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연습

<더블유 코리아>와 넷플릭스 코리아가 의기투합하여 기획한 ‘베스트 퍼포먼스 위드 넷플릭스’는 1년 동안 선보이는 넷플릭스 작품의 배우들을 대상으로 한다

분명한 건 K 드라마와 K 배우의 놀라운 힘이다. 우리는 늘 재밌는 무엇이 출현하길 기다리고, 여기서 즐기는 것은 이제 전 세상 어딘가에서도 즐기는 것이 된다. 그 사실을 큰 동력 삼아 <더블유 코리아>의 눈길이 향한 곳은, 넷플릭스다.

“<트렁크>를 작업하는 동안 나에게 연출적인 영감의 원천은 다름 아닌 서현진의 연기였다. 정통과 파격을 넘나들고, 놀라운 몰입으로 에너지를 뿜어내는 모습. 마치 접신을 하는 듯 매혹적인 그녀의 연기가 창조적 영감을, 또 감탄과 희열을 불러일으켰다. 관성을 거부하는 도전적인 자세와 순수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더욱 깊고 묵직한 배우로 영글어갈 서현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트렁크> 감독 김규태

W KOREA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인해 밝혀지기 시작하는 비밀스러운 결혼 서비스와 그 안에 놓인 남녀의 이상한 결혼을 그린 이야기.’ 당신과 공유가 출연하는 <트렁크>의 로그라인을 읽으면서 은밀하고 수상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트렁크>의 어떤 점에 가장 끌렸나?
서현진 모호한 점. 대본을 봤을 때 전반적으로 분명하지가 않은 느낌이었다. 보통은 대본에서 지문이 길 경우 그것만으로 페이지가 빼곡히 채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트렁크>는, 이를테면 한 신에 지문 한 줄인 채 끝나기도 했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다.’ 그러면 다음 신으로 넘어가기까지, 그 안에서 알아서 다 표현해야 한다. 행간을 읽어야 하고, 여백이 많달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뭘까 미칠 것 같은 거다. 그런 경험이 좋았다. 배우가 해석하기에 따라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이렇게 넓은 작품은 처음이다.

SBS <왜 오수재인가> 이후 오랜만에 작품을 마쳤는데, <트렁크>라는 이야기의 특성상 작업하는 과정이 배우에게 거뜬하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요새는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나?
단순하고 반복적인 날들을 보낸다. 집, 회사, 운동, 테라피…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이 정신 건강에 좋은 것 같다. 루틴화 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몇 시쯤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나?
원래는 ‘텐 투 식스’. tvN <블랙독>을 끝내고 <왜 오수재인가>에 들어가기 전 1년 정도 쉴 때는 그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유지해보려 했는데 조금 어그러지는 텀이 있었다. 그래도 밤 10시에서 자정 사이에는 잠들려고 하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 아침 6시에서 8시 사이가 되는 것 같다.

요즘 당신에게 중요한 화두가 있나?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모든 것은 내 시각에 달렸다.’ 관점만 조금 바꾸면 너그러워질 수도 있고, 오해가 쌓일 일도 없지 않을까 하면서. 막상 터놓고 얘기해보면 상대방의 의도와 달리 괜한 오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될 때도 많다. 그래서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을 때 ‘내가 지금 왜 기분이 상할까?’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다 화가 날 타이밍을 좀 놓치는 효과도 생기고. 물론 뒤늦게 점점 화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은 기분이 상한 포인트를 찾아본다.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서 내가 불편함을 느꼈는지 그 포인트를 찾기까지가 어려운 일 같다. 찾았다면, 그게 정말 기분이 상할 포인트가 맞는지 다시 들여다보는 식으로 하는 중이다.

배우 생활을 하는 데 즐거움과 쾌감을 주는 포인트는 진작에 찾았나?
예전에는 내가 연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는데 이젠 좀 바뀌었다. ‘같이 작업한다’는 점에서 오는 즐거움을 점점 더 느낀다. 작품의 감독님을 비롯해 촬영, 조명, 음향 감독님 등등 모든 이들과 함께 시너지를 낼 때가 그렇다.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3, 4, 5가 되기도 할 때, 우리끼리 ‘우와!’ 하는 게 있달까. ‘반백’에 가까워도 다들 직업적으로 너무나 덕후여서 아이처럼 무언가를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거다(웃음). 그리고 나는 남의 연기를 보는 것도 좋아한다. 상대 배우나 다른 배우의 진짜 멋진 연기를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방금 그거 진짜 좋지 않았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너무나 훌륭하다고 느꼈던 ‘남의 연기’로는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
작품을 보면서 너무 좋은 연기라고 느끼는 순간은 물론 많다. 바로 떠오르는 건 영화 <어느 가족>의 후반부 취조실 장면에서, 안도 사쿠라다. 감독님 인터뷰를 찾아보니 그 장면에선 취조하는 역의 배우만 대본을 가지고 있었고, 안도 사쿠라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받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거의 애드리브로 연기한 거지. 나는 가끔 너무나 좋은 연기를 보면 좌절한다. ‘그래, 연기는 저런 사람이 해야지’ 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전도연 선배님과 류준열 배우의 드라마 <인간실격>을 볼 때도 그랬다. 그 드라마를 보면 1, 2회쯤 보다가 더 이상 나아가기가 힘들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도 좀, 저 좁은 틈 사이의 실낱만큼이라도 되게 해볼 수는 없을까. 저렇게 연기하고 싶다’ 같은 마음이 드는 거다.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종종 듣나?
그렇다. 좀 내려놓고 싶어서, 그런 연습도 하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박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기준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고 싶다. ‘일 잘하는 사람이 좋은가, 착한 사람이 좋은가’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착한 사람’ 쪽이다. 특히나 일을 하는 환경에서는 일은 좀 못할지언정 좋은 사람, 잘 맞는 사람과 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다 사람끼리 만들어가는 일이다. 사람이 싫어지면 일도 산으로 간다.

일에 있어 완벽주의를 지향하면, 같이 일하는 이들의 사람됨이 좋아도 일의 능력이 아쉬워지는 때가 생기는 법인데.
모두 다 남의 집 귀한 아들과 딸이다. 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밖에 없는 시간을 거치기도 했고. 배우로 데뷔하기 전에는 나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내가 그 때 욕을 듣거나 험한 경험을 해본 건 아니지만, 남들을 대할 때 함부로 하는 경우들에 대해 들으면 나중에 자기 자식이 어딘가에서 그런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하는가 싶다. 촬영 현장에서 만나는 스태프들,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 모두 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들이다.

요리는 여전히 즐기는가?
너무너무. 매일 레시피를 찾아본다. 이제는 요리를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에 변형이 올 정도다. 이거 보이나? 검지 손가락이 이렇게 됐다! 칼질, 가위질을 많이 하고 뭘 많이 짜기도 하고 그러면 손가락 모양이 변할 수 있다고 한다.

요리의 어떤 점이 당신과 그렇게 잘 맞는 것 같나?
레시피대로 뚝딱 만들면 그 맛이 나온다. 작품의 경우 시청자와 관객에게 닿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배우로서 물론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게 발표되어야 좋은 건데 그러기까지 수 개월의 촬영 기간을 거치고도 더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요리는 한두 시간 투자하면 결과물이 딱 나와서 좋다. 그리고 확실히 검증된 맛이 있다는 거. 레시피를 따르면 기대되는 그 맛이 정말 난다는 거. 어느 날은 내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양파를 볶았다(웃음). 어니언 스프를 나 혼자 다 먹을 양이 아니어서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엄마 친구분들을 초대해서 대접하는 수준까지 갔다. 요리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거다.

요리에 몰두하고 남들 거두어 먹이는 서현진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면 풍요롭고 좋은데, 새벽 3시에 양파를 볶은 일화는 예사롭지가 않다.
주변에서 취미 생활은 적당히 하라고 말리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자꾸 요리를 해서, 이제는 의식적으로 최대한 간단하게 해먹으려고 한다. 손가락도 신경쓰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나의 무쇠 냄비와 기타 등등을 나눔으로 다른 이들에게 꽤 보내주었다…

집에 물건이 많은 편인가?
<트렁크> 크랭크업 후 이사를 하면서 작정하고 짐을 버렸다. 한 달에 걸쳐 같은 곳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바라봤다. 정리 전문가의 유튜브를 보니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25년 동안 짊어지고 있었던 이불, 그 터질 것 같던 이불장을 정리하니까 정말 필요한 이불은 요만큼밖에 안 남는 거다. 짐의 반을 버리고 이사 했는데 새 집에 오니까 거기서 또 반을 버릴 게 생기고. 결국 원래 짐에서 4분의 3 정도를 버렸다. 그런데도 남은 살림에서 결국 쓰는 것만 쓰게 된다. 1년 정도 살아본 후에 그 때까지 안 쓴 것은 또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 상태에서 짐을 더 늘리지 않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나를 사면 하나는 버리는 것으로. 홀가분한 기분이다. 내 속을 뒤집어 꺼내놓는 듯한 작업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무용을 전공하면서 몰두했을 텐데, 무용을 통해 뭔가를 표현한 경험이 연기 생활에도 어떤 연관 관계가 있을까?
딱히 그렇진 않다. 다만 나는 무용하듯이 연기를 한 것 같다. 그러니까 수련하듯이 연기를 했달까. 무용은 네 살 때부터 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해서 고등학생 때까지 전공을 했다. 나는 그 시절에도 수련하는 걸 좋아했다. 창작하길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나는 동작을 반복해 갈고 닦아서 점점 나아진다는 그 점이 좋았다. 연기할 때도 주로 그런 식으로 접근한 듯하다. 20대 후반 즈음엔가, 내 연기가 너무 ‘매끈하다’는 표현을 감독님께 들은 적이 있다. 그 때는 그 뜻이 뭔지 몰랐다. 연기가 어딘가 좀 이상하고 툭툭 걸리기도 하는 부분이 있어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도 있다는 점을 이제는 알지만.

수련하듯이 연기를 했다는 건 그만큼 캐릭터에 몰입하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뜻인가?
연습을 많이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나는 우는 신을 앞두고 있으면 집에서 정말 울어보고, 강의하는 신을 해야 하면 강의실과 비슷하게 세팅을 해두고 그 안에서 움직여보고 그랬던 사람이다. 의학 드라마도 했으니까 더더욱 철저한 연습이 필요했다.

그런 버릇을 고치기가 힘들었는데, <트렁크>를 할 때는 연습을 하지 않는 게 목표였다. 필사적으로 연습을 피했다. 그렇게 하자니 무서워져서 울음이 나온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좀 다른 걸 해보려고 이렇게 여백이 많은 작품을 골랐으면서, 똑같이 굴 거면 이걸 왜 했어?’하는 생각으로. <트렁크> 첫 촬영 장면이 주로 대사 없이 감정 위주로 담는 장면이었다. 그 촬영 후 감독님에게서 ‘그렇게 캐릭터 잡은대로 하면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서야 조금 안심하게 되었다.

넷플릭스 ‘내가 찜한 리스트’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다큐를 좋아한다. 지금은 넷플릭스에서 내려갔지만, <언레스트>라는 다큐는 충격적이어서 몇 번을 봤다. 기면증에 관한 다큐인데, 완전 강추! <빌리언스>를 정말 재밌게 봤고, <피키 블라인더스>도 좋아한다. <외교관> 시즌 2가 어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스포츠 선수들에게 존경심이 크다. 자기 한계를 계속 극복하는 사람들. 골프 선수를 다룬 <풀 스윙>도 좋았고, 마이클 조던이나 베컴에 관한 다큐도 재밌게 봤다.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당신의 기질은 뭔가?
예민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특징은 양날의 검처럼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예민하다는 표현이 주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느낌이라 별로 좋아하질 않았는데, 얼마 전부터 내가 예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민하다는 건 섬세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네가 예민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같은 말을 들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연습을 요즘 하고 있다. 자신을 직면한다는 게 사실 어려운 일 같다. 용기도 필요하고. 생각해보니, 이런 변화가 <트렁크>를 마친 후부터 생겼더라. 그 이야기의 마지막을 통해 내가 꽤 영향을 받은 듯하다. 계속 변하고 있는 기분이다.

<트렁크> 작업이 여러모로 당신에게 꽤 영향을 끼쳤을까?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작품을 치르기도 했으니 배우로서 분기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짐 정리를 한바탕 한 것도 그렇고, <트렁크>가 나에게 준 영향이 정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분기점이라면 나만의 분기점이지, 보시는 분들에게 어떨지는 봐주셔야 알 수 있는 점이다. 나에겐 도전이었다. 크랭크업 후 스태프들과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좀 놀랄 만한 일도 있었다. 조명 감독님이 정말 입이 무거우신 분인데, 촬영 기간 동안 나와 별로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그 날 내 손을 붙잡고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감독님을 시작으로 다른 분들이 다 한마디씩 해주시더라. 누가 제일 세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아나? 음향 감독님이다. 작은 소리까지 모든 소리를 다 듣는 분이니까 오히려 어떤 상황들이 더 잘 보이신 것 같다. ‘너는 너로 인해 누가 불편할까 싶어서 상황을 계속 정리하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러잖니.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런 말씀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결국 늘 애쓰는 서현진의 모습이 그렇게 다 보였나 보다. 예민한 사람은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도 에너지를 계속 소진하는데, 예민함에 책임감까지 있으면 아무래도 이것 저것 신경쓰느라 바쁜 사람이 된다.
어렸을 때와 달리 시각이 넓어졌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보인다. 좀 덜 보이면 좋겠다. 저 멀리 누가 지나가면서 하는 말도 소머즈처럼 잘 들리곤 한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데 내가 대답을 해주고 있고.

그런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사나?
시더. 우리 반려견.

감독이나 작가가 되어 서현진이라는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다면, 어떤 작품에 써보면 좋을까?
아주 심심한 영화 어떨까. 감정의 격차가 크지 않은 이야기. 혹시 <여자, 정혜>를 봤나? 그 작품을 사실 심심하다고 할 수 없지만, 보면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그 여자의 삶을, 소소한 일상을 따라간다. 물론 그 여자의 심리를 따라가는 셈이다. 그러다가 감정이 가장 고조되었을 때, 그러니까 정혜가 유일하게 분출을 하는 순간에 진공 상태가 되는 것처럼 사운드가 확 빠진다. 난초 닦을 때 나는 소리마저 도드라지게 잡아주던 영화에서 말이다. 그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 나는 주로 감정의 격차가 꽤 있는 역할을 해왔다. 심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그린 작품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