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역에 미술관 하나가 문을 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면, 2025년을 향한 기대가 달라진다.
국내 최초의 공공 사진미술관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공간의 성격부터 새로운 시도인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문화체육관광부와 건축가 조민석이 움직이는 거대 프로젝트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여의도 63스퀘어에 들어설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 정부, 지자체, 기업이 비슷한 시기에 예술 공간을 개관하는 상황이 한국에서 처음 벌어진다.
2000년 5월 11일 오전 11시, 지금은 고인이 된 엘리자베스 2세가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개관을 선포하기 위해 6년간의 개보수를 마친 옛 화력발전소에 도착했다. 이날 행사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여왕의 입장에 맞춰 실내악단이 미술관 개관 기념곡 ‘17 Tate Riffs’ 팡파르를 연주했고, 개관 선포와 함께붉은 연단에 놓인 버튼을 누르자 ‘여왕 폐하가 개관하였음, 2000년 5월 11일’ 이라고 쓴 벽면의 메시지가 드러났다. 한국으로 치면 KBS라 할 수 있는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는 여왕의 테이트 모던 방문을 생중계하는 30분짜리 특집을 편성했다. 같은 날 저녁엔 4,000여 명이 참석한 오프닝 파티가 열렸고, 그 자리 역시 1시간 동안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아티스트 제레미 델러는 오프닝 파티에서 1997년 작품인 ‘Acid Brass’를 선보였다. 영국식 브라스 밴드가노동계급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애시드 하우스 장르의 주요 곡들을 연주하는내용의 작품으로, 1980년대 광산 노동자들의 광산 폐쇄 반대 시위, 레이브 음악에 대한 탄압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밤에는 레이저 쇼가 펼쳐졌다. 템스강 강가에 자리한 옛 화력발전소가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런던 시민이 몰려들었다. 런던시 당국에서는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사우스워크브리지의 교통을 3시간 동안 통제하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미술관 하나가 새로 문을 열 뿐인데, 영국 런던의 당시 분위기는 이러했다. 테이트 모던미술관의 개관이 국가적 이벤트 수준이었던 셈이다.
상상해보자. 미술관에서 대통령이 개막 버튼을 누르고, 그 순간을 위해 ‘국민작곡가’가 구상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모습을. 그리고 여의도 불꽃축제가 열릴때처럼 양화대교나 서강대교의 교통이 서너 시간 통제되고, 방송사는 그 현장을 생중계하는 광경을. 문화계의 주요 인사들, 정당 대표와 국무총리가 미술관 개관 현장에서 새로운 미술관의 의미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나누는 모습이드라마 대신 전파를 탄다면 어떨까? 그와 동시에,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새롭게 문을 여는 미술관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희망과 비판, 걱정이 섞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공개된다면? 이 모든 일이 약 25년 전 런던에서는 실제로 일어났다. 미술관 개관을 앞두고서는 옛 화력발전소가 어떻게 해서 현대미술을 담는 공간으로 바뀔지 그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헤어초크&드 뫼롱의 설계로 기존 건물의 외관은 거의 보존하면서 내부 공간만 미술관 용도에 맞춰 다시 지은 과정은 그 자체로 내내 화제였다. 수십 년째 버려진 화력발전소 탓에 칙칙한 동네로 여겨졌던 사우스워크는 새로운 미술관의 개관과 함께 점차 노동자 계층이 살던 동네에서 비싼 주거지와 상업 용지로 변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기도 했다.
모든 미술관이 테이트 모던처럼 떠들썩하게 개관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지역에 미술관 하나가 문을 여는 건 또 다른 문화 행사장 하나가 더 추가되는 것 그이상의 의미다. 물론 테이트 모던 개관에는 건축 예산으로만 현재 가치 기준으로 약 3,000억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갔다. 천문학적 건축 예산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미술관의 상징적 의미였다. 미술관 차원에서는 그저 영국 미술만을다루는 데서 더 나아가 국제적인 미술과 현대미술을 다룰 전시 장소로의 확장이 필요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밀레니엄 프로젝트’ 차원에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산업화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영국을 대표할 문화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면, 머지않아 서울에서 문을 연다고 알려진 몇몇미술관 및 문화 공간의 면모에 거는 기대가 달라진다. 우리는 2025년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과 서서울미술관의 개관을 목격할 예정이다.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옛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애초 2025년 내 개관으로 발표됐다가 2026년 개관으로 변경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2년부터 계획했으니, 그동안 접한 뉴스만으로 이미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거대 프로젝트다. 프랑스의 퐁피두센터는 한국의 한화그룹, 한화문화재단과 손잡고2025년 말까지 여의도 63스퀘어의 아쿠아리움 공간을 리노베이션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한국 최초의 아쿠아리움이 39년 만에 문을 닫고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로 거듭나게 된다. 참고로 퐁피두센터의 분관은 스페인 말라가, 벨기에 브뤼셀, 중국 상하이에도 있다.
물론,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라는 것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 있는 주요 미술관들이 어떻게 해서 문을 열게 되었는지를 돌이켜보면 그렇다. 지금처럼 그야말로 1부터 10까지, 아니 1부터 100까지 거의 모든 걸 하나하나 구축해가는 새로운 미술관들이 비슷한 시점에 문을 여는 상황은 한국에서 누구도 겪어본 적이 없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미술관을 동시다발적으로 개관하는 이 상황은 분명 새로운 도전이다. 동시에 한국이 이제 그만한 문화적 역량과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86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붙었던 수식어는 ‘동양 최대의 미술관’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개관한 때가 그로부터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2002년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아트선재센터나 일민미술관 같은 여러 사립미술관이 차례로 문을 연 시점이 1990년대 말과 2000년 무렵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십 년이 지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새 미술관의 시대’를 목격하는 셈이다.
새로운 시대는 하룻밤 사이 나타났다가 행사가 끝나면 홀연히 사라지는 팝업 전시나 쇼룸처럼 빠른 속도로 건설될 수 없다. 말하자면, 지하 2층에서 지상 4층까지 연면적 7,048㎡에 달하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비슷한 면적을 지하 2층, 지상 1층에 구현할 서서울미술관은 거대한 굴삭기로 땅을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아니 그전에, 누가 이 거대한 공간을 설계하고 건축할지 정하는 일이 먼저였다. 이런 선택과 논의 과정만 해도 이미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클릭 몇 번이면 스크린 속에서 세계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대이지만, 미술관이라는 건 한번 지어두면 좋든 싫든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놓여있어야 하는 거대한 물리적 실체이기에 그 무엇 하나 서두를 방법이 없다.조민석 건축가가 이끄는 ‘매스스터디스’가 화력발전소를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로 바꾸기 위한 설계 공모에 당선된 때가 2018년 12월이다. 이후 실제 설계가 진행되고 건물 착공식이 열린 건 2023년 5월에 이르러서다. 건축사사무소의 설계 프로그램 속에서는 이미 수십, 수백 번에 걸쳐 건물을 짓고 허물었을 테지만, 현실 세계에선 삽을 뜨겠다는 소식을 전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린 것이다. 전시실과 공연장, 창작 공간과 교육 공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상 광장 등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가 과연 10여 년에 걸쳐 바뀐 문체부 장관들의 포부처럼 ‘부가가치’ 있는 공간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라는 광활한 부지를 생각하면 건축 설계부터 흥미로운 주제다. 이 화력발전소의 역사는 1929년 경성전기주식회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텅 빈 땅에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작동을 멈춘 산업 시설을 활용하는 것이니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과거의 흔적을 마음 편하게 지워버리는 대신 기존의 구조를 살리고 활용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기나긴 역사를 품은 발전소에서 어떤 부분을 살리고 드러낼지, 또 어떤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낼지 결정하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도봉구 창동에 들어서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카메라의 셔터와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모양에서 영감을 받아 조금씩 틀어지는 듯한 독특한 외형의 건물로 진행 중이다. 2015년부터 이어진 준비 기간 중 건축만큼이나 중요하게 힘을 쏟은 활동은 2만 점에 이르는 사진 작품 수집이었다. 뉴욕의 국제사진센터, 런던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 도쿄의 도쿄도 사진미술관처럼 한국에도 공공 사진미술관이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없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공공 사진미술관이다. 그런 만큼 사진 매체의 특수성을 고려한 필름 수장고를 비롯해 전문 시설부터 구축해야 했다.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으는 데만 5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하나의 미술관이 문을 연다는 건 그만큼 긴 시간과 많은 사람의 땀이 투입되는 일이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의 경우는 공간의 성격 자체가 새로운 시도다. 2025년 어느 시점에 이곳이 문을 열게 되면, 어쩌면 서울이나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문 형태의 미술관이 될지 모른다. 건축가 김찬중이 이끄는 ‘더 시스탬 랩 건축사사무소’가 설계를 맡은 건물은 전시장과 수장고를 강조하 는 게 아니라, 교육 공간을 건물의 핵심 가치로 삼았다. 위치는 주거지와 산업 시설이 빼곡한 금천구에서 귀한 존재인 공원 부지(독산동). 이 미술관은 건물을 가로지르는 통행로를 두어 시민이 미술관 건물을 자연스럽게 통과할 수 있게 한다. 금천구청역 앞 공원의 기존 산책로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미술관 건물의 1층은 전시장이나 수장고가 아니라 교육 공간이다. 이는 단순한 동선 설계가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새로 문을 여는 미술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서울 서남권 최초의 공립미술관이자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이라는 이중 과제를 안고 태어날 이곳은, 새로운 형식의예술을 실험하는 전문성과 함께 주민들의 일상적인 문화 경험을 위한 공공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이렇게나 뾰족한 방향성을 지닌 미술관의 탄생을 목격한적이 있나? 2008년 문을 연 경기도의 백남준 아트센터 정도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만난 많은 공립₩사립 미술관들은 해야 할 일, 다뤄야 할 것,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 넓고 많은 탓에 미술관 자체적으로 뾰족한 포인트를 품을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그런 점에서 백남준이라는 한 예술가를 출발점으로 삼은 백남준 아트센터는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다르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한국이라는 맥락을 딛고서 사진이라는 매체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미지 문화의 미래를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은 뉴미디어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이 되고자 한다. 그저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남이 써준 역사를 비추는 대신 스스로의 역사를 쓰고 미래의 창작자와 감상자를 키워내는 곳.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2025년에 마주하게 될 새로운 시기의 출발점일지 모른다. 이들의 개관이계획과 목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미술을 사랑하는 종사자의 입장에서 한껏 희망을 끌어올린 전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지금 서울에서 개관을 앞둔 새로운 미술관들 뒤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미술관 개관에 자기 인생의 몇 년을 헌신한 큐레이터들이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서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직접 운영하는 최초의 미술관-문화 공간이 될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는 산업 유산을 재료 삼아 흥미로운 공간을 연주할 건축가에 대한 믿음 외에는 아직 구체적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다. 퐁피두센터 한화 서울 역시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고, 취재를 위한 접근도 쉽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프랑스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건축을 맡을 것’이라는 정도가 주어진 몇 안 되는 단서 가운데 하나다. 2025년이 끝날 무렵 우리 앞에 놓인 건 무엇일까? 바라건대, ‘새로운 건물 몇 개가 도시 공간과 예술계에 등장했다’는 건조한 사실만을 위안 삼는 연말이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공간의 탄생과 함께, 긴 시간 드러나지 않는 일에 힘을 쏟은 많은 이들의 노력이 마침내 빛을 보았으면 한다. 하룻밤 사이 세상이 뒤집힐 수 있는 다이내믹한 한국에서, 꾸준함을 통해 쌓아온 것들의 결과물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뚜렷한 지향점을 드러내지 않은듯 뵈는 곳들은 건축가들의 마법이 완성되면서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으로 놀라움을 안겨주었으면 한다. 수십 년 전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문을 열던 때처럼 여왕이 등장해 개관 버튼을 누르거나 전 국민이 생중계로 개관식을 지켜보는 일은 없겠지만, 지금의 시대에 맞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순간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에서도 이제 이런 걸 볼 때가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만은 아니지 않을까.
- 글
- 박재용(프리랜스 큐레이터, 통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