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마녀 혹은 성녀, 빛과 어둠, 피와 살, 사람과 사랑….
지난 수십 년 동안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곁을 따라다닌 말들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전시 활동도 한 적 없는 이 예술계의 거인이 <더블유>의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을 위해 마음을 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라는 예술가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다행히 전 세계가 공유하는 수식어로 ‘행위예술의 대모’가 있다. 흔히 퍼포먼스라고 부르는 그 행위예술 장르를 시각예술 형식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 선구자. 제19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 Love Your W’의 협업 아티스트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거인을 떠올린 건 무의식적인 이끌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한 행위예술로 긴 세월 숱하게 비난받은 여성이 언제나 전하려 한 메시지 일부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퍼포먼스는 일시성에 뿌리를 둔 비물질적인 작업이지만, 그녀는 사실 영상, 사진, 콜라주, 드로잉, 사운드 작업 등 전방위적인 작업을 해왔다. 우리는 이 강렬하고 신비한 존재를 메신저 삼아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재밌고 구체적인 무언가로 대신 보여주고 싶었다. 수십 년 세월이 보물 창고처럼 아카이빙돼 있을 예술가의 스튜디오. 거기서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흔적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그렇게 마리나의 스튜디오와 갤러리 직원들은 세상에 데뷔시킬 ‘희귀템’을 찾아 두터운 역사를 파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더블유 코리아>의 선택이 흥미로웠습니다. 2024년 시점에, 제가 1970년에 그린 드로잉을 커버로 선택한 거잖아요. 덕분에 저도 5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더듬었어요.” 6개월의 교류를 거쳐 캠페인을 둘러싼 모든 일이 끝난 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들려준 첫마디다. 이번 Vol.12의 커버 중 하나에는 방대한 아카이빙에서 건져 올린 그녀의 과거 스케치 작업이 자리 잡았다. 최종 후보에 오른 몇몇 작품을 두고 고민한 끝에 선택한 커버 이미지다.
Parallel Thinking For Different Projects On a Small Piece of Paper, 1970
Ink on paper
“아쉽게도 아직 한국을 방문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퍼포먼스 아트를 가르치면서 재능 있고 헌신적인 젊은 한국 예술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한국의 자연과 폭포, 사찰, 불교, 뉴 코리안 시네마(2000년대에 부상한 한국 영화), 음악, 무용이 나를 매료시킵니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한 선구자는 인터뷰를 위해 오래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다. 백조와 별, 그 밖에 알 수 없는 흔적이 가득한 펜 드로잉, ‘Parallel Thinking For Different Projects On a Small Piece of Paper’(1970)는 아티스트의 내밀한 기록을 엿볼 수 있어 특별한 스케치다. ‘작은 종이에 그린, 다양한 프로젝트를 위한 병렬적 사고’라는 뜻처럼 여기에는 훗날 시리즈 작업으로 이어진 아이디어와 결국 실현되지 못한 아이디어가 뒤섞여 있다. “서로 다른 호수에서 헤엄치는 백조 두 마리를 그렸어요. 그들은 절대로 만나지 못할 사이죠. 하지만 영상 프로젝션을 이용해, 두 백조가 서로를 향해 끝도 없을 것처럼 헤엄치다가 결국에는 만나는 장면을 만들어보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백조와 백조가 만나면 하트 모양을 이루죠.” 한 마리 백조가 헤엄치는 영상 화면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으면, 만나지 못할 백조들도 만날 수 있다. ‘각자의 터전에서 헤엄치는 백조들’이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사이’로 변화하는 마법.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영상 작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70년 당시 마리나는 20대 중반이었다. 사회 체제에 반항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갈 무렵이다. 급기야 몇 년이 지나 그녀는 어릴 적부터 하던 페인팅과 드로잉 작업을 멈추기도 했다. “이 드로잉에서는 나선처럼 꼬여 있는 모양들도 보입니다. 제가 전기, 그리고 전기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관심이 많았던 흔적이에요. 당시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인물이 니콜라 테슬라였어요. 백조 위에 보이는 커다란 별은, 돌이켜보면 훗날 ‘리듬 5’라는 제목으로 펼친 퍼포먼스를 위한 흔적 같네요. 시내 어디에 가든 공산당의 별 문양이 보이던 시대였어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들려주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발칸반도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배경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재자가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지금은 사라진 동남부 유럽 국가의 이름을 Z세대가 알까? 이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등이 분리 독립을 했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대개 ‘세르비아 출신 예술가’로 불린다. “제 부모님은 국민 영웅이었어요. 독재 정권 아래에서 빨치산(Partisans)으로 정치 경력을 쌓은 분들이죠. 부모님이 저나 제 동생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었어요. 저는 성인이 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신앙심 깊고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저희 할머니와 보냈어요.” ‘밤 10시 통금’ 을 칼같이 지켜야 하는 엄격한 가정의 어머니가 ‘따님이 발가벗은 채로 벽에 매달려 있어요!’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느 날 마리나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더니, 마거릿 대처처럼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이제 빼앗아 가겠다’며 묵직한 물건을 던졌다고 한다.
“나의 사유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 형식을 찾아 나만의 길을 개척해야 했어요. 어린 나이에 퍼포먼스라는 걸 발견했으니 다행이에요. 그리고 55년 동안 작업을 지속하고 있죠.”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핵심 매체이자 과정 그 자체로 삼은 20세기의 20대 여성. 그녀가 처음으로 관객 앞에서 몸을 쓴 작품은 바닥에 펼친 손가락 사이 사이를 빠르게 칼로 찌르는 공격적인 퍼포먼스, ‘리듬 10’(1973)이었다. 한때 서울의 ‘국민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샤프를 들고 그런 놀이를 했는데, 그 발상의 기원이 바로 마리나의 ‘칼춤’ 아니었을까? 그녀는 손가락이 찔릴 때마다 20개의 칼 중에서 새로운 칼로 바꾸었다.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할 때는 신음 소리를 내거나 칼에 찔리는 타이밍을 이전 행위 때와 똑같이 맞추려고 했다. 과거의 실수와 미래의 실수를 하나로 만들고자 한 작품이다. 신체와 정신의 한계를 탐구하는 ‘리듬’ 시리즈는 여러 형태로 이어졌다. ‘리듬 5’(1974) 때는 커다란 별이 등장했다. 마리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상징인 별 모양 장치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자기 손톱과 발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불길 속으로 던지며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퍼포먼스 후반, 그녀는 별 속으로 들어가 누워 있다가 의식을 잃었다.
마리나가 처음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리듬 0’(1974)이다. 전시장 테이블에 장미, 향수, 빵, 와인, 가위, 쇠막대, 총알이 하나 든 권총 등 72개의 오브제와 함께 이런 메시지가 놓여 있다. ‘저는 물건입니다. 6시간 동안 저를 가지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마리나는 그런 상황에서 대중이 어떤 행동을 할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그녀에게 꽃을 안기고 키스하는 관객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에 관해서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인스티튜트’ 유튜브 채널에 그녀가 직접 남긴 말이 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난폭해져서 제 목을 칼로 긁고, 피를 마시려 했어요. 저를 업고 돌아다니다가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제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칼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총을 들고 와서는 제가 정말 방아쇠를 당기는지 확인했어요.” 만신창이가 된 여자는 그날 밤 호텔방에서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대체 왜 그런 ‘예술’을 시작했을까?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것 말이다. “인간이 느끼는 세 가지 주요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건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나는 관객들 앞에서 어려운 상황을 연출하고 그들의 거울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두려움에서 해방됐어요.” 여러 실험을 하면서 마리나는 자신의 에너지가, 혹은 인간의 에너지가 무한에 가깝다는 점을 느꼈다.
“제가 그런 퍼포먼스로 관객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내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해요. 그 경험들이 퍼포먼스라는 예술 형식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을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이제는 대중이 퍼포먼스를 하는 것, 그러면서 자신만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에게 더욱 중요해졌어요.”
2010년 MoMA에서는 그 유명한 전시, <The Artist Is Present (예술가가 여기에 있다)>가 열렸다. 핏빛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은 마리나의 강렬한 이미지, 그와 대비되는 정적인 무드는 온라인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퍼져 나갔다. 아티스트가 관객 한 명 한 명과 마주 앉아 ‘우리가 말없이 눈빛으로 연결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는 생각으로 마련한 이 시간은 사실 회고전 중 일부인 체험 무대였다. ‘리듬 0’ 같은 작품이 관객의 폭력성을 증폭시켰다면, <The Artist Is Present>는 공생적인 연결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때도 마리나는 ‘리듬’ 시리즈와 같은 맥락의 퍼포먼스 중이었다. 그녀는 약 80일 동안 매일 하루 8시간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이 60대에 벌인 일이다. 관객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 동안 마리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1분이 되기도 전에 일어났고, 누군가는 복받치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며 울었다. 침묵 속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감정의 거울을 대하기 위해 비요크, 루 리드, 제임스 프랭코 등 셀럽들도 줄을 섰다. 관객과 관객 사이, 전환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마리나는 그저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식이었다. 다소 지친 얼굴로 그녀가 눈을 떴을 때, 헤어진 연인이자 12년 동안 동료로 함께 작업해온 울라이(Ulay)가 눈앞에 있었던 극적인 순간은 전시를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더욱 확산되게 만들었다. 이 예술가 커플은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둘 사이의 ‘혼종적 에너지’ 를 표현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만리장성에서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퍼포먼스를 한 발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각자 벽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출발해 만날 때까지 걷는다는 내용의 퍼포먼스. 그 계획을 중국 당국에 허락받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연인들이 그렇듯 그 시간 동안 둘 사이는 전과 달라졌다. 퍼포먼스의 막은 올랐고,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걷다가 90일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만남과 동시에 이별로 막을 내렸다. 만리장성에서 쓴 대서사시이자 둘의 이별 퍼포먼스가 돼버린 그 작품명은 ‘The Lovers’(1988). MoMA에서 울라이를 마주한 마리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관객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던 룰을 깨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두려움에 직면하고, 고통을 자율적으로 감독함으로써 정화되며 용기를 얻는 예술가. 마리나는 우리가 삶의 연약함이나 우리 존재의 일회성을 깨달았을 때 취약해진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하지만 연약함과 취약함이 드러나는 어떤 퍼포먼스의 장에서, 예술가와 관객들이 놀라운 관계를 맺으며 에너지를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녀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고통이 공산주의 체제와 집안 배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언젠가는 ‘예술가로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만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올해 글래스톤베리 무대에 올라 수많은 관중에게 ‘7분간의 침묵’을 요청한 퍼포먼스 역시 걱정과 두려움을 뚫고 움직인 결과다. 낯선 장소에서, 평생 처음 대하는 성격의 관객을 앞에 두고, 그녀는 곳곳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2024년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의도로 평화를 기리는 잠깐의 침묵을 권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시끌벅적했을 뮤직 페스티벌 현장이 놀랍도록 고요해졌다.
나는 문득 소설가 한강을 언급하고 싶었다. 마리나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존재를 아는지도 조금 궁금했다. 노벨위원회가 ‘역사의 상처를 마주 보고, 인간 삶의 취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한 한강의 작품은 누군가에겐 ‘매스꺼울 정도로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내용의 소설’이 된다. “한강은 탁월한 작가이고, 국제 문학계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죠. 아쉽게도 한강의 최근작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요.” 고통을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작업을 펼치는 예술가들은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까? 누군가 왜 그렇게 어둠에 집착하느냐고 묻는다면, 예술가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나는 삶이 어려울수록 더 훌륭한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업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에 그래요. 행복으로부터 만들어진 것 중에선 그 어떤 중요한 예술 작품도 본 적이 없어요.” 마리나의 뜻은 이렇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각예술과 문학은 다르다.’ 카프카가 행복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작년 9월부터 올해 1월 초까지, 마리나는 영국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Arts)에서 대규모 회고전 <Marina Abramović>를 열었다. 그녀는 255년 역사를 가진 왕립예술원의 메인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여성 작가다. 프리즈 런던 기간에는 이곳으로 각 분야의 뛰어난 여성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열기도 했다. 마리나는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여성을 향한 전통적인 개념을 재구성한 아티스트라는 점은 콧대 높은 왕립예술원도 인정했다.
<더블유>의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과 관련해 마리나가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작품은 바로 가슴 드로잉이다. 미니멀하게 표현한, 위트도 있는 다양한 가슴들. “가슴 드로잉을 커버로 보여주지 못한 건 아쉽네요.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여성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크기와 특징을 보여주는 가슴을 그린 거예요. 유방암은 심각한 질병입니다. 물론 제가 이 가슴들을 그릴 때는 그런 면보다 다른 면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가슴에서는 젖이 나오고, 그건 우리 모두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먹는 음식입니다. 젖을 먹는 아기의 얼굴이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한가요. 여성이 생명을, 또 자양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껴야 해요.”
Spirit Cooking 29, 연도 미상
Ink on paper
지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70대 후반이다. 작년에는 폐색전증으로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받았다. 건강 문제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마리나는 한국인들과 접점을 마련하는 <더블유> 인터뷰에서 굳이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싫은 눈치였다. 대신 그녀는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비행기를 타다 난기류를 만날 때면 종이를 꺼내 유서를 쓰곤 해요. 하지만 나는 죽음에 내재한 철학적 측면을 아주 좋아합니다. 수피교의 스승들은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은 곧 꿈이며, 죽음은 곧 깨어나는 것이다.’’’ 마리나가 수잔 손택이 세상을 떠나기 5년 전부터 친구로 지내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아주 신선하다. 당대의 걸출한 두 여성은 서로가 50대, 60대일 때야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손택은 비범한 인물이죠. 훌륭한 작가이자 사상가였어요. 그녀의 장례식이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그런데 비 오는 날, 아주 소규모로 치러졌어요. 정말 화가 났어요. 위대한 여성이었던 그녀에게 마땅한, 위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거든요. 모든 친구들이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할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어요. 그때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 죽음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장례식의 세부 사항을 정했죠.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세 도시인 베오그라드, 암스테르담, 뉴욕에 시신을 묻는 거로 알리되, 진짜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으로요.”
언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장례식’이라는 위대한 행사를 치르기 전에, 마리나는 삶과 죽음에 관한 또 다른 서사를 남기고 싶었다. 2010년대에 그녀는 <The Life and Death of Marina Abramović> 라는 연극으로 순회공연을 했다. 가면을 쓴 세 여성이 무대에 등장하는데, 그중 누가 마리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년까지는 <7 Deaths of Maria Callas>라는 오페라를 위해 여러 도시를 오갔다. 그녀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진 배우, 윌리엄 데포와 함께한 오페라다. 마리나는 마리아 칼라스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자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칼라스가 오페라에서 연기한 각각의 죽음을 자기 식으로 재창조했다. “칼라스는 탁월한 테크닉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싱어였고, 굉장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죠. 하지만 결국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노장으로서 여전히 여러 도시를 유랑하며 일정을 소화하는 그녀를 두고, 이렇게 자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그녀의 미래에는 죽음도 있겠지만, 그전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놀라운 소식이 먼저 있다. 2026년 서울에서 드디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개인전이 열린다. 마리나는 그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한국을 둘러볼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삶이라는 꿈을 꾸다 곧 깨어나는 일은 이 제왕적인 면모를 지닌 여성 평생의 가장 장대한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마리나와 <더블유>의 만남은, 어느 위대하고 유쾌한 여성이 쓴 자서전의 마지막 페이지 같은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장례식은 진정한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엔 좋은 음악, 맛있는 음식, 재치 있는 농담이 존재해야 해요. 내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축제와 어울리는 의상을 입었으면 좋겠어요. 블랙 의상은 피하고요. 나는 놀라운 삶을 살았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행복했고, 용서로 가득 찬 삶. 훌륭하게 마무리 짓고 싶어요. 예술가로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달에 처음 발을 디딘 여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죠. 교수님들, 부모님, 나라 전체가 내가 하는 일을 반대했어요. 하지만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과 의지가 있었답니다. 지금까지도 포기한 적이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