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디자인을 이끄는 90년대생 디자이너 4

전여울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시선이 바뀌면서 K디자인의 위상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금 국내외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활보하고 있는 90년대생 디자이너 4팀을 만났다.

HANEUL KIM

나이키와의 협업으로 제작한 복싱용 펀칭백과 글러브. 충격을 흡수하는 TPU 소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김하늘(1998)은 버려진 폐기물에서 디자인 미학을 발견하는 디자이너다. 팬데믹이 극으로 치닫던 2020년, 김하늘은 한 달 평균 1,300억 개의 마스크가 버려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렇게 버려진 플라스틱 마스크를 업사이클링해 완성한 것이 바로 스툴 시리즈 ‘Stack and Stack’. 대학 졸업 작품이기도 했던 해당 시리즈는 외신 <디자인붐>, <디진>, <바이스> 등에 소개되며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그가 나이키와 협업해 2023년 선보인 복싱용 글러브는 최근 미국 땅을 밝기도 했다. 충격을 흡수하는 신소재 ‘TPU(폴리우레탄 탄성체)’의 특성을 시각화한 시도였던 해당 작업은 7월 한미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로 건네졌다.

나이키와의 협업으로 제작한 복싱용 펀칭백과 글러브. 충격을 흡수하는 TPU 소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나이키와의 협업으로 제작한 복싱용 펀칭백과 글러브. 충격을 흡수하는 TPU 소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W Korea>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버려진 일회용 마스크를 재활용해 디자인한 스툴 시리즈 ‘Stack and Stack’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작업의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김하늘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었고,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뉴스를 틀면 그날 하루 확진자 수부터 전염병이 야기한 수많은 문제를 다루는 특보가 쏟아졌다. 일회용 마스크 폐기 문제도 꽤 심각한 이슈였다. 당시 전 세계에서 한 달 평균 1,300억 개의 마스크가 버려지고 있었다. 마스크의 주요 소재는 플라스틱이다. 이들은 마모되다 결국 미세 플라스틱으로 변해 해양 생물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폐마스크 원단을 가구로 재탄생시켜보자는 아이디어가 ‘Stack and Stack’의 시작이었다. 의자 형태의 거푸집에 플라스틱 마스크를 녹이고 식히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렇게 얇은 천이었던 마스크 수천 장이 합쳐져, 단단하고 질긴 내구성을 가진 스툴로 재탄생했다.

버려진 폐스크린을 재활용해 디자인한 무선 조명 100개를 CGV 상영관에 영구 설치하기도 했다. 주로 폐기물을 소재로 작업하는데, 폐기물에서 발견한 미학은 무엇인가?
폐기물에 한정하기보다 낡고 세월이 깃든 것을 모두 좋아한다. 오래되어 부식된 철문이나 고목, 구제 의류 같은 것 말이다. 심지어 회나 고기도 숙성된 걸 좋아한다. 원래 모습에서 마모되고 풍화되었다는 시각적 측면, 물건에 흘러간 세월과 스토리가 축적되어 있다는 내러티브적 측면 모두가 좋다.

평소 디자인 프로세스의 출발점은 ‘소재’, 그것의 특성인가? 작년 금호 알베르에서 열린 나이키랩 전시 <Reversion: 회귀>에서 복싱용 펀칭백과 글러브를 선보였다. 나이키 ISPA 컬렉션의 신발 밑창에 쓰이는 소재이자 충격을 흡수하는 특성을 가진 ‘TPU(폴리우레탄 탄성체)’에서 착안해 디자인했다 들었다.
정확하다. ISPA 컬렉션 신발의 주요 소재는 TPU다. 생소한 소재였기에 관련 특징을 검색하며 공부하던 중 ‘충격을 흡수한다’는 문장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자연스레 복싱이란 스포츠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가 정찬성 선수가 마지막 은퇴 경기를 치러 떠들썩했던 시기라 주먹을 쓰는 장면이 계속해서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섬유화한 TPU 원단을 재봉해 복싱용 펀칭백과 글러브를 제작했다. 나이키 전시 이전까진 주로 가구를 만들었는데, 이 시기가 터닝포인트가 되어 작품 세계가 확장됐음을 실감한다.

나이키, 무인양품, 아모레퍼시픽 등과 함께하며 ‘협업의 아이콘’이라 불리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협업 사례는 무엇이었나?
롤스로이스. 그간 협업한 브랜드 중 가장 ‘하이엔드’다. 단지 그 이유로 인상 깊었던 건 아니고, 정말 힘들게 작업한 기억이 있다. 롤스로이스 ‘위스퍼스’ 멤버에게 제공하는 인센스 홀더 300개를 디자인했는데, 기획부터 제작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했다. 마감에 쫓겨 3일 연속 밤을 지새운 것 같다. 클라이언트의 레벨이 높고 브랜드의 색깔이 강할수록 협업 파트너는 애를 먹기 마련인데, 그만큼 또 배울 점이 많은 듯하다. 이 협업으로 많은 걸 깨달았지만,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도 롤스로이스는 안 탈 거다.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정은 무엇인가?
기획, 스케치, 디자인 후의 ‘제작’ 과정.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 떠들고 그럴싸한 상상을 하는 건 다들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거래처 사장님과 진득하게 통화도 해야 하고 공장에 가서 애교도 부려야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지금 가장 협업해보고 싶은 브랜드는 어디인가?
구글. 이메일 한 통 보낼 때 4g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낸 거대한 데이터를 서버에 저장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가스가 낭비된다. 요즘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있는 상상에 몰두 중이다. 구글도 분명 흥미롭게 생각할 거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이란 장소성은 작업물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서울은 뻔하고 빠르다. 서울이 뻔하다는 사실은 자신의 무기를 멋지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유리한 특징이고, 서울이 빠르다는 사실은 누구든 나태하지 않고 꾸준히 각자의 일을 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런 사실이 늘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시선이 뒤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신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치는가?
최근 외교부의 요청으로 나이키와 협업해 만든 복싱 글러브를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선물로 증정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주변 동료들을 보아도 세계적으로 한국의 디자인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외의 반응에 동요해서 변하고 싶기보다는 원래 내 스타일대로 묵묵하게 가고자 한다. 칭찬이나 성과에 오래 빠져 있으면 그다음 스텝은 없다.

‘미래’를 위한 디자인에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현재의 지속 가능한 재료는 미래에는 흔한 재료가 될 거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흔한 재료를 앞으로 어떻게 사용하지 ‘않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에서 미래를 위한 디자인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BYUNGSUB KIM

돌체앤가바나 전시작으로 선보인 ‘Ceramic Nacre’.

김병섭(1997)은 올해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돌체앤가바나가 주최한 <Gen D Vol. 2>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 디자이너다. 전 세계 가구 제작 분야의 젊은 디자이너 10인을 조명하는 이 그룹전에서 그는 나전칠기와 모자이크 공예에서 모티프를 얻은 수납장 ‘Ceramic Nacre’를 선보였다. 전통 공예와 현대적 미감의 디자인을 결합하는 그의 시도는 ‘서로 다른 시대성의 교차’로 읽을 수도 있다. ‘시차 있는 디자인’을 펼치는 그는 작년 프랑스 파리 기반의 GSL 갤러리에서 진행한 그룹전 <Blue Steel>,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컬렉터블’ 페어 등에 참가했다.

나전칠기와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조합한 ‘Narrative 001’.
단색 화가 윤형근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UB01’.

<W Korea>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돌체앤가바나에서 주최한 <Gen D Vol. 2> 전시에 참가했다.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병섭 작년 가을,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페데리카 살라로부터 인스타그램 DM이 왔다. 포트폴리오를 보내달라는, 단순명료한 내용이었다. 당시 파리 ‘GSL 갤러리’에서 열린 그룹전 <Blue Steel>을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마침 해외 활동을 계획하던 때라 기쁜 마음으로 포트폴리오를 보냈고 이후 최종 10인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수납장 ‘Ceramic Nacre’를 선보였다. 작업의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한국의 나전칠기와 이탈리아의 모자이크 공예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업이다. 전시를 위해 작년 11월 밀라노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접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예 기법인 모자이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가로세로 1cm 남짓의 작은 도자기 조각들이 온 공간을 채우는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문득 작은 도자기나 유리를 구워 그림을 그리는 모자이크 공예와 조개껍데기를 끊어내어 그림을 그리는 나전칠기 사이의 유사성이 느껴지더라. 둘을 연결하는 작업을 떠올렸는데, 단순히 전통 기법을 계승하기보다 현대 디자이너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녹이고 싶었다. 기존 모자이크와 나전칠기의 특징 중 하나인 화려한 색은 배제하고, 나전칠기의 패턴을 디지털화해 왜곡과 변주를 주어 새로운 패턴을 만든 후 이를 다시 모자이크로 제작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언젠가 ‘시대성이 다른 것들을 겹쳐보는 시도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무슨 의미의 말인가?
‘시간의 갭’은 나의 작업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요소다. 고가구의 일부, 소반의 다리, 자개장의 문짝 같은 것들을 산업 재료인 스테인리스나 아크릴과 툭 겹쳐본다거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부식되는 철에 화학 약품을 이용해 일부를 빠르게 부식시켜 빛나는 철의 모습과 부식된 철의 모습을 함께 병치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내가 평생 살아오며 바라본 서울의 모습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경복궁과 나란히 유리 빌딩이 있는 풍경이나 현대 문명의 상징인 고속철도에서 진입음으로 국악 선율이 들리는 것처럼. 너무 익숙해서 더는 새로워 보이지 않은 것들에 집중해서 작품을 펼치고 싶다.

작업의 실마리는 주로 어디서 찾나?
재료에 대한 해석, 여기서 디자인적 상상력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산업 재료는 대부분 정형화된 재료의 가공법이 있는 편인데 여기서 한 발 나가 ‘이런 식의 사용은 없지 않았나?’와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빠르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작품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이러한 과정 자체를 즐긴다.

가장 자주 듣는 작업의 피드백은 무엇인가?
어느 순간부터 ‘너의 작품은 참 너 같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개인적으로 말투, 표정, 패션까지 모두 그 사람의 작품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로선 기분 좋은 피드백이다.

지금 가장 흥미로운 소재는 무엇인가?
합판을 이용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합판 역시 나무를 저렴하고 쉽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 재료인데, 원목과는 다른 특성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원목과 달리 얇은 켜로 구성된 모습이나, 넓게 사용하기에 쉽고 두껍게 사용하기 어려운 점 등에 주목하는 중이다.

지금 가장 협업해보고 싶은 이는 누구인가?
에스파.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Armageddon’ 뮤직비디오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티스트, 기업, 디자이너, 패션 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완성된 총체적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각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멋진 브랜드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처럼 공간부터 작품까지 함께 만들어내는 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시선이 뒤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한국을 향한 관심의 정도가 달라짐을 체감하고 있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현장에서도 젊은 한국 디자이너에 대한 관심이 컸고, 한국에서 디자인 비즈니스가 일어나는 방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작업 방식에는 변화가 없을 테지만 지금의 흐름을 좋은 기회로 삼아 작업을 글로벌하게 보여줄 새로운 루트를 고민 중이다.

‘미래’를 위한 디자인에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소장 가치가 있는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료의 지속 가능성이 아닌, 결과물 자체의 지속 가능성 말이다. 좋은 가구는 100년이 지나도 버려지지 않고 빈티지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소장 가치 있는 디자인 자체가 친환경이라고 생각한다.

WKND LAB

한방 잔사, 목공 작업에서 나오는 자투리 나무를 활용해 만든 오브제 ‘곤 Ⅰ, Ⅱ, Ⅲ’.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Depth of Line’ 컬렉션.

위켄드랩은 2020년 이하린(1994), 전은지(1996)가 결성한 디자인 스튜디오다. 초창기 동·식물성 폐기물을 재료로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둔 디자인 작업을 선보여온 이들은 최근 들어 ‘한국 전통’을 깊이 연구 중이다. 올해 밀라노 위크 기간 열린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의 전시는 이들의 최신 작업을 소개한 장으로, 한국 전통 공예 기법인 ‘매듭’을 활용한 신작 가구부터 법구사물 중 하나인 ‘범종’에서 모티프를 얻은 조명 등을 소개했다. 지난해 마이애미 아트 위크에 참가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컨템퍼러리 디자인 전시 <Tanween 2023>에도 참여했다.

<W Korea> 위켄드랩은 어떻게 결성됐나?
위켄드랩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자인 학부 동기로 처음 만났다. 인도네시아에서 한 달 살기, 축제 주점 운영, 무수한 밤샘 작업 등 긴 시간 경험을 함께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후 각자 스위스와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주말마다 영상 통화를 하며 일상과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함께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약속이 지금의 위켄드랩으로 이어졌다.

올해 밀라노 빌라 보르사니에서 열린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의 전시에 참가했다. 알코바의 전시는 매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으는 전시 중 하나로 꼽히는데, 참가 계기는 무엇이었나?
알코바와의 인연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이애미 아트 위크 2023 기간에 열린 <Alcova Miami>에 전시 작가로 참가했다. 당시 한국 전통 공예 기법인 ‘매듭’에서 모티프를 얻은 가구 및 장식품 시리즈 ‘Tying Wishes’를 선보였는데, 이를 본 알코바 측에서 이듬해 밀라노에서 한 번 더 전시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구 및 소품 컬렉션 ‘Depth of a Line’을 선보였다. 작업의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전통 공예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2년 전 매듭, 한지, 자수, 나전칠기 등 전통 공예 장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에 순식간에 매료됐는데, 작업 과정이 워낙 고되고 보상은 너무 적다 보니 이를 계승할 세대가 없다는 현실이 마음 아팠다. 대번에 창작자로서 어떻게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과거 궁중과 민가에서 두루 사용되던 ‘잠자리매듭’을 2.6m 크기로 제작해 만든 실험적 가구를 시작으로 스툴, 벽걸이, 캔들 홀더 등을 완성해갔다. 법구사물 중 하나인 ‘범종’에서 모티프를 얻은 조명도 선보였는데, 칠보 공예가 박정근 선생님과 협업해 특유의 말갛고 울림 있는 텍스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Depth of Line’ 컬렉션.

우유 폐기물을 활용한 ‘Ricotta’ 시리즈, 달걀 껍데기를 리사이클링한 ‘Oygg’ 시리즈 등 스튜디오 오픈 초기만 해도 동·식물성 폐기물을 재료로 지속 가능성에 초점을 둔 작업을 펼쳤다. 최근 들어 ‘한국 전통’, ‘장인’에 주목하고 있는 듯한데, 이 같은 변화의 이유는 무엇인가?
무척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좋은 재료를 찾다 보니 전통 재료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옻은 자연 소재인데, 액체 상태에서는 독성이 있지만 굳으면 방수, 방염, 심지어 빛바램까지 막아주는 훌륭한 재료다. 전통 재료만큼 친환경적이고 그 자체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한 소재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친환경이 산업 전반에 필수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속 가능성은 환경적 측면뿐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지속 가능성도 포함한다. 이런 이유로 전통과 장인 기술에 더욱 주목하게 됐다.

지금 가장 협업해보고 싶은 브랜드는 무엇인가?
로에베. 로에베는 공예상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즈’를 주최하여 전 세계 공예가들을 위한 무대 제공에 공을 들인다. 2017년 시작한 어워즈가 어느덧 전 세계 공예인의 축제로 자리 잡았고 새로운 재료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 공예와 디자인의 융합을 시도하는 것, 전통과 현대를 잇는 것은 로에베의 DNA로 보인다. 이런 점이 우리의 철학과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서울이란 장소성은 작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서울만큼 전통과 현대가 잘 공존하는 도시가 없다. 특히 모든 제조와 재료를 한자리에서 수급할 수 있는 거리인 을지로가 있다는 점이 아주 큰 장점이다. 을지로에 계시는 제조 장인들은 학생 작품이나 개인 작품을 많이 의뢰받아 작업해서인지, 뭐든 열린 마음으로 흔쾌히 도움을 준다.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나눈다. 바로 이런 점이 창작자에게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시선이 뒤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큰 변화다. 확실히 해외 관객들이 이전보다 훨씬 열린 태도로 다가오는 것 같다. 내년 다른 나라의 디자이너들과 함께한 작품을 선보이게 될 것 같다. 한국 디자이너에 대한 기대가 커진 만큼 더 좋은 작업을 선보여야겠다는 동기 부여가 된다.

2022년 리움미술관 <구름산책자>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Totem’.

SUBIN SEOL

철거된 건축 유산을 기억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한 ‘Remembrance Chair’.
원형의 반복과 대칭이 두드러진 ‘Hoop Chair’.

설수빈(1993)은 영국 왕립예술대학(RCA) 재학 당시 철거된 발전소에서 수거한 핸드레일을 재사용해 의자, 테이블 등으로 탈바꿈시킨 ‘기억의 조각(Remembrance)’ 프로젝트로 단숨에 해외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 ‘사라진 건축물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전시됐고, ‘코리아+스웨덴 영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고상인 ‘그랜드 프라이즈’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디자인, 큰 야망이 아닌 작은 개선으로서의 디자인. 바로 설수빈이 그만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좋은 디자인이다.

<W Korea> 2020년 가구 컬렉션 ‘코리안 아르데코’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1920년대 프랑스에서 태동한 아르데코 양식과 한국적 미감이라는, 서로 교집합이 없는 듯 보이는 두 영역을 한데 접목한 시도였다. 그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설수빈 기본 도형의 반복과 대칭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아르데코 스타일은 프랑스를 벗어나 유럽 전역으로, 미국 대륙 등지로 뻗어 나가면서 각 지역의 개성 있는 스타일과 융합됐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무렵 일본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서구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제한이 있었다. ‘만일 우리나라에 아르데코 스타일이 전파됐다면 어떤 방식으로 융합됐을까?’란 상상이 컬렉션의 시작이었다. ‘코리안 아르데코’는 아르데코 미학과 한국의 절제미 등이 내 안에서 조화롭게 섞여 하나의 스타일로 발현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원형의 반복과 대칭이 두드러진 ‘후프 체어’, 한옥의 창살 구조에서 모티프를 얻은 ‘그리드 체어’ 등이 대표적인 컬렉션 피스다.

형태적으로 원의 반복적 사용과 기하학 패턴의 강조, 색감적으로 무채색의 사용이 돋보인다. 이유가 있나?
아르데코 스타일을 추구하니 작업에서 기본 도형의 반복, 대칭 구조가 자연스레 나타난 듯하다. ‘코리안 아르데코’ 컬렉션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가구 디자인 신에 데뷔했지만 스스로 그것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영국에서 유학하며 ‘리유즈’, ‘빈티지’, ‘레트로’의 키워드를 정착하면서 스타일이 조금 변했다. 여전히 아르데코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미세한 흐트러짐을 스스로 허용하게 됐고 매끄러운 것보다 거친 텍스처를 훨씬 선호하게ㅡ됐다. 컬러 사용의 면에서도 점차 빈티지한 컬러를 팔레트에 들이게 됐다. 스스로 어떤 번듯함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 불편함과 부끄러움이 조금 있었는데, 요즘은 그 컴포트 존의 벽을 부수고 나와서 느끼는 자유가 크다.

건축 폐기물을 재활용한 프로젝트 ‘기억의 조각 (Remembrance)’ 역시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난 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전시됐고, 코리아+스웨덴 영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고상인 ‘그랜드 프라이즈’의 영예를 안겨준 작업이기도 하다. 그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리유즈(Reuse)’를 콘셉트로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레트로비어스 (Retrouvius)와 협업해 탄생한 프로젝트다. 부부가 운영하는데 남편인 아담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건축 폐기물을 수거하고, 아내인 마리아가 그것을 활용해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영국 RCA 재학 당시 우연히 그들을 만나 협업을 제안했는데 흔쾌히 수락했다. 어느 날 그들의 쇼룸 한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티크 목재의 뒤틀린 핸드레일을 발견했다. 핸드레일은 영국 남동쪽 사우스햄프셔의 랜드마크 ‘파울리 발전소’가 철거될 때 아담이 찾은 것으로 발전소를 이루는 여러 건물 중 우주선 형태의 콘크리트 건물인 ‘컨트롤 룸’에서 수거했다고 한다. 핸드레일은 컨트롤 룸 건물의 원형 외관을 따라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사방으로 뒤틀린 형태라 재활용하기가 마땅치 않아 방치된 상태였다. 이를 활용해 일상 속 사라진 건축 유산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메멘토이자 가구를 디자인하자는 것이 ‘기억의 조각’의 시작이었다. 의자, 커피 테이블을 만들었는데 이들을 만들면서 생긴 오프컷들로 나중엔 캔들 홀더도 제작했다. 재료를 ‘리유즈’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리유즈’를 할 수 있어 뜻깊었다.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정은 무엇인가?
마지막에 점을 찍고 완성이라고 결정하는 순간. 늘 완벽보다 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미완성작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완벽주의는 확실히 외국에서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유럽의 디자인 교육은 한국식 완벽주의가 작업을 일단 완성함으로써 얻는 경험과 성장을 놓치게 한다고 지적한다. 때로 완벽보다 완성이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침표일지 쉼표일지 모르지만, 일단 완성의 점을 찍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로서 고수하는 태도나 철칙이 있다면?
나와 작업물에 대한 칭찬에 ‘아니에요’가 아니라 ‘고맙습니다‘라고 답하기. 즉 칭찬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지 않고, 칭찬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하는 태도. 이 또한 영국 유학에서 배운 것 중 하나다. 자신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면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더 힘을 실을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는 데 익숙한 듯하다. 하지만 칭찬은 뱉는 것이 아니라 삼키는 것이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이란 장소성은 작업물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나?
장소성은 결국 그곳의 ‘사람들’에게서 비롯되는 것 같다. 서울, 한국 디자이너들은 흡수성과 빠릿함이 특징이다. 열린 자세로 무엇이든 쏙쏙 재빨리 흡수한다. 이건 단순히 작업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넘어서 흐름 속에서 자신이 취할 것을 빨리 발견하고 자기 것으로 흡수해서 굳혀간다는 걸 의미한다. 또 수능 입시를 치르며 획득한 성실성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디자이너들은 엉덩이 힘으로 작업한다. 날씨가 좋아도, 배가 고파도, 우울해도. 성실도는 퀄리티를, 퀄리티는 진짜(Authenticity)를 만들어낸다.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에서 느껴지는 유대감, 혹은 은근한 긴장감이 나에게 가장 강한 부스터가 아닐까 싶다. 그들의 존재에,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서울이라는 장소성은 늘 작업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세계의 관점이 뒤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밀라노 디자인 위크만 보더라도 더는 유러피언 디자인을 살피는 장이 아니다. 어딜 가도 한국 디자이너의 작업이 있고, 모두가 한국 디자인과 공예에 열광한다.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로 보인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는 역사를 고민해서 써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곡되지 않고, 편중되지 않고, 진실되게 한국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이너의 어깨가 무거운 시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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