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 구찌의 런던

김현지

구찌의 창립 서사와 런던과의 관계성을 탐구한 사바토 데 사르노의 구찌 2025 크루즈 컬렉션.

크루즈 혹은 리조트 컬렉션은 말 그대로 휴양을 위한 기성복이다. 물론 현재는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됐지만, 여행이 중요한 코드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패션쇼가 열리는 지역의 특징이 곧 컬렉션의 테마가 되곤 한다. 구찌는 2025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일 장소로 영국 런던을 택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휴양지보다 도심 지역의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이 눈에 띄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구찌의 선택이 놀라운 이유는 무엇일까?

런던의 심장이자 현대미술의 메카, 테이트 모던에서 진행된 구찌 2025 크루즈 컬렉션.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 구찌가 영국에서 2025 크루즈 컬렉션을 공개했다는 사실은 사바토 데 사르노가 런던과 깊은 인연을 맺은 하우스의 역사를 탐구했음을 암시한다. “창의적인 방향성을 탐색하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공간으로 들어와 그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번 크루즈 쇼를 위해 런던을 선택했고, 그것이 옳은 선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환대와 경청의 자세로 많은 것을 보여줬으니까요. 하우스의 창립자 역시 이곳에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영감을 받았습니다. 런던은 구찌에게도 그러한 도시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의 말처럼 런던은 하우스 역사에도 꽤나 중요한 장소다. 1897년, 창립자 구찌오 구찌는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사보이 호텔에서 벨보이로 근무했다.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그는 호텔 투숙객의 러기지를 운반하며 엘리트들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피렌체로 돌아와 1921년에 구찌 하우스를 창립했다.

지난 5월 13일, 14시간의 비행 끝에 눈앞으로 펼쳐진 시각 정보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밀레니얼 브리지, 멀리서도 우뚝 솟은 형태가 한눈에 보이는 99m 높이의 굴뚝, 폐쇄된 화력발전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 영국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는 런던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현대미술의 메카, 테이트 모던 앞에 구찌 2025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서 있다는 이야기다. 2000년에 개관한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은 영국인에게 랜드마크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 해 평균 400만 명에 이르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런던의 인기 명소를 넘어 과거 도시에 전력을 공급하다 공해 문제로 문을 닫은 화력발전소를 원형은 보존한 채 리모델링한 곳으로 런던의 과거와 지금을 품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방향성을 탐색하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공간으로 들어와, 그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번 크루즈 쇼를 위해 런던을 선택했고, 그것이 옳은 선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환대와 경청의 자세로 많은 것을 보여줬으니까요. 하우스의 창립자 역시 이곳에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영감을 받았습니다. 런던은 구찌에게도 그러한 도시입니다.” –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

크루즈 컬렉션을 하우스의 역사가 시작된 도시에서 공개한 사바토 데 사르노는 장소 선정뿐만 아니라 패션쇼 연출에서도 그 의도를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는 ‘이분법(Dichotomies)’을 핵심 키워드로 인간과 자연, 서정성과 미니멀함 같은 대립하는 듯한 가치의 포용을 통해 런던의 두 가지 측면과 인생의 양면성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테이트 모던을 쇼장으로 선택한 사바토 데 사르노는 그의 바람대로 터빈홀 입구의 대형 오일 탱크를 개조해 만든 더 탱크스(The Tanks)를 시적인 분위기로 가득 메웠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이어진 공간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내 마치 동굴처럼 어두웠고, 1만여 종의 다채로운 식물로 가득했으며, 쇼장의 가장 어두운 바닥에는 시인이자 작곡가인 무스타파 더 포엣의 곡 ‘Stay Alive’의 한 구절이 자리하고 있었다. 쇼가 시작되자 조명이 켜지고 비로소 사바토 데 사르노가 그려낸 54벌의 룩이 초록빛 파노라마 아래 펼쳐졌다. 이번 2025 크루즈 컬렉션은 사바토 데 사르노가 런던에서 경험한 다양한 장소와 사람, 이를 통해 얻은 창의성 같은 개인적 감상에 하우스의 유산을 더해, 구찌와 런던의 특별한 연결 고리를 강조한 컬렉션이다. 자수, 테일러링, 가죽 세공 등을 바탕으로 엄격함과 화려함, 섬세함에 담긴 강인함, 영국적인 것에 담긴 이탈리안 정신을 드러내는 피스들이 차례로 공개됐는데, 무엇보다도 새로운 실루엣의 액세서리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 구찌 앙코라 여성 및 남성 패션쇼에서 플랫폼 스타일의 로
퍼를 출시한 데 이어, 이번 크루즈 컬렉션에는 상징적인 홀스빗 디테일을 발레리나 슈즈에 접목한 홀스빗 발레리나 (Horsebit Ballerina) 슈즈를 선보였고, 1970년대 초반의 엠블럼이었던 인터로킹 G를 재해석한 구찌 블론디(Gucci Blondie) 백을 다양한 소재와 크기로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레디투웨어 역시 하우스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를 써 내려갔다. 인상적인 점은 소재, 디테일, 색감, 질감, 그리고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상당히 방대했다는 것. 1970년대 헤리티지를 느낄 수 있는 스웨이드 재킷을 시작으로 테크니컬 개버딘 소재로 정밀하게 재단한 다양한 실루엣의 코트가 눈에 띄었고, 이는 다시 카모마일 플로라 모티프를 담은 스타일로 등장했다. 플로라 모티프는 3D 레이저 커팅 오간자와 시퀸으로 수작업해 스커트나 슬립 드레스에 적용되기도 했다. 뒤이어 워크웨어와 스트리트 스타일, 살롱 스타일이 융합된 의상이 등장했으며, 섬세한 비즈 프린지 자수로 제작한 그래픽적인 셰이프의 타탄 체크가 적용된 코트와 스커트, 드레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스타일의 발레리나 슈즈가 등장했는데, 하우스의 승마 세계에 경의를 표하는 홀스빗 모티프를 담은 디자인이 특히 주목할 만했다. 또한 하우스 아카이브 중 하나인 랍스터-클래스프(Lobster-clasp)를 우아한 진주 목걸이로 재해석하는 등 컬렉션에 신선한 무드를 더하는 다양한 스타일의 액세서리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번 시즌 크루즈 컬렉션을 런던에서 공개한 것은 서로 대비되는 것들을 하나로 모아, 이들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구찌의 창의성,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하우스의 열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테이트 모던은 런던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

시적인 분위기를 더한 테이트 모던의 나선형 계단.


사바토 데 사르노는 “이번 시즌 크루즈 컬렉션을 런던에서 공개한 것은 서로 대비되는 것들을 하나로 모아, 이들이 공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구찌의 창의성,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하우스의 열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테이트 모던은 런던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입니다”라고 말하며, 이번 컬렉션은 이분법(Dichotomies)에 관한 것임을 상기하고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겼다.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