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예술의 도시, 비엔나 산책

권은경

미술과 음악이 낳은 풍성한 유산 사이로, 골목을 탐방하며 나와 어울리는 동네 찾아가기.

거친 구석이 전혀 없는 평온한 도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만났다.

프라터 유원지의 자이언트 휠이 보이는 도시 전경.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한국에서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 이름이 독일어 ‘빈’일 때면, 이곳은 빈 필하모닉과 빈 소년 합창단을 비롯해 유서 깊은 자산을 갖춘 클래식 음악의 성지로 통한다. 2024년은 쇤베르크 탄생 15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케첩에 푹 찍어 먹는 게 룰인 소시지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이 도시와 아동기 때부터 맺은 뽀드득한 인연을 떨칠 수가 없다. 한 번 비엔나 소시지는 영원히 비엔나 소시지다. 빈 소시지란 말은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다. 비엔나 커피를 빈 커피라 불러도 되는 걸까? 관광청은 영어 명칭인 비엔나(Vienna)를 쓰지만, 도메인 주소로는 빈(Wien)을 사용한다는 점도 괜히 재밌다. 지금 비엔나관광청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이런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성향 퀴즈 : 비엔나의 그레첼 중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레첼(Grätzel)은 관광객들이 주로 모여드는 링슈트라세를 벗어나, 로컬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작은 동네’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유명한 관광지보다 잠시나마 비엔나 현지인들의 생활과 가까이 머무르고 싶은 여행자라면 이 테스트를 해봐도 좋겠다. 취향에 맞는 동네를 추천하기 위해 제법 세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레첼들을 지나는 사이 거치게 되는 랜드마크, 혹은 아무리 현지인의 삶이 궁금하더라도 외면할 수 없는 필수 코스들은 여행에 ‘강약중간약’의 리듬감을 부여한다. 그렇게 다뉴브 운하 주변의 비엔나를 걸었다.

비엔나에서 걸을 때면 신호등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 묘사된 여러 커플의 모습에서 LGBT에 관한 이곳의 의식을 알 수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 주변의 풍경.


걸어서 하늘까지
고딕 양식이 돋보이는 성 슈테판 대성당은 제일 높은 탑 끝까지의 높이가 136.4m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하늘에 닿은 교회다. 이곳에서 다뉴브 운하 방향으로 여러 길을 부지런히 걷다 보면, 1447년에 개업한 전원풍의 레스토랑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이나 모차르트가 살았던 아파트 등등을 볼 수 있다. 슈베르트, 마크 트웨인 같은 인사들이 종종 방문했던 그리헨바이슬에는 마크 트웨인이 어느 날 벽에 서명한 이후 방문객들이 너도나도 흔적을 남기게 된 ‘마크 트웨인 룸’이 있다.
벽에 가득한 이름 중에는 물론 한국인의 이름도 보인다.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10년 동안 13번 이사를 했는데, 이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인물이 베토벤이다. 베토벤은 이 도시에 35년 살면서 총 68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의 예민함이 짐작된달까? 이런 재미난 일화를 비롯해, 평범해 보이는 독일 수도원 교회의 안뜰이 나름 역‘ 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라는 사실은 현지 워킹 투어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깨알 같은 정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가 교황의 대리인인 백작에게 대들었답니다. 그 일로 튜튼 기사단에서 쫓겨났죠.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난 사실이에요. 모차르트는 대주교와의 계약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곧잘 도발했다고 해요.” ‘레벨 투어 비엔나(Rebel Tours Vienna)’의 가이드가 들려준 말이다. 성 삼위일체 그리스정교회를 둘러싼 작은 골목들에서는,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아치 구조물을 발견할 것이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의 아치입니다. 그 시대 비엔나에서는 때때로 가벼운 지진이 났어요. 건물들 사이에 아치를 설치해 안정적으로 잡아준 거죠. 아치가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실래요? 요즘 우리는 폰을 보느라 자꾸 아래쪽을 바라보고 살잖아요. 일상에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사물을 꽤 놓치고 사는 걸지도 몰라요. 이젠 시야를 위쪽으로도 향해보세요.”
‘고개를 들고 살라’는 시적인 말을 곱씹으며 위를 향했다가,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곳은 프라터(Prater) 유원지 내에 있는 놀이공원이다. 이곳에는 70m 높이에서 추락시키는 롯데월드의 ‘자이로 드롭’보다 조금 더 높이, 85m 지점까지 향하는 ‘프리 폴 타워’(하늘에서 김밥 한 줄은 해치울 정도의 시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사람들의 긴장이 풀렸을 즈음 급추락시킨다), 117m 상공에서 빙빙 도는 공중그네인 ‘프라터 타워’(그네를 타고 시내 전망을 감상하기 좋다는 후기를 남긴 자들의 담력은 어느 정도일까?) 등이 있다. 자하 하디드가 건축한 건물이 있는 비엔나 경영경제대학 캠퍼스, 오피스 지구, 주민들이 쉬는 공원 등을 아우르는 프라터 유원지에서 놀이기구가 모여 있는 부근은 19세기 후반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곳이다. 그보다 수백 년 전부터 한마디로 이벤트의 중심지였던 이 자리는 유서 깊은 테마파크인 셈이다. 작은 규모로나마 과거사 자료를 보여주는 프라터 박물관이 놀이기구들과 가까이 자리하는데, 서커스 유랑극단이나 재주 많은 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의 모습에 관심 있다면 놓치기 아쉬운 코스다. 입장료라는 게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기구를 탈 때만 코인을 사도 되는 방식은 이 일대를 왜 유원지라고 불러도 좋은지 알게 해준다.

여름이면 시민들은 올드 다뉴브강의 공공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유대인의 터전에서 여유롭게 걷기
비엔나 지도를 보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으로 기억되는 다뉴브에 꽤 여러 이름이 있다. 다뉴브강, 뉴 다뉴브강, 올드 다뉴브강, 다뉴브 운하가 그렇다. 20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다뉴브강은 마치 혈관처럼 복잡한 물줄기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지금 이 강에 붙은 여러 이름은 도시를 정비하면서 그 지류들을 정리한 결과이자 흔적이다. 다뉴브 운하를 중심으로 한편에 성 슈테판 대성당과 슈테판 광장 등의 번화한 구역이 있다면, 건너편에는 유대인들의 생활 중심지, 카르멜리테르피르텔(Karmeliterviertel)이 있다. 이 구역의 핵심 장소인 카르멜리테르마르크트(카르멜리테르 마켓)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정육점과 상점을 비롯해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활기찬 장소이지만, 이 유대인 생활 구역은 분주한 시내와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 어느 골목길에서 검은 코트와 높은 모자를 착용한 남성이나 유대인 전통 복장을 맞춰 입은 일가족을 마주치기도 한다. 이방인에겐 색다른 순간이지만, 그들은 물론 자신들의 일상을 사는 중이다. 비교적 한가로운 기운 속에서 각종 숍을 둘러보는 시간은 여유로운 산책이 된다. 야외석을 갖춘 레스토랑이나 바가 유독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코셔(유대교의 식사 율법을 따른 음식) 상점들에서 적당히 낯선 메뉴를 먹거나, 맛 좋은 비건 초콜릿을 선보이는 돌체리아(Dulceria)에서 귀엽게 생긴 초콜릿을 먹어보는 것도 좋다. 이 구역을 빠져나올 즈음 마주치는 멋진 부티크, 송(Song)의 대표가 1980년대부터 비엔나에 정착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디자이너 송명일이 운영하는 이 편집숍에서는 그녀가 디자인한 의류뿐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공수한 라이프스타일 아이템, 간혹 넓은 숍 한켠에 마련한 전시까지 둘러볼 수 있다.

유대인 생활 중심지인 카르멜리테르피르텔 거리에서.

걷다가 뮤지엄으로

레오폴트 뮤지엄에 재현되어 있는 클림트 스튜디오와 대형 회화 ‘Death and Life’.

비엔나에는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그 수가 100여 개에 달한다. 예술품을 두루 소장한 미술관뿐 아니라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까지 있으니, 동선을 계획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특히 마니아가 많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에 관해서라면 세계 최대급 컬렉션을 갖춘 레오폴트 뮤지엄에서 긴 시간을 보낼 만하다. 그 두 화가뿐 아니라 ‘빈 분리파’를 이끈 주역들의 작품 역시 다채롭게 구비한 곳이다. 관람객들은 대개 유명한 작품 앞에 몰리기 마련이지만, 이를테면 클림트가 테스트 삼아 디자인을 스케치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명함이나 뮤즈인 에밀리 플뢰게에게 쓴 친필 편지,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 스타일을 갖추기 전에 작업한 고전풍의 초상화나 풍경화 작업 등을 보는 일은 더 흥미롭다. 다만 그 유명한 ‘키스’와 ‘유디트’는 레오폴트 뮤지엄이 아닌 벨베데레 궁전에 있다. 벨베데레 궁전에는 클림트가 말년에 채색 작업을 다 마치지 못해 스
케치 흔적이 노출된 상태의 작품도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미처 끝을 보지 못한 나의 미완성 작업이, 100년이 지나서도 매일 군중 앞에 공개될 운명이라는 걸 안다면 어떤 기분일까?

레오폴트 뮤지엄에 재현되어 있는 클림트 스튜디오와 대형 회화 ‘Death and Life’.

카를 광장에 위치한 빈 뮤지엄 카를스플라츠 본관은 약 4년간의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작년 연말 문을 열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장소인데, 그 규모와 다루는 범위가 상당하다. 미술이나 역사에 특별히 관심 없는 이도 흥미로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수년 만에 건물의 몸집까지 키워 재개관한 만큼 상설전에 꽤 공을 들인 기색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난다’는 메시지를 담은 듯한 재개관 캠페인 포스터부터 눈에 띈다. 오스트리아 예술사의 유명한 회화 일부분과 현재의 모델 이미지를 합성해 독특한 무드를 자아내는 포스터만 무려 10종이다. 상설전 <마이 히스토리>는 1,700점 이상의 유물, 이 도시와 사람들의 생활을 둘러싼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오브제들, 순수 미술은 물론 디자인 분야의 작업들까지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하게 구성했다. 리노베이션을 거치며 추가된 카페 테라스에서는 카를 성당의 돔이 코앞에 위치한,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키 큰 나무들이 늘어선 바깥 풍경을 보며 바람을 쐬다 보면 문득 알게 된다. 여행자들이 몰려들 만한 유럽 예술의 도시에서, 불쾌하게 어깨를 치며 지나가는 사람이나 지저분한 거리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레오폴트 뮤지엄과 현대미술관인 MUMOK 등을 비롯해 크고 작은 기관이 모여 있는 예술지구, 뮤제움스크바르티어. 광장에 놓인 벤치들이 누울 수 있게 디자인되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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