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을 향유한 배우 김고은.
2025년 새해, 새로운 날들, 새로운 인생을 샤넬과 함께 시작했다.
<W Korea> 오늘 촬영장에 나타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어제 청룡영화상 뒤풀이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자를 쉽사리 놓아줬을 것 같진 않아서.
김고은 하하, 연말이 코앞이고 다들 바쁜 시기라 공식적인 뒤풀이는 없었어요. 시상식이 끝나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소소하게 축하하는 자리는 가졌어요.
2012년 영화 <은교>로 청룡영화상 신인상에 호명되고, 12년이 흘러 <파묘>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마치 필름을 되감듯 지난 시간이 빠르게 스쳐 갔을 듯해요.
생각 많이 났죠. 신인상을 받았을 때 이런 다짐을 했거든요.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이 상을 보면서 조금은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자.’ 사실 어제 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물론 ‘잘 왔구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요.
“저는 연기가 너무 좋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특히 이 문장을 전할 때 떨림이 있었어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더,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땐 연기‘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배우를 하다 보면 연기 외적으로도 많은 일이 벌어지는데 어릴 땐 그게 많이 버거웠어요.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는 20대였죠.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저만의 극복 방법이 생기면서 이 직업의 소중함을 점차 알아간 것 같아요. 연기한다는 것, 그게 내가 꾸준히 좋아하고 꾸준히 어려워하는 일이라는 것, 그게 나의 직업이라는 것. 이젠 이 모든 것에 감사해요.
올해 청룡영화상에서 화제를 모은 장면이 또 있죠. <파묘>로 감독상을 수상한 정재현 감독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런 말을 했어요. “당신(김고은)이 한국 배우여서 기뻐요.”
제가 외국 배우였으면 캐스팅하기 어렵고 말도 안 통했을 테니 하신 이야기가 아닐지···(웃음).
그렇게 담백하게 넘기기엔 화면 너머 김고은의 눈에도 눈물이 그득하였는데···(웃음).
하하, 그랬죠. 너무, 너무 감사하죠. 사실 저희가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어요. 여태 서로를 대놓고 칭찬한 적이 없어요. <파묘>는 늘 서로에게 장난을 걸고 웃음이 많은 현장이었거든요. 오히려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수상대에 올라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크게 와닿은 것 같아요.
김고은이 한국 배우여서 기쁘다 느낀 장재현을, 그렇다면 김고은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감독님은 굉장히 러블리한 사람이에요. 현장에 계신 선배님들도 다들 감독님을 아주 귀여워하셨어요. 그런데 막상 연출에 들어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집요함을 발휘하는 분이기도 해요. ‘아, 이 사람이 머릿속에서 구현해온 걸 지금 실현시키고 있는 거구나’ 느끼는 순간 순간이 참 많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저 감독님을 신뢰했던 것 같고요. <파묘>는 웃으면서 치열하게 했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웃으면서 작업한 건 서로에 대한 탄탄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개봉 전까지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파묘>의 김고은, 김고은의 <파묘>가 잘 그려지진 않았어요. 평소 김고은의 말간 얼굴을 보며 신들린 무당을 떠올려본 기억은 없거든요. 돌이켜 감독에 대한 신뢰를 떠나 <파묘>란 작품에 끌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작품을 선택할 때 큰 결심이나 특별한 의미 부여를 안 하는 편이에요. 단지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내가 할 수 있을까’인데 스스로 ‘나는 못할 거야’ 란 생각도 잘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어떤 작품이 나에게 왔을 땐 내가 만들 수 있는 방향, 방식에 대해서만 생각해요. 그러니까 거창한 도전 의식, 변신 욕구가 저를 움직이지는 않는 거죠. <파묘>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의 캐릭터를 표현해볼 수 있겠다는 반가움이 컸어요. 다 떠나 일단 재미있겠다는 마음이 든 거죠.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만나면 크게 셈하지 않는 편인가요?
네. 물론 데뷔 초엔 배울 게 많은 선배가 함께하는 작품이라면 어떻게든 하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 당시 아는 건 별로 없는데 저에게 큰 롤이 주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배움의 시간을 단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건 선배들을 보는 것밖에 없었어요.
이를테면 영화 <계춘할망>의 윤여정, <협녀, 칼의 기억>의 전도연,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같은 이들이 있는 현장에 자신을 놓아보고 싶었던 거죠?
그렇죠. 시간이 흘러 여전히 현장에서 헤맬 때면 ‘선배들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요. 어려선 선배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하나 캐치하는 시간이었고, 지금은 어찌 보면 제가 그 당시 선배들의 위치에 가깝게 놓여 있는 상황이잖아요. 요즘 들어선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현장에서 제 연기에 대해 좋다 나쁘다 의견을 듣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거든요. 저의 포지션이 달라졌고, 저에게 기대하는 것도 달라졌기 때문이겠죠. 제가 어떤 주장을 펼치면 가끔은 반박해주길 바라는데 더 이상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그게 뭐랄까, 불안감이나 외로움으로 다가와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는 또다시 선배들을 생각하는 거죠. 선배들 역시 이 과정을 모두 거쳤을 텐데 어떻게 하셨을까, 하면서요.
데뷔 초에는 ‘사람’을 좇아 작품을 선택했다면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이야기’를 좇지 않을까 싶어요. 당신이 끌리는 이야기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뭐는 좋다, 뭐는 싫다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와닿게 잘 쓰인 이야기라면 저에겐 다 좋은 이야기예요. 좋은 이야기고 좋은 캐릭터다 싶으면 그게 뭐든 정말 상관없어요.
고정되는 것, 한정되는 것을 경계하는 편인가요?
싫죠. 지루하잖아요. 한 작품이 성공하면 그와 비슷한 결의 작품이 들어와요. 그런데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거예요. 제가 여러 결을 보여주지 못한 탓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비슷한 작품, 비슷한 캐릭터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최대한 다른 결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쌓이다 순간 저에게서 스치는 어떤 모습을 보고 ‘어, 이런 결도 있었네?’ 하고 발견해주실 테니까요. 저는 작품을 쉬지 않는 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어떤 기로에서든 작품을 쉬어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았던 게, 지금 생각하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고정되고 싶지 않다 생각해도 내가 좋은 것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어쨌든 계속 해나가다 보면 그 안에서 분명 얻어지는 게, 성장하는 게 있어요. 저 또한 3~4년은 ‘나는 왜 이런 역할만 들어오지?’ 고민한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알아요. 가능성은 내가 스스로 열어야 하는 것이라고.
여러 작품을 거치며 ‘좋은 연기’를 둘러싼 생각 또한 변화를 거쳤을 듯한데, 어떤가요?
글쎄요. 다만 늘 생각하는 건, 현장에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자는 것이에요. 현장에서 생각이 빨리 없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편이에요. 캐릭터로서 처음 카메라에 설 땐 내가 살면서 처음 내뱉어보는 말을 하고, 걸어본 적 없는 걸음걸이로 걷는 거잖아요. 내가 캐릭터에 입혀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키고 싶어 하는 게 매번의 고민이자 목표일 거예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도 그 캐릭터로서 말할 수 있고, 그 캐릭터의 감정대로 내가 생각할 수 있게 됐을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요. 캐릭터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이 있나요? 우선 저는 어떤 고민도 현장에 가져가지 않으려는 게 있어요. 현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배우 김고은이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지만, 현장에 들어갔을 땐 오롯이 캐릭터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압박하는 편이에요.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모는 거죠. 그렇게 ‘네가 어쩔 거야, 안 되면 어쩔 거야’라면서 나를 압박하다 보면 점점 그 캐릭터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어, 됐다’라고 느껴지는 때가 불쑥 찾아와요. 그때부턴 편하게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죠.
현장에 가기 직전까진 무척이나 치열하지만 현장에선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지는 셈이네요. 그래서일까요? 거의 모든 작품의 인터뷰마다 ‘현장이 즐겁다’는 얘기를 했어요.
저는 현장에서 즐거운 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가볍게, 가벼워 보이게 일하고 싶거든요. 여유로운 마음으로 서로가 일할 때 훨씬 더 디테일하게, 그리고 훨씬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치열하기만 하면 오히려 덜 보이고 그래서 놓치고 가는 게 많다고 믿어요.
2024년 김고은에게 남은 것은 두 편의 영화 <파묘>와 <대도시의 사랑법>일 테지요. 우선 <파묘>의 경우 오컬트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달성하는 성취를 남겼어요. 이러한 영화적 성취를 떠나 <파묘>가 김고은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천만 영화의 주인공이 될 거란 기대감을 품고 산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저에게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고, 그 기적을 만들어준 작품이에요. 스코어를 떠나 그 많은 관객이 내가 나온 영화를 봐줬다는 게 더없이 큰 의미로 다가와요 <파묘>는 훗날 꺼내 보고 싶은 한 페이지일 것 같아요. 저에게는 ‘과정’의 영화예요. 훗날 어떤 순간에, 어느 과정에 꺼내 들여다보고 싶은, 그러면서 위안을 얻고 ‘그래 다시 잘하자’는 마음을 되새기게 해줄 작품이죠.
<파묘>와 <대도시의 사랑법> 사이의 낙차가 참 흥미로워요. 무시무시한 오컬트물 다음으로 젊음, 정체성, 사랑을 탐구하는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관객을 맞았고, 국내에선 흔치 않은 이 상업 퀴어 영화에 호평이 잇따랐죠. <대도시의 사랑법>은 제작 확정까지 고비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결국 무사히 영화관에 걸리는 데 당신의 굳은 출연 의지가 작용했다 들었어요. 왜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데 그토록 진심이었을까요?
사실 어떤 대단한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안 만들어지면 너무 아까운 시나리오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후루룩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나리오는 생각보다 많지 않고, 그래서 더 귀하고 소중해요.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딱 그랬어요. 그리고 저는 <대도시의 사랑법> 같은 중급 규모의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 제작까지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배우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려주는 것밖에 없었죠. 오래 걸려도 나는 할 것이니 제작됐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마침내 준비가 되고 세팅이 끝났다 했을 땐 ‘그래, 이제 하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대도시의 사랑법>은 두 주인공의 20대와 30대를 그려내고 두 시절 사이 일어난 성장을 담아내요. 그렇다면 김고은의 20대와 30대는 어떻게 다를까요?
예전에는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했어요. 무척 엄격하고 봐주는 일이 없었죠. ‘힘들긴 네가 뭐가 힘들어’라면서 힘들다는 말 자체가 내 안에서 올라오지 않게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시간들을 겪고 나니 비로소 이제는 나를 좀 봐주고, 들여다보고, 예뻐해주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해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게 제 안에서 성장했다면 성장한 부분이겠죠.
<대도시의 사랑법>이 남긴 한마디가 있죠.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 김고은에게도 약점이 있나요?
꾸준함? 정말 제가 살면서 꾸준히 한 거라곤 연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더 좋은가 봐요. 내가 이렇게 꾸준히 좋아하고, 잘하고 싶어 한 게 연기가 거의 유일한 것 같아요. ‘좀 후지면 어때’란 생각을 연기하면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애초 그런 마음이 안 먹어져요.
2024년 자신에게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나요?
하루하루를 또 열심히 잘 살아낸 것. 전 이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1년이 갔고, 그 1년이 엄청나게 후회스럽거나 잘못한 일 없이 잘 지나갔다는 사실에 칭찬 좀 해주고 싶어요.
오늘 촬영은 샤넬과 함께했죠. 어느덧 샤넬과 5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데, 이 동행은 당신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
요?
한 브랜드와 이렇게 오래 함께하기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인지 오늘처럼 화보 촬영을 하거나 광고 캠페인을 찍을 때마다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이제는 정말로 패밀리십이 더 강하게 느껴져요. 샤넬과 함께하면서 샤넬을 입은 사람을 늘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올곧게 서 있는 한 사람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개성과 캐릭터가 강한 브랜드의 옷에 어울리는 올곧은 태도, 그 자세로 툭 옷을 걸친 매력적인 사람이 떠올라요.
오늘 촬영한 옷 중 하나를 골라 여행을 떠난다고 상상해볼까요. 어떤 옷을 걸친 채 어떤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나요?
청바지에 흰 트위드 재킷을 걸친 착장이 떠올라요. 그런데 그 재킷이 정말 새하얗기 때문에 아무래도 좀 얌전하게 놀아야겠죠?(웃음) 이 옷이라면 부산이 어울릴 것도 같아요. 바닷가가 보이는 카페라면 더없이 좋겠고요.
- 포토그래퍼
- 박종하
- 스타일리스트
- 이윤미
- 헤어
- 이일중
- 메이크업
- 조은정
- 세트
- 권도형(Ondoh)
- 어시스턴트
- 김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