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연기를 시작한 지 20년을 바라보는 배우 윤계상.
그가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을 믿게 되었으니까. 평화롭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은 이야기
<W Korea> 촬영 시간이 늦은 밤이라 걱정했는데, 컨디션은 괜찮으신가요?
윤계상 그럼요. 9월 말 지오디 콘서트가 열리는데, 그 준비를 하다 오느라 늦은 시간에 모이게 돼서 스태프분들에게 죄송했어요.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와 감사했는걸요. 작품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게요. 최근 올해 하반기 기대작으로 꼽힌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공개됐어요. 오늘 화보 촬영장에 오기 전 마지막 화를 봤어요. 어떻게 보셨어요?
여백이 있는 스릴러라 생각했어요. 친절하게 설명하는 작품은 아니니까요. 배우들의 연기와 미장센, 음악, 그리고 관람자가 생각할 여지가 여백을 채워줘서 전 재밌게 봤어요. 간단하게 보면 재밌는데. 사실 심플하고 쉬운 이야기예요. 드라마는 흐름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스킵하는 인물이 있는데, 이번에 극본을 집필한 손호영 작가님은 자세하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공개 2주 만에 39개국 톱 10을 찍으며 순항 중이죠.
반응을 예상하진 못했어요. 처음부터 작품 자체가 지닌 독특함이 강하게 다가왔거든요. 제가 이 작품을 함으로써 그 색깔이 배우인 제게도 묻어나길 원했어요. 대중에게 배우 윤계상의 이미지가 조금 오래되었잖아요. ‘얘가 이런 작품도 하네?’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어찌 됐건 전체적으로는 관심을 받고 이슈가 됐죠. 정말 많은 피드백을 받았거든요. 좋다는 분과 어렵다는 분이 계시는데 많은 이들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건네주니까 그 자체가 너무 기뻐요.
작품에서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일상이 구겨진 모텔 주인 ‘구상준’ 역을 맡았어요. 극 중 대사 중 하나인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을 맞는 개구리”에서 평범한 개구리 역할이에요. 깊은 우물에서 감정을 끌어올리는, 구상준에게 다가가는 과정은 순탄했어요?
상준이 전 재산을 털어서 모텔을 샀는데, 어느 날 사이코패스가 찾아와서 모텔 토막 살인이 일어나요. 그로 인해 가정이 붕괴
되고, 와이프가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죠. 그 시간에 멈춰 늙어 죽을 때까지 저주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근데 이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가정을 지키고 싶은 평범하고 착실한 가장. 소소한 디테일이 없어요. 그게 잘 표현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자체에 집중하려 했어요.
대중의 반응 중에는 답답하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평범한 우리네에게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난은 가슴 답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인물에게 몰입한 평이 아닐까 싶어요.
스토리라인에서 외딴섬에 있는 사람이 사실 상준이거든요. 작품은 ‘ 영하’(김윤석)와 ‘ 성아’(고민시)의 이야기지만요. 전 감정을 전달하는 입장이죠. 그래서 제가 맡은 역할이 정말 어려운 거예요. 또 그래서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무너진 채 절망 속에 빠져 사는 상준의 감정이 영하에게 가는 것. 그걸 생각하면 작품이 쉽게 다가오실 것 같아요. 배우로서 그걸 너무 하고 싶었어요.
쉽지 않은 미션이었겠어요.
도전이었죠. 그래도 잘 봐주신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도전은 배우로서 잘하고 싶은 부담으로 다가오나요, 혹은 풀어가는 과정의 재미로 느껴지는 편인가요?
모완일 감독님은 꽉꽉 채운 것을 더 촘촘하게 채워가는 분이세요. 대본보다 훨씬 더 탄탄하게 디테일을 잡으셨죠. 그리고 배
우들에게 굉장히 많이 맡겨주세요. 그러니까 배우에게는 너무 너무나 재밌죠. 이를테면 극 중에서 살인 사건이 나 방치된 모텔을 부동산에 팔러 갔을 때, 부동산의 희망찬 이야기를 듣고 오거든요. 극 중 부인인 ‘은경’이가 화색이 돌아서 저녁밥을 차려줘요. 감독님은 이 순간 식탁의 분위기, 밥을 먹는 몸짓에 대해서 제 의견을 물어보세요. 그리고 상의하면서 디테일을 쌓아가는 식이죠.
어두운 집에서 식탁에만 조명이 들어온 그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절망에서 희망을 엿본 가족의 분위기가 직관적으로 보였거든요.
진짜 신경을 많이 쓰면서 촬영했어요. 작은 요소마다 섬세하게요.
그간 맡은 배역마다 캐릭터를 압축한 듯한 비주얼이 인상에 남아요. 영화 <범죄도시>의 ‘장첸’은 지푸라기처럼 야생적인 긴 머리를 묶었고, 올레 TV <크라임 퍼즐>의 ‘한승민’은 빡빡 밀었고요. 이번에는 어떤 이미지를 그렸나요?
당시 ENA <유괴의 날>과 함께 촬영 중이었어요. 그래서 살이 많이 찐 상태였어요. 상준과 닮아 있었죠. 사실 보통 배우들은 자기 나이보다 좀 젊은 역할을 맡을 때가 많아요. 반면 상준이는 제 나이 또래라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염이나 말투도요.
구상준은 관람자가 감정을 대입할 수 있는 평범함을 연기해야 해요. 오래된 옷을 잘 세탁해 입은 듯한 느낌이 잘 어울렸죠. 극 중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노인 분장을 위해 14kg을 감량했다고 들었어요. 고백하자면 극사실주의적으로 담긴 노년기 상준의 장면에서 울음이 좀 났습니다.
상준이가 잘 표현됐네요. 모완일 감독님께 감사를. 하하하.
자신이 어떻게 늙을지 상상하는 건 쉽지 않죠.
저도 고백하자면 미래의 늙은 제 모습을 매일매일 꿈꿔요. 정말 특이하죠. 카운트다운을 거꾸로 세는 것처럼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진짜로요. 인생은 길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살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좀 달라질 것 같아요.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을 진짜 소중하게 대하게 돼요. 상준이가 분장한 나이까지, 제겐 20년이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 남지 않은 거죠.
20여 년 뒤, 상상 속의 당신은 어떤 모습인가요?
글쎄요. 제가 가진 근육들이 남아 있어서, 잘 걷고 잘 움직일 수 있으면 해요. 그게 첫 번째 바람이죠. 그리고 그 나이까지 일을 한다면 좋겠어요. 전 빨리 은퇴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은퇴한다고 생각하면 막상 너무 심심하고 지루할 것 같아요.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요. 그게 꼭 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될 수 있죠. 20년 뒤면.
연기를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껏 굉장히 촘촘하게 살아온 것처럼 그때도 변함없이 불태우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렇죠. 열심히 살아봐야지요. 하하.
전작 JTBC <부부의 세계>를 만든 모완일 감독은 ‘착해 보여서’ 당신을 캐스팅하고 싶었다고 밝혔어요. 돌이켜보면 배우 윤계상에게는 양극단의 모습이 공존해요. 영화 <풍산개>의 ‘풍산’, <범죄도시>의 ‘장첸’, 올레 TV <크라임 퍼즐>의 ‘한승민’은 발산하는 인물들이었던 반면, ENA <유괴의 날>의 ‘김명준’과 영화 <말모이>의 ‘류정환’,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도훈’은 수렴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캐릭터죠. 이처럼 극단의 인물들을 맡았을 때,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사실 여기서 처음 이야기하는데요. 전 약간 이중인격자 같아요(웃음). 굉장히 조용하고 우울하고, 어두운 면이 있고, 반대로 굉장히 밝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어떤 사람 앞에선 낯가림이 너무 심한 반면, 또 어떤 사람 앞에서는 너무나 편하게 풀어져요. 난 왜 이럴까, 불안했죠.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하고요. 사람들이 종종 ‘지오디의 윤계상’과 ‘배우 윤계상’으로 나뉜다고 말하곤 해요. 근데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달라서 그래요. 제가 JTBC <뉴스룸>에 세 번 나갔는데, 배우 윤계상과 지오디의 윤계상으로 출연했을 때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며칠 전 지오디 멤버들과 출연한 <뉴스룸>을 보며 숨도 쉬지 못하고 웃었어요.
분위기가 너무나 다르죠. 그런데 그게 긴장에서 오는 차이가 절대 아니거든요. 이제는 이러한 제 양극단의 면을 받아들였어요. 연기적으로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극과 극의 성격이 캐릭터를 오가는 데 도움이 돼요.
성향에 잘 맞게 직업을 잘 골랐군요.
맞아요. 잘 맞아요.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는데, 왜 그런지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그렇죠. 컨디션에 따라서 사람의 태도가 변하니까요.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되잖아요. 너무 힘들었어요. 저도 그렇지만 주변에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특히 처음 본 사람들이요. 이제는 먼저 솔직하게 말해요. 오늘 기분이 차분하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설명하죠.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러한 상태로 있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배우로서 열심히 달려온 시간이 탄탄한 필모그래피로 빛나요. 그 시작점인 2004년 영화 <발레교습소>로부터 벌써 20년이네요.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발레교습소>의 ‘강민재’를 돌이켜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첫날 첫 촬영을 하고 울었거든요. 너무 좋아서요. 이걸 오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재미있었죠. 술 먹고 막 울어서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그때 그 감정 때문에 연기를 시작했어요. 변영주 감독님께서 너무 잘하고 있고, 좋으니까 열심히 해보라고 했던 그때부터 20여 년이나 지났잖아요. 잘 선택했죠. 이제야 좀 알겠어요. 연기를 깨우쳤다기보다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알 것 같아요.
불안했던 그 시절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어요?
생각 좀 그만하라고요. 생각이 너무 많았거든요.
생각을 끊으라고 해도, 끊긴 어려운 시기기는 하네요.
맞아요. 너무나 생각이 많았고, 지독했습니다. 진짜 너무너무요.
4년 전, 윤계상 감독의 이름으로 유튜브 페이크 다큐멘터리 <테이블>을 선보였어요. 가득 채워진 테이블 위를 치우고, 직접 테이블을 만들고, 새로 빈 테이블을 마주하는 그가 있죠. 보면서 내 인생의 테이블은 어떤가 반추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사람 윤계상의 테이블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제야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이 밥을 누가 먹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진수성찬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에너지도 바뀌었어요. 따뜻해졌죠. 저는 세상이 변하게 되는 시기에 기운이 바뀐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곧 새로운 시작이 열릴 것 같아요. 앞으로 배우 윤계상이라는 색깔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게 만들 거거든요. 이전까지는 무채색이라 어디에도 속 하지 못해 방황했다면, 지금부터는 분명한 색깔을 낼 거예요.
당신의 다채로움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에게는 또 다른 지점이었군요.
저는 색깔을 내고 싶어요. 확실한 색깔. 이게 만들고자 하면 나오겠죠. 이제 막 물감을 짜기 시작했으니까요.
개인 SNS를 시작한 이유는 배우로서 윤계상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함이라고 했죠. 자신보다 배역이 돋보였으면 하는 이유라 밝혔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직접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지난 인터뷰에서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고 표현했고요. 이러한 흐름이 변화와 연관이 있는 건가요?
맞아요. 그냥 제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에요. 대단한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지만요.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어요. 그저 앞으로의 미래가 이제는 두렵지 않아요.
후반전으로 진입한 요즘은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드나요?
옛날처럼 걱정이나 두려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희한하게 에너지가 꽉 차 있어요. 무엇이 펼쳐질지는 몰라도, 괜히 알 것 같은 느낌이에요.
건강이 한번 흩어졌다가 추스르면 세상이 달리 보이곤 하죠. 이제는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걸까요?
그런 것도 있어요. 설명하자면 유체 이탈해서 스스로를 보게 된 느낌이랄까? 문득 저를 돌아봤는데 꽤 열심히 잘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까지 이어진 거죠. ‘됐어, 너 이제 괜찮아’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결혼도 있죠. 내가 아니라 ‘우리로 변한 삶’은 적응했나요? SNS에 업로드한 가족 응원 피드도 인상 깊었어요. 따스해 보였거든요.
너무나 아주 정말 좋습니다. 인생이 정말 짧은데 너무 세상의 눈치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이상하지 않게 바라봐주실 거라 믿었어요.
9월 말 지오디의 25주년 기념 콘서트 ‘2024 god Concert <Chapter 0>’가 열려요. <뉴스룸> 인터뷰에서 지오디를 ‘우리 모두의 그룹’이라 소개했죠. 그 단어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경계하는 것이 있나요?
절대요. 노력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그저 흘러가는 거죠. 이번 콘서트의 주제도 그거예요. 우리가 쌓아온 시간, 시작, 무한
대. 저희가 그만한 세월을 함께 지나왔기 때문에 이러한 무대 콘셉트와 연출도 가능한 거죠. 우린 끈으로 이어져 있어서 다시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모인 거니까. 사실 멤버들에게 고마워요. 건강하게 존재하는 것 자체로요. 그래서 지오디가 이렇게 사랑받는 것 아닌가 싶어요. 진짜 다들 자기 마음대로거든요.
‘지오디 존’에 들어가면 윤계상은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더라고요. ‘인생을 함께 나누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주곤 하나요?
저를 기억해주죠. 어린 시절의 윤계상, 그 또래의 시간으로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죠. 행복하고요.
1999년에 꿈이 ‘1위 후보, 하루 세 끼, 단 한 번 만이라도 금액 걱정하지 않고 한 끼를 먹기, 여름에 춥고 겨울에 더운 것’이라 말했어요. 25년이 지난 지금, 사람 윤계상의 꿈은요?
행복하게 사는 거? 구체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정말 많은 사람인데요. 낯 뜨거워서 자세하게 설명은 못하겠어요. 하하하.
- 프리랜스 피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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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일리스트 | 남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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