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바카렐로가 만든 생 로랑 프로덕션이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거둔 성과는 시작에 불과하다.
영화와 패션은 지난 20세기 내내, 그리고 새로운 세기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만들어온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생 로랑과 영화의 만남은 1967년 <안달루시아의 개>로 데뷔한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세브린느>의 영화 의상을 이브 생 로랑이 맡으며 시작되었다. 부르 주아의 이중성과 나약한 내면을 비판한 작품으로 여주인공 카트린 드뇌브의 고급스럽지만 퇴폐적인 이미지를 이브 생 로랑의 터치로 완성했다. 이처럼 디자이너들은 영화감독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독보적인 창의성을 공유하고 발휘해왔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저에게 영감을 준 훌륭한 영화인들과 함께 일하는 의미 있는 채널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바카렐로는 영화감독과의 협업을 통한 창의성의 교류로 만족하지 않고, 2023년 패션 브랜드로는 최초로 필름 프로덕션을 창설한 것. 이로써 생 로랑은 필름 프로덕션을 보유한 첫 번째 럭셔리 하우스가 되었다.
안토니 바카렐로가 이끄는 프로덕션은 브랜드 미래를 보다 혁신적으로 이끌고 컬렉션의 폭넓은 영화적 감성과 뉘앙스를 강조하려는 그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 그 열매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가 제76회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공개된 바 있다. “나는 페드로의 영화에 나오는 강인한 동시에 연약한 여성 캐릭터에 매혹된다.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의 남성 캐릭터들 역시 대단히 복합적이다.” 안토니 바카렐로의 말처럼 31분의 짧은 퀴어 서부 영화는 배우 에단 호크, 페드로 파스칼이 주연을 맡아 섬세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한편 올해 생 로랑 프로덕션은 지난해보다 더 많은 작품을 공개한다. 2024년 제77회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총 세 편의 장편영화가 올랐는데,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스(Emilia Perez)>,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더 슈라우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신작 <파르테노페(Parthenope)>가 그것이다. 수상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지는 않지만,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스>는 두 개의 상을 거머쥐는 성과를 거뒀다. 조 샐다나(Zoe Saldana), 셀레나 고메즈 (Selena Gomez), 아드리아나 파스(Adriana Paz)가 베스트 액트리스 앙상블 상을,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Karla Sofía Gascón)은 심사위원상(Jury Prize)을 받았다.
자크 오디아르(Jacques Audiard) 감독
<에밀리아 페레스(Emilia Perez)>
나무랄 것 없는 능력에도 저평가된 리타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정의 실현보다는 범죄자의 혐의를 벗겨주는 일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그러던 어느 날, 카르텔의 보스 마니타스가 그녀를 고용하고, 자신이 조직에서 은퇴하고 나면 수년간 비밀리에 준비해온 계획, 즉 늘 꿈꿔온 ‘여성이 되려는’ 계획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리타는 뜻밖의 기회를 얻게 된다. 9월 25일 프랑스 개봉 예정.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 감독
<파르테노페(Parthenope)>
1970년생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은 제28회 유럽 영화상과 제50회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관객상)에서 수상한 <유스(Youth)>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파르테노페>는 1950년에 태어난 파르테노페의 삶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영웅적인 여성은 없지만 여성주의적 서사를 통해 자유, 나폴리, 그리고 진솔하거나 무의미하거나, 모든 사랑의 얼굴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갈망을 그린다. 나폴리 인근 카프리의 완벽한 여름, 젊음의 발랄함이 갑작스럽게 끝나버린 후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고, 환멸과 생기를 경험하는 나폴리 남녀들의 멜랑콜리의 파도, 비극적인 아이러니와 낙담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흐른다. 영화 속 삶은 평범한 것이든 강렬한 것이든 아주 길게 느껴지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나폴리는 손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너무나 먼, 행복의 웃음과 상처가 공존하는 황홀하고 마법 같은 도시로 그려진다. 다리오 아이타(Dario Aita), 셀레스트 달라 포르타(Celeste Dalla Porta), 실비아 데그란디(Silvia Degrandi)가 출연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감독
<더 슈라우드(The Shrouds)>
194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다양한 필모그래피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2014년 줄리앤 무어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맵 투더 스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 <더 슈라우드>는 50세의 유능한 사업가 카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에 잠긴 그는 산 자들이 수의를 입은 채 고인을 지켜볼 수 있는 혁신적이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술, 그레이브테크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밤, 카쉬의 아내 무덤을 포함, 수많은 무덤이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카쉬는 범인을 추적하기로 한다. 뱅상 카셀(Vincent Cassel), 다이앤 크루거(Diane Kruger),
가이 피어스(Guy Pearce), 샌드린 홀트(Sandrine Holt)가 열연한다. 9월 25일 프랑스에서 개봉 예정.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과 나눈 이야기
세르주 그륀베르크 수의(Shroud)란 시신을 세상의 눈으로부터 가려주기 위해 입히는 베일이다. 그러나 당신의 영화에서는 반대로 수의가 디지털카메라이고, 시신이 무덤 속에서 썩어가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어에서 ‘shroud’라는 단어는 수의라는 뜻이지만 다른 뜻도 있다. ‘가리다’, ‘숨기다’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장례 의식은 죽음의 현실과 시신에게 일어나는 일의 현실을 피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수의의 일반적 기능을 뒤집어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수의는 가리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나는 7년 전, 내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 기술적인 작업이 아니라 감정적 작업이었기에, 나에게는 긴 인간 탐색의 시간이었다.
슈라우드가 영화(Cinema)를 은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나?
주인공이 발명한 슈라우드는 영화적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자신만의 시네마, 즉 사후의 시네마, 부패의 시네마를 함축한다. 각본을 쓰기 전부터 나는 슈라우드에는 영화적인 면이 있음을, 자신만의 이상한 무덤의 시네마, 묘지의 시네마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깨달았다. 카쉬는 자신의 작품 에 영화적 기술이, 무언가 풍부하고 복잡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정말 흥미로운데, 나는 죽은 사람을 보기 위해 종종 영화를 보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다시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따라서 영화란 어떤 면에서 수의를 걸친 사후의 기계장치인 셈이다. 영화란 어찌 보면 묘지와도 같다.
주인공 카쉬는 죽음 자체와 정면으로 대비되는 묘지를 발명한 것 같다. 육신은 죽지 않고 운명을 이어가고, 카쉬는 마치 아내가 죽지 않은 듯, 그와 그녀의 이상한 관계가 육신이 썩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후세계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카쉬나 나처럼 무신론자라면, 관계는 이어지지만 좀 더 현실적인,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계속된다. 다른 형태의 관계인 것이다. 카쉬가 말하듯, 그는 그녀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인
지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이 관계는 지속되지만, 대화를 통해서는 아니다. 비뚤어지고, 병적이고 그로테스크하지만, 카쉬처럼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도 않다.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건강한 것이다. 카쉬는 말 그대로 여기에 많은 것을 걸었다. 그는 이 최첨단 묘지에 상당한 돈과 에너지를 투자했다. 하지만 나의 다른 영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결국 중요한 것은 육신이다. “육신은 현실”이며, 이를 받아들인다면, 죽은 이의 육신은 계속해서 일종의 현실로 남는 것이고, 카쉬는 그 현실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죽음 후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
죽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살아 있는 다른 사람, 예컨대 아이들에게 투영한다. 우리는 과거에 알았던 죽은 이들의 메아리를 보곤 한다. 이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DNA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기에 생물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며 지적인 흥미를 자극할 뿐이다. 꿈의 시퀀스에 존재하기도 한다.
당신의 시각은 흥미롭게도 낙관적이다. 현실적이든, 초현실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강력한 관계에는 미래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 절망적이었다면 주인공은 자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는 유머의 요소도 많다. 마치 삶처럼.
사실 ‘로맨틱 코미디’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상상이 잘 안된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된 것을 본다면 정말 즐거울 것 같다.
배우들, 특히 다이앤 크루거(1인 3역: 두 자매와 아바타 역)와 뱅상 카셀 덕에 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긴다.
캐스팅에 대해 오해하거나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인다. 캐스팅이 영화를 망칠 수도, 반대로 영화의 격을 한층 올려줄 수도 있다. 캐스팅은 시나리오의 필수적인 근간을 이룬다. 감독을 천재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웃음). 이번 영화에서 배우들은 내가 각본에 쓴 것 이상을 보여줬기 때문에 촬영 현장이 정말 흥미롭고 즐거웠다.
당신이 그 장르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이 영화를 스파이 스릴러로 봐도 괜찮은가?
영화의 환상적인 가정들은 사실 슬픔과 애도, 고통의 편집증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았기에 잘 안다. 이상하게도 누군가 죽으면, 고통 속에서 고개를 드는 의심의 요소가 언제나 있다. 그 치료 방법이 최선이었는지, 병원 직원들이 환자를 정말 잘 돌보았는지, 그 약이 가장 좋은 것이었는지 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나는 영화로 이 편집증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할 때 피할 수 없는 이 음모론을 다룬 것이다. 40~50년대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숙청과 사형의 구실로 사용된 유대인 의사들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이 영화에 국제적 요소도 들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설명이 없음을 힘들어한다. 마치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진짜 플롯이 아니지만, 죄책감이 너무나 커서 우리는 우연이나 사고를 견디지 못한다. 탓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죽음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두렵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실존주의적으로 설명한다. 신이, 또는 외계인이 죽음을 보낸 것이 아니라면, 사람에 의한 죽음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가 중국의 음모로 죽었다면, 이상하지만 그 죽음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의미 없음에 대한 두려움, 어떻게든 개연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만들어낸 음모 신드롬을 영화에서 탐구하고자 했다. 음모는 또한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무언가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당신은 현대적 기술과 과학을 작품의 중심에 두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당신 이전의 환상 영화에서는 과학이란 죽음을 초래하는,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당신은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두 번째 영화에서 발명한 기술은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바로 줄기세포 치료다. 기술이란 외계에서 생겨나 우리를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 우리 자신이다.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천사이자 악마이듯, 기술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모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나에게 인간의 상태를 탐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기술의 탐구를 의미했다.
언젠가 호모 테크놀로지쿠스, 즉 인간의 신체에 결합하여 우리의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정교한 기계에 관한 영화를 만들 계획이 있는가?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수술을 통해 삽입한 플라스틱 렌즈를 통해 당신을 보고 있고, 아주 파워풀한 컴퓨터인 보청기를 통해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이런 대단히 정교한 인공 기관들이 없다면 내 영화감독 경
력도 끝났을 것이다. 나 스스로가 생체 공학적인 삶을 오래 살아왔으며, 따라서 나는 현대 기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감탄하고 열광하는 편이다. 물론 자본주의, 이러한 혁신을 통해 자본주의가 얼마나 이득을 보느냐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내 영화들은 한편으로는 물론 공상과학이지만, 기술을 무엇보다 인간이란 존재의 상상력의 표현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