이 자연스레 추는 춤에도 그들의 삶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춤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아이의 순수한 흔들림 속에도, 어르신들의 소박한 동작 속에도 춤이 있다. 내게 춤을 가르쳐준 선생님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안은미 선생님은 춤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신 분이다. ‘무대는 전쟁이다. 완벽해야 한다’고 배운 내게 안 선생님은 ‘잘 넘어지는 법’을 알려주셨다. 세상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실수해도 괜찮다고. 언젠가 내가 첫 개인 발표를 했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내 삶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이슬아, 잘하려고 하지 마. 니가 잘해봤자다.” 그때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제가 잘하려고 했네요. 그게 문제였네요.”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내 인생을 더욱 자유롭고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후로 나는 무대 위에서나 일상에서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을 믿고 살아갈 수 있었다. 어느새 춤은 나의 일상이자 호흡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 거울 속 내 모습을 볼 때, 춤추는 나는 평소의 나와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춤을 출 때의 나는, 마치 한 그루의 나무 같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자유롭게 가지를 흔드는 나무. 고요한 연습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춤은 시작된다. 바닥을 쓸고 닦으며 내가 밟을 자리를 정리할 때, 그 과정조차 춤의 일부다. 조명을 켜고, 머릿속 상상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안의 자유가 온전히 깨어난다.
글 | 이이슬(한국무용가, <정년이> 안무 디렉터)

한글 디자인
한글 활자 만들기가 직업이 되기까지

대기업에 취직했다. 아르바이트로. 인사팀에 소속되어 창고나 비품 등을 정리하고 여러 가지 심부름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이 선택은 내 삶에 대한 선언과도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들지 말아야지.’ 나는 현실적인 문제와 내 작업을 분리하고 싶었다. 쉽게 말하면, 글자 디자인 작업을 좋아하지만 그게 일이 되어버리면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내기 힘들 것 같았다. 돈 벌기 위한 일과 좋아하는 일을 분리해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저녁에는 집에서 글자의 조형을 다듬었다. 예를 들면 이런 글자들이다. ‘갊’, ‘릎’, 활’…. 사용자가 문제없이 폰트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2,350자는 그려내야 한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분리된 두 세계를 유영하며 20대를 보냈다. 누군가를 만나다 보면 이따금 두 세계가 충돌하기도 했다. “비전이 있는 작업을 하는 거 맞아?” 나는 점점 내가 글자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활자 하나를 완성했다. 나는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특정 기억이 떠오르는 경험을 애틋하게 여긴다. 그래서 내가 만든 활자를 보면서 오랜 시간 작업하며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고 싶었다. 매일 저녁 작업한 기억을 돌이켜보니 수많은 밤의 공기들이 느껴졌다. 어느 해의 추석 연휴 때는 나흘 연속 온종일 작업만 하며 보냈다. 그 감정들을 담아 활자체 이름을 ‘청월’이라고 지었다.

나는 무언가에 빠지면 그것을 이루는 모든 디테일을 분석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의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나 검토해본다.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를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만나게 된다. 한국인의 창작물에는 대부분 한글 활자가 필요하니까.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어떤 종류의 디자인을 하든 한글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 전공 초반에 ‘이미 나올 만한 한글 폰트는 세상에 다 나온 것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몇 년간 작업해보니 ‘만들고 싶은 폰트가 너무 많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비슷해 보이던 한글 활자들도 어느새 한눈에 구분하고 있었다. 본문형 활자라면 글 안에 담긴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익숙하고 편안한 형태를 지향해야 한다. 활자 자체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저자의 글에 개입하게 되는 셈이다. 너무 낯설게 보이는 것은 피하되 새로워야 한다. 이런 모호한 지점들을 분석해서 명쾌하게 디자인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낮에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밤에는 홀로 작업하는 생활을 한 지 2년이 흘러 회사 직원들과의 신뢰도 두텁게 쌓였을 때, 아쉽게도 낮에 다니던 그 회사가 폐업하게 되었다. 나를 지탱하던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다음 장을 펼쳐야 할 시간이 됐다. ‘활자를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로 했다. 매일 새벽 4시에 눈을 뜨고 새로운 활자를 작업했다. 저녁에는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일찍 잠에 들었다. 이때 ‘달리기’라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됐다. 원래는 5분만 달려도 숨을 헐떡였는데, 1년 뒤에는 1시간 30분을 달렸다. 의정부 중랑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달리면 경희대학교가 있는 회기역까지 도착할 수 있다. 쉬지 않고 달리면 그 정도 걸린다. 꾸준히 달리기를 하며, 마치 어디서 월급이라도 받는 것처럼 스스로 규칙적으로 열심히 작업했다. 그 결과 1년 만에 두 번째 활자 ‘청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청조’를 보면 그 시절의 아침 공기가 느껴진다.

처음 출시한 ‘청월’을 작업하면서는 정조 시대 <오륜행실도>에 쓰인 한글의 조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오륜행실도>의 글자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한글 명조 계열 활자체의 뿌리’라고 평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학술적인 접근보다 추상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한글의 자음, 모음을 네모 틀 안에 조화롭게 디자인하는 일. 그보다 더 확장된 개념으로 창작하고 싶었다. 세 번째로 출시한 ‘초설’은 ‘첫눈’의 느낌을 담은 활자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제작한 폰트이다. 펑펑 내리는 눈이 아닌, 적당히 차가운 온도에 내리는 첫눈의 느낌을 상상했다. 소리로 상상하면 ‘소복소복’이 아닌 ‘사박사박’에 가까운 느낌을 내고 싶었다. 첫눈이 갖고 있는 관념 중 하나인 ‘사랑’의 감정도 느껴지길 바랐다.

어릴 때부터 나는 소설, 만화, 음악, 영화 등 서사 창작물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도 창작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소설을 써보기도 하고 만화를 그려서 주변에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다. 긴 시간 글자를 디자인하면서는 문득 이런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소설가와 협업한다면 어떤 글자가 나올까?’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나온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나는 어떤 작가를 떠올렸다. 작가의 메일 주소도 찾아놨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에서 연락이 왔다. 뮤지션 장기하의 폰트를 제작하고 싶다는 의뢰였다. 인물과 어울리는 글자를 디자인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지만, 장기하가 갖고 있는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다고 판단했다. 고유의 색을 갖고 무언가를 창작해온 인물과의 협업을 꿈꿔왔으니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2022년, 뮤지션 장기하 특유의 말맛이 담긴 활자 ‘기하’를 완성했다. 2023년에는 KBS 라이브 뮤직 토크쇼 <더 시즌즈>의 시즌별 타이틀을 위한 글자 디자인을 맡았다. 박재범, 최정훈, 악뮤, 이효리에게서 떠오르는 추상적인 느낌을 글자 형태로 구현했다. 사실 글자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 건 사치일 수도 있다. 조형을 감상하는 건 두 번째 문제이고, 뜻이 전달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인 타이포그래피에 신경 쓴 결과물을 신뢰한다.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글자까지 신경 썼을 정도라면 다른 부분에도 예민한 감각으로 좋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한글 디자이너로 산 지난 10년을 기념하는 개인전을 하면서 나는 11개의 활자를 전시했다. 전시를 방문한 사람 중에는 한글 폰트를 두고 ‘컴퓨터가 알아서 만들어주는 개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누군가의 미감으로 제작되는 분야인 줄 몰랐다’는 분도 있었다. 10년에 걸친 나의 작업기를 보고 이 작업의 난도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듯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연을 맺었던 분들은 내가 이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축하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초심처럼 작업에 임하고 있다. 10년이 지났어도 이 마음은 한결같다. 오늘도 나는 좋아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한다.
글 | 채희준(한글 서체 디자이너)

한국 독립 영화
한국 독립 영화라는 포만감

얼마 전, 오색찬란한 응원봉들이 시위봉으로 바뀐 밤이었다. 여의도는 춥고 뜨거운 겨울을 지나는 중이었고,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에스파의 ‘위플래시’를 따라 불렀다. 발과 귀가 몹시 시려왔지만 어쩐지 신나는 채찍질을 당하는 기분이라 도무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대열에서 빠져나와 그제야 작동되는 휴대폰을 봤더니, 영화인들이 대통령의 직무 정지 및 파면을 요구하며 발표한 ‘영화인 긴급 성명’에 관한 기사가 여럿 업로드되어 있었다. 이보다 만 하루 전인 12월 6일, 나는 50회라는 기념비적 해를 맞은 ‘서울독립영화제’ 폐막식 현장에 있었고, 예심위원인 동시에 집행위원으로 시상을 하고 대리 수상도 했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당연히 긴급 성명에 참여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내년 서울독립영화제 예산 전액 삭감이라는 이슈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올해의 영화제가 끝나는 동시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비상계엄이 일어났다. 그래서 만 하루 만에 나는 예상하지 못한 ‘시작의 광장’ 에 서 있게 되었다. 앞이 깜깜하다는 생각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던 자리는 예상과는 다르게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발광하는 초를 손에 든 채로 울려 퍼지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찾아낸 The Right Light 사라지지 않아 눈에 새긴 One Time Unforgettable’. 그래 누가 잊으라고 약을 먹이고 재워도 잊히지 않을 2024년 12월이다. 영화 일을 시작한 것이 2008년 12월의 광화문이었는데, 17년이 지나 나는 다시 여의도에 서 있구나.

한국 영화를 언제부터 덕질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선연히 떠오른 기억은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늦은 가을밤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달콤한 매혹이나 눈부신 환영 같은 기억이 아니라 문화적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신사동 언덕에 자리한 극장에서였다. 당시 나는 미술 학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놀라울 정도의 부지런함으로 극장을 드나드는 관객이기도 했다. <씨네 21>과 <키노>를 책가방에 넣고 다녔고, 잡지에 안내된 시사회란 시사회에는 모조리 응모했다. 학교 수업을 마친 후 미술 학원에 가는 날의 내 모습이 범상했다면, 미술 학원이 아닌 극장으로 향하는 날의 나는 비상하게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는 미술 학원 핑계를 대고 학교를 빠져나왔고, 미술 학원에는 야간 자율학습 핑계를 댔다. 그렇게 시사회에 당첨된 극장으로 향할 시간을 확보하고야 마는 용의주도한 ‘아가 씨네필’ 이 그때의 내 모습 아니었을까. 늦가을 신사동 극장에서 나를 모조리 흔들었던 영화는 박광수 감독, 홍경인 주연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흑백의 화면 속 전설적인 노동 운동가의 모습이, 분신을 시도하며 자유와 존엄을 울부짖던 그의 모습이 내 온몸을 통과하며 각인되었다. 교과서의 건조함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던 생생한 기록이 스크린에 새겨져 있었고,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나를 맹렬히 뚫고 지나가게 두었다. 영화가 끝날 때는 또 한 번의 충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엔딩 크레딧을 가득 채우는,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을 보탠 수백 명 후원자의 이름이 스크린에 가득 찼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과 배우 그리고 스태프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한 나에게 그 수많은 이름이 주는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생생하게 영화가 끝난 그 밤의 기운이 떠오른다. 언덕 위에 있던 극장을 걸어 내려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재수 끝에 미대에 진학했고, 대학 내내 예술영화관을 동아리 방인 양 들락거렸다. 전공과 안성맞춤은 아니었던 재학생으로서, 운명이라기보다는 우연한 발견과 노력에 의해 동아리 방에 가까웠던 극장 씨네큐브를 운영하던 백두대간에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내가 영화에 그렇게까지 비장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끌리는 대로 갔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다. 신기하게도, 나는 ‘한국독립영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그 주변을 뱅뱅 돌았다. 백두대간에 입사해 첫 한국독립영화이자 인권영화인 <시선 1318>의 개봉을 준비했고, 퇴사 후에는 키이스트로 이직해 한국 영화의 배우들을 근거리에서 살폈다. 키이스트라는 대형 매니지먼트사에서 근무하던 나에게 당시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장이었던 현 서울독립영화제 김동현 집행위원장의 연락이 왔다. 서울독립영화제 최초로 개봉을 준비하던 영화 <원나잇 스탠드>의 마케팅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그 작품 개봉을 앞둔 당시 카피로 썼던 문장은 ‘우리의 혀는 밤을 노래한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나는 무수한 밤의 시간 동안 극장에서 마이크를 쥐고 한국독립영화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혀로 한 편의 영화가 꾸었던 수많은 밤을 함께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고, 그렇지 않을 리 없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키이스트 퇴사 후 상상마당 시네마의 프로그래머이자 영화사업팀장으로 재직하면서는 본격적으로 일의 복판에 서게 되었고, 그렇게 7년을 보낸 뒤 무슨 배짱에서였는지 ‘무브먼트’라는 독립영화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 무브먼트가 내년이면 만으로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siff.kr

이 글을 쓰기 며칠 전, 찬란하게 불빛이 선연하던 광장에 서서 생각했다. 나는 그저 영화를 좋아하고 정치에는 무감한 편이었는데, 왜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가장 첨예하게 사회의 면면과 맞서는 독립영화인이 되었을까. 그 시절 전태일의 기억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일까.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끌리는 곳에, 내 발길이 닿는 곳에 한국독립영화의 손짓들이 있었고 그 손을 잡을 때마다 나는 나의 자리라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지금의 내 자리는 아주 딱딱한 낡은 소파와도 같다. 엉덩이가 아파서 자주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소파가 있어서 기댈 수 있다. 이 소파가 없는 상황을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원해서, 나의 마음을 따라온 자리에서 나는 이제 불편한 행복으로 나를 채운다. 이 쉽지 않은 포만감을 아는 이들이 여기 시작의 광장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어둠을 향해 소중한 불빛들을 흔들었다.
글 | 진명현(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게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

게임을 하는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즐겨 쓰는 아이스 브레이킹 질문이 있다. “처음 한 게임은 뭔가요?” 게임을 한다면 분명 첫 경험의 순간이 있었을 텐데, 제목을 단번에 떠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정적과 제목 대신 게임의 장면이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는 모습을 좋아한다. 사실 나도 처음 경험한 게임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시절 게임기로 발표된 게임 리스트를 보게 되었고, 문득 제목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푸얀’. 내가 처음 했던 게임의 제목이다. 부모님은 오락실 절대 출입 금지라고 신신당부하면서도 결국 나에게 게임기를 사주셨다. 나는 왜 그렇게 게임기를 사달라고 졸랐을까. 주변에서 게임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집에 컴퓨터가 있는 친구들이 늘어가는 만큼 게임기를 가진 친구도 늘었다. 어디에 가면 있다는 오락실 간판을 동네에서 보는 경우도 늘었다. 서서히 친구들과 함께하는 놀이로 게임의 비중이 커졌고, 친구들과 여럿이 함께 게임을 하기로 의기투합하고서 방과 후 투지를 불사르며 친구네 집으로 가기도 했다. 매달 한 번씩 어느 토요일에 컴퓨터 학원에서 열린 ‘게임하는 날’에는 뒤에 서서 게임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 가지 고민은 여러 종류의 게임을 하고 싶은 만큼 많이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임 가격이 비싸기도 했고, 친구에게 빌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당시 이용하던 PC통신 ‘하이텔’ 게임 게시판이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게시판에서는 시삽(운영자)이 한 달에 몇 명씩 우수 이용자를 선정해 최신 게임을 선물로 주었다. 여기서 우수 이용자가 되어 게임을 받으면 되겠다 싶었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게임에 대한 글을 열심히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거기 머무르는 시간이 쌓이다 보니 눈에 익은 아이디들이 있었다. 주로 매달 공지되는 우수 이용자 명단에서 자주 본 아이디들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게임을 리뷰하거나 분석하는 글을 썼다. 결국 나는 ‘우수 이용자’로 선정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대신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평소 나의 게시판 글을 눈여겨본 누군가 웹진을 만들며 원고를 청탁했고, 그가 게임 잡지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도 필자로 글을 썼다. 이후 다른 게임 잡지 필자로도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여러 게임을 하게 되었다. 주로 다음 호에 다루기로 정해진 게임 중에 배정을 받는 식이었다. 적성에 안 맞는 게임을 해야 할 때면 고역이었지만, 덕분에 여러 게임을 하면서 취향도 넓어졌다. 분량이 짧든 길든 게임에 대해 꺼낼 이야기를 찾느라 게임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원고료로 게임을 사기도 했으니, 애초 다양한 게임을 두루 해보고 싶어서 게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그 목적을 달성하긴 했다.

게임 평론을 한다고 소개하면 대개 ‘게임을 잘하겠다’ 같은 반응을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게임을 잘 못한다. 게임을 못한다는 건 자주 ‘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임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일대일로 하는 게임에서는 대부분 지고, 팀으로 게임을 하면 같은 편에게선 험담을, 상대편에게선 놀림을 받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기는 데서 큰 재미를 찾는 것도 아니다. 내가 게임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내가 도전하는 한 ‘다시 할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는 점이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물론 기분이 유쾌하지 않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얼마든지 다시 해볼 수 있다는 게 좋다. 혼자 그 목표에 도전하면서 게임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즐겁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금세 가는 길을 나는 천천히 지나가는 셈이니, 그만큼 게임의 세계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게임은 내가 무언가를 수행했을 때만 다음 과정이 진행된다. ‘상호작용성’이라 부르는 이 특성 때문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겐 유독 어려워 보이는 게 게임이다. 해보면 많은 것이 설명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게임은 다른 세상의 무엇이다. 내게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이 어려움과 막연함을 호기심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게임을 만든 사람이 게임할 사람을 생각하며 설계해둔 세계를, 서툴지만 차분하고 신중히 탐색하는 것. 그 결과를 나름대로 묘사하고 설명하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품고 그 세계에 발을 들여볼까 하는 기대가 선뜻 들 정도로 이야기하는 일. 그건 수고롭지만 즐겁다.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게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표현도 일부러 자주 쓴다. 예전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게임이 시간 낭비이자 현실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TV가 바보상자라 불리고, 만화가 사회악으로 여겨지며 불태워졌듯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새로운 미디어의 숙명일 수 있다. 그런 시선과 분위기 속에서도 페이커를 포함해 세계를 압도하는 e스포츠 선수들이 한국에서 나왔다는 점이 뿌듯하다. 〈배틀그라운드〉나 〈데이브 더 다이버〉처럼 글로벌한 인기를 얻으며 화제가 된 한국 게임들 역시 게임에 대한 시선을 변화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을 성큼 줄여준 존재들이다. 게임을 즐긴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증명하듯 굴어야 했던 기억이 나에게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학생 시절 나는 ‘게임을 즐겨도 성적이 나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보여주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사회 생활을 하며 ‘게임을 하지만 이상한 사람은 아님’을 드러내야 하나 부담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락실에 다니던 세대가 이제 부모가 되어, 게임은 세대를 불문하고 향유하는 문화로 점점 진입하고 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게임을 해도 되는 세상이 올까? 그런 날을 생각하면 괜히 좀 억울하지만, 그건 모든 게임 종사자들이 바라 마지않는 세상일 것이다.
글 | 강지웅(게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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