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 코리아>와 넷플릭스 코리아가 의기투합하여 기획한 ‘베스트 퍼포먼스 위드 넷플릭스’는 1년 동안 선보이는 넷플릭스 작품의 배우들을 대상으로 한다
분명한 건 K 드라마와 K 배우의 놀라운 힘이다. 우리는 늘 재밌는 무엇이 출현하길 기다리고, 여기서 즐기는 것은 이제 전 세상 어딘가에서도 즐기는 것이 된다. 그 사실을 큰 동력 삼아 <더블유 코리아>의 눈길이 향한 곳은, 넷플릭스다.
“배우라는 직업에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나는 김희애와 작업하면서 비로소 느꼈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관리와 철저한 준비를 통해 연출자와 함께 가장 최선의 답을 찾아가려는 태도에서 그녀가 살아온 역사가 보였고, 미래가 그려졌다. 피나는 노력으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면서도 유연하게 변신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김희애 배우와 함께 작품을 했다는 건 내 인생에서 큰 행운이자 영광이다.”
– <돌풍> 감독 김용완
W KOREA <돌풍>이 12부작이다. 방송사의 미니시리즈는 보통 16부작이지만, 요즘 OTT 콘텐츠에는 10부작 이내도 많은데. 정주행 했나?
김희애 내가 출연한 작품을 민망해서 잘 안 보는 편이다. 물론 모니터를 위해 한 번은 본다. 그런데 <돌풍>은 세 번을 봤다. 요샌 작품을 아이패드로 봐서 접근성이 좋아 그런지. 다시 봐도 지루하지가 않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어서 ‘내가 대본 숙지를 제대로 못했나’ 싶을 정도였다.
드라마 <펀치>, <황금의 제국>, <추적자> 등을 쓴 박경수 작가가 오랜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대본으로 볼 때부터 남다른 느낌을 받았나?
그냥 대본이 아니라 소설책 같았다. 지문마저 소설을 읽는 듯했다. 뭐 하나 허투루 쓰신 게 없다. ‘된장 끓인다’ 같은 표현 아나? 시청자가 드라마 다음 회 보게 만들려고, 아끼고 아끼면서 뭉근하게 끓이다가 그 회차 마지막에만 터뜨리는 식을 반복하는 거. 내가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런데 박경수 작가님의 글은 매회가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미끼만 던져놓고 후반에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 회 한 회 꽉 차게 쏟아붓는다. 이야기가 1회부터 터져서 놀래키더니 2회, 3회에도 계속 터지는 느낌으로 끝까지 갔다. 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부패한 권력을 뿌리 뽑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 배우), 그에 맞서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정수진. 두 주요 인물에 대해선 어떤 인상을 받았나?
처음엔 내가 맡은 정수진이 박동호를 상대하는 악당이라고 여겼는데, 점차 그냥 악당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권 시절부터 이어지는 그 서사에 빠져들면서 굉장한 매력과 연민을 느꼈다. 박동호의 마지막 결정은 충격적이었다. 그 사람도 어찌 보면 굳은 신념 때문에 스스로 악마가 되었지. 희한한 건, 박동호라는 인물이 참 섹시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나뿐 아니라 감독님도, 현장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다.
정수진에겐 결정적 순간마다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남편이 있다. 그녀는 왜 남편을 버리지 못할까? 그리고 잘난 여자 옆에는 왜 그런 남자가 꼭 있는 걸까?(웃음)
남편으로 출연한 이해영 배우 대사 중 이런 대목이 있다. “나 전대협 한민호야.” 그거, 얼마나 멋있나? 그럴 때만큼은 수진에게 남편이 정말 멋진 존재였을 거다. 그렇게 차츰 스며들어서 어쩔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익숙해졌겠지. 나도 답답했다, 이 똑똑한 여자가 왜 이럴까. 수진은 남편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 것 같다. 측은지심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하더라. 그게 있으면, 상대에게 연민이 강하면 못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돌풍> 같은 작품을 받아 들면 시대와 사회적 배경이나 현실에 대해 파악할 필요성도 있나? 배우는 주어진 이야기에 충실하기만 해도 충분할까?
그런 점에 대해 질문을 받기도 한다. 배우뿐 아니라 작가님이나 감독님 등 우리 모두가 다이내믹한 현대사를 거치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뉴스로 접하는 소식이든 뭐든 보이지 않게 필터링이 되어있지 않을까. 뭔가 나의 세포에 습득이 되어있기도 할 거고. 어떤 레퍼런스를 필요로 하거나 딱히 현실에 대해 파악하기보다는, 배우나 작가나 세포에 새겨진 것들로 영감을 삼는다고 본다. 그리고 배우에게는 그 어떤 경험도 버릴 게 없다.
작품의 분위기는 어둡거나 비장해도 현장 분위기는 웃음이 많고 유쾌한 경우가 있는데. <돌풍>의 현장은 어땠나?
분위기 메이커나 감초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는 현장이면 좀 시끌벅적하고 그렇다. 그런데 일단 설경구 배우만 해도 워낙 집중해서 메소드 연기를 하는 분인 데다 좀 샤이한 성격이기도 해서. 나도 그렇고, 이번엔 전반적으로 그런 성격의 배우가 많았던 듯하다. 뭐랄까. 다들 죽기 살기로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예전, 남자 배우가 많던 촬영장 분위기와 달랐다. 내 남편 캐릭터는 자칫하면 비겁하고 못나게만 보일 수도 있었는데, 이해영 배우가 너무나 잘했다. 그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촬영한 적도 있다.
오래 연기해온 배우에게 새삼스럽지만, 그 많은 대사량은 대체 어떻게 외울 수 있나?
나도 신기하다(웃음). <돌풍> 마지막에는 내가 50명 정도의 이름을 읊는 장면이 있다. 그런 대사를 하거나 헌법에 대해 말하는 경험을 내가 연기할 때 아니면 언제 해볼까.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외운다. 잘 외우는 배우들은 쉽게 외운다고 그러는데, 나는 그렇진 못하다.
작년에는 문소리 배우와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를 작업했다. 그 작품에 대해선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
<퀸메이커도> 작가님이 참 잘 쓰신 작품이다. 초반에는 좋다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작품들이 있어서, 대본 일부만 받았을 때는 과연 어떻게 마무리 되려나 싶었다. 그런데 작가님이 끝까지 탄탄하게 써주셨다. 배우로서 이 나이에 그런 작품과 멋진 역할을 한다는 것, 정말 소중하다. 행복하게 했다. 너무 행복하게.
당신은 10대 때 데뷔해 바로 청춘 스타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일의 재미라는 것을 느끼며 활동하긴 어렵지 않았을까?
스케줄은 많고, 하긴 해야 하고. 20대 때는 그저 다 싫어질 때가 많았다. 일이 지겹고, 괴롭기도 하고, 약간의 우울감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행복하진 않았을 거다. 30대 때는 아이들 키우느라 일과 좀 떨어져 살았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일이라는 게 ‘생활의 수단일 뿐 아니라 나를 증명하면서 행복하게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재밌다, 설렌다, 소중하다,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긴 세월 동안 유난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멘탈 관리를 위해 어떤 방식을 터득했나?
멘탈이야 지금도 여전히, 수시로 흔들린다. ‘나는 왜 이렇게 철이 없나. 언제쯤 철 들려나’ 싶고.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매일 반성하면서. 반성을 한다는 게 어딘가?(웃음).
몸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만큼은 잘 알려져 있다. 역시, 운동하는 티가 나는 몸이다.
그런가? 서울에 머물 때는 PT도 받고, 필라테스도 한다. 제주도에 있으면 매일 아침 집에서 1시간쯤 자전거를 타고, 혼자 짐에 가서 운동하거나 셀프로 필라테스를 하고. 그런데 내가 열심히 사는 건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다. 얼마 전 아는 사람과 골프를 쳤는데, 아침에 5km를 뛰고 왔다고 한다. 골프 마친 후 저녁에는 다시 10km를 뛸 거라고. 너무 탄탄하고 멋있는 몸을 가진 40대 여성인데, 철인삼종 경기에 나갈 준비를 한단다. 요즘 러닝하는 사람도 워낙 많고, 여기 저기서 이야기 들어보면 나는 어디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 남보다 인생을 두 배, 세 배씩 사는 것 같은 이들을 보면 참 멋지다.
어릴 적 데뷔한 과거의 많은 여배우가 그랬듯, 당신도 한때 어머니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당신에게 어머니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 어머니는 나밖에 모른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짠해서 울음이 나오곤 했다. 인품이 좋으신 분이고. 예전부터 우리 모녀 사이의 케미가 좋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엄마의 남편이자 가장 친한 친구처럼, 또 아들 같기도 한 존재로 지낸다. 어머니에게 잘한다, 나는.
인정 받는 배우가 되려면 타고난 재능과 노력 중에서 어느 쪽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나?
노력. 노력이지. 타고난 재능은 반짝할 수 있지만, 배우들은 생각보다 여느 직장인들 이상으로 엄격한 생활을 해야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현장 나가서 촬영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술 좀 마시고 싶다고 해서 마음껏 마실 수 없다. 예전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다들 각자 프로로 현장에 나온 건데, 어떤 경우에는 작품 촬영 기간 동안 금주하는 건 물론 도 닦는 수도승처럼 살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버틴다.
후배보다 선배가 많았던 시절에 들은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말은 아니지만, 문득 드라마 <아들과 딸>을 했을 때 우리 어머니 역할을 하신 정혜선 선생님이 생각난다. 아들을 유독 편애하는 어머니. 그 때는 악역을 맡으면 정말 지나가다가 욕을 잔뜩 먹는게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연기를 얼마나 잘 받아주셨는지 ‘아, 연기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느꼈다. ‘나도 저런 배우가 되어야지’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선생님의 그 얼굴과 연기를 잊지 못한다.
내가 데뷔했던 시절에는 오디션을 보는 문화가 많지 않았는데,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드라마를 앞두고 이병훈 감독님을 만났을 때도 떠오른다. 큰 역할도 아니고 작은 역할을 두고서 MBC 로비 구석에서 ‘이 대사 한 번 읽어봐라’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사극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는 동극 같다는 말을 들었다(웃음). 대체 그 역할을 누가 하려나 드라마를 봐도 역할이 작아선지 도저히 못 찾겠더라. 그런 세월도 겪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 혹시 오늘 어떤 오디션에 떨어진 사람이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 계속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웃음).
나이 들어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이후, 어느 작품 즈음을 계기로 연기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된 것 같나?
요즘. 요즘에 그런 느낌을 제일 강하게 받고 있는 것 같다. 대사를 외우기 전에는 숙제가 한가득 있는 것 같고, 외우기도 어렵고 그렇다. 하지만 외우고 나면 ‘요건 어떻게 해볼까’ 싶으면서 재밌고, 또 상대 배우는 어떻게 하려나 궁금해지면서 좀 들뜨기도 하는 기분이다. 뮤지션들이 콜라보 작업을 하거나 서로 즉흥적인 잼 연주를 하면서 즐기듯이 말이다.
한 직업을 수십 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세월을 지나 ‘요즘’ 연기하는 맛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니. 직업을 떠나 귀감이 되는 이야기 같다. 당신의 얼굴에서도 정말 설레는 기운이 전달된다.
어려운 대사들을 다 숙지하고 나서 다 같이 맞춰볼 때, 그리고 거기서 교감을 이루고 진심으로 빠져들어 연기를 했을 때. 쾌감을 느낀다. 나는 제주도에서 소수의 아는 사람 외에는 사람들을 거의 만날 일 없이, 집에서 밥 해먹으면서 보낸다. 그러다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모자 눌러 쓰고 안경 끼고 나간다. 아무래도 배우들은 주로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니까. 그런데도 나를 알아보고 “<돌풍> 너무 잘 봤어요.”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럴 때면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싶다. 도시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지도 않은 동네에서, 그런 차림으로 있는데도, 내가 작품을 안 했다면 누가 날 그렇게 반갑게 알아봐 주고 인정해 줄까. 보람 있는 일이다.
40년 동안 배우로 살고 있는데. 아직도 한 줌의 갈증이 남아 있을까?
글쎄, 욕심을 따지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이모나 고모, 엄마 역할을 하며 배경처럼 존재할 수도 있는 나이에 이렇게 전면에 나서는 역할을 하기가 쉬운가. 현재 진행형 배우로 일할 수 있다는 점에 너무나 감사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더 이상 선택받지 않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나는 할 만큼 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뭐, 말로는 여한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위로하려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어느 유명한 감독님을 만났는데, 요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인물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 내가 그랬다, ‘가치 있는 작품이면 기꺼이 한다’고. 역할에 대한 프러포즈라기보다 가벼운 수다로 나온 질문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정말 그 역할을 맡길 생각을 한 거라면 역시 대단한 감독이다 싶다. 그런 연기를 하는 경험은 또 어떨까 생각하면, 재밌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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