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에 진심인 남자, 킬리안 헤네시를 만났다

이현정

여전히 향수에 진심인 남자, 킬리안 헤네시와 더블유가 나눈 익스클루시브 인터뷰.

나는 아직도 킬리안의 향수를 처음 만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창 국내에 향수 편집숍 오픈 붐이 불던 10여 년 전, 향에 조예가 깊은 한 편집숍의 대표가 인터뷰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향수라며 가지고 나왔다. 미끈하고 군더더기 없는 블랙 직사각형 유리 보틀, 그 차갑고 럭셔리한 촉감, 뿌리자마자 풍겨나오는 믿을 수 없이 깊고 관능적인 향기. 바로 킬리안의 ‘스트레이트 투 헤븐 화이트 크리스탈’이었다. 섹시하지만 천박하지 않았고,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강렬하면서도 우아함이 느껴지는 향이었다. 지금이야 오우드나 다크럼, 머스크, 앰버 같은 묵직한 향조가 많이 출시되고 있지만(물론 여전히 대중적이지는 않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향이었고, 향을 맡는 순간 진짜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듯했다. 예술이 마치 그러하듯이, 향기 역시 단숨에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데려갔다. 언어를 사용해 설명하지 않아도 이 향수를 뿌리는 사람에게 어떤 면모가 있는지, 그 내면의 한 조각이 스르르 보였달까.

지난 4월 25일 저녁 킬리안 파리의 파티가 열린 페어몬트 앰배서더 서울의 마리 포사 바.


바로 그 킬리안 파리의 창립자, 킬리안 헤네시(Kilian Hennessy)가 한국에 왔다. 이제 그를 헤네시 가문의 5대손 금수저로 소개하는 것은 철 지난 얘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루이 비통의 수석 조향사가 된 자크 카발리를 사사하고, 디올부터 알렉산더 맥퀸,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 향수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뒤,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해 독보적이고 유니크한 향수 브랜드로 성장시킨 조향사이자 사업가, 여전히 향수에 관한 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한 사람이라고 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한 영역에 조예가 깊고 정통한 이를 만나는 건 언제나 설레고 즐거운 일. <더블유 코리아>가 4월, 한국을 방문한 그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울에서 열린 킬리안 파리 파티장에서 브랜드의 모토인 ‘돈 비 샤이(Don’t be Shy)’ 월 앞에서 포즈를 취한, 킬리안 헤네시.

<W Korea> 공식적으로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다. 일정이 촘촘해 몹시 바쁘게 보냈을 것 같은데.
킬리안(Kilian) 이틀 전에 도착해서 첫날 스트레이 키즈 현진과 만났고, 어제는 마켓 서치를 다니고 팝업 스토어 오픈 행사에도 참석했다. 뭔가 즐길 시간은 별로 없었는데, 어제 밍글스라는 2스타 미슐랭 레스토랑에서의 한식 디너가 아주 근사했다.팝업 행사장에서 사람들이 당신과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 선 것을 봤다. 가끔 향수를 만들어 파는 것보다, 사진 찍어주는 것으로 돈을 더 잘 벌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웃음).


2007년 론칭한 킬리안 파리가 벌써 17년 차 브랜드가 되고, 한국에만 공식 매장을 4개나 운영하고 있다. 이런 성장을 예상했나?
이 정도로 성장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 유럽 전역에서 특히 크게 성장했는데, 예상보다 글로벌한 성공을 빨리 거둔 셈이다. 한국은 아직 할 일이 더 많다고 느끼지만, 향후 3년 안에 한국 시장에서도 더 단단하고 안정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거다.


지금 한국은 킬리안 파리에 어떤 시장인가?
한국은 전 세계 향수 마켓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큰 시장이다. 킬리안 파리는 이제 막 이곳에 발을 내디딘 거다. 그래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제약 없이 우리만의 규칙으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든 것을 담아낸 멋진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고객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킬리안 파리 향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스트레이트 투 헤븐 화이트 크리스탈’을 통해 강렬하게 형성됐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당신이 ‘앤젤스 쉐어’와 함께 그 두 향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기사를 보고 반가웠다.
둘 다 내게는 특별히 애착이 가는 향수다. ‘엔젤스 쉐어’는 어린 시절 헤네시 코냑 셀러에서 시간을 보내던 기억을 소환하기 때문이고, ‘스트레이트 투 헤븐’은 2007년 내 이름을 건 브랜드로 처음 선보인 6개의 향수 중 하나라 그렇다. 그때 이 제품을 통해 향수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킬리안 파리가 향에 진정성 있는 브랜드라는 신뢰를 얻게 되었다.

킬리안 파리의 대표 라인, 리쿼 컬렉션 등이 전시된 파티장 모습. 코냑 잔을 연상시키는 ‘앤젤스 쉐어’가 디스플레이되었다.


재스민 그린 티 향의 ‘임페리얼 티’가 이달 새롭게 론칭했다. 어떤 향수인지 설명해달라.
이 향수에 대해 말하기 전에, 향수의 세계에서 흔히 맡는 차향은 실제 티를 우려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얘기해두는 것이 좋겠다. 타바코 향이라고 해서 실제 담배 원료가 들어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킬리안 파리의 대표 조향사, 칼리스 베커와 나는 차 본연의 향을 찾아내고 싶었다. 찻잎 향의 구조를 연구해보면 베르가모트, 아이스 민트, 마테 앱솔루트 등 여러 가지 향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티 어코드라 부른다. 정말 차는 아니지만 차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인데, 피라진(Pyrazine)이라는 재료 덕분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린 티 향을 재현할 수 있었다. 그린 티 자체는 살짝 씁쓸하기 때문에 재스민 앱솔루트와 블렌딩했고, 재스민은 역사적으로 중국 황실에서 즐기던 것이라 ‘임페리얼 티’라고 이름 지었다.


개발 과정 중에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앞에 얘기한 피라진이 굉장히 파워풀한 성분이라 이를 어떻게 블렌딩할 것이냐가 가장 어려웠다. 보통은 0.1% 알코올 농도로 희석해야 하고, 희석하는 과정도 상당히 천천히 진행되는데, 우리는 5% 정도 농도로 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칼리스 베커와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하다. 당신이 원하는 콘셉트와 향에 대해 얘기하면 그녀가 구현해내는 것인가?
그때그때 약간씩 다르다. 가령 ‘러브, 돈 비 샤이’ 같은 향수를 개발할 때, 나는 구름의 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기존의 향과는 다른, 킬리안만의 파촐리 향을 만들고 싶다는 고민도 있었고. 그때 칼리스가 마시멜로를 사용한 레시피를 보고 이를 향수에 적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자기 할머니의 레시피와 접목해 5가지 재료를 뽑아 내게 보내줬다. 매우 흥미로웠고 거기서 아이디어가 발전해 일반적인 구르망 향수와는 다른 향이 완성됐다. 한국에서 상당히 성공을 거둔 ‘문라이트 인 헤븐’의 경우, 내가 방콕에 여행 갔을 때 먹은 디저트에서 시작했다. 스티키 라이스와 코코넛 밀크, 망고 아이스크림이 같이 나왔는데, 이를 향수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칼리스에게 바로 연락했다. 망고나 코코넛은 시중에 이미 많은 향료가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지만, 라이스 어코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거기서부터 계획이 다시 수립됐고… 뭐 그런 식이다.


지난달 현진과 킬리안 화보 촬영을 했을 때, 그도 현장에서 ‘문라이트 인 헤븐’을 가장 마음에 드는 향수로 꼽았다. 다가가기 쉬운 시트러스 향인 동시에 미묘하게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향이랄까. 이는 킬리안 파리 향수의 특징인데, 따로 비결이 있나?
좋은 향수를 만들어내려면 여러 가지 질적 요소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과제 중에 첫 번째는 유니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시중에 나와 있는 향을 카피해서는 전혀 창의적인 향을 만들 수 없다. 물론 좀 저렴한 재료로도 창의적이고 특별한 향수를 만들 수 있기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시장을 잘 이해해야 하고,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도 잘 파악해야 한다. 알렉산더 맥퀸이 ‘우리가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규칙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얘기했듯이 향수에 들어 있는 예술가 정신이며 장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보통 조향사들은 3,000가지 향료를 가지고 플레이하는데, 기존 향수의 구조부터 콤비네이션까지 모든 규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남과 다른 유니크한 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럭셔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근사한 재료로 구현할 수 있다. 앞에 말한 ‘문라이트 인 헤븐’의 경우, 망고나 코코넛은 전혀 비싼 재료가 아니지만, 그레이프프루트나 재스민 삼박, 통카빈, 샌들우드 에센스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중 최상급이 들어가면 향이 럭셔리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런 향료를 사용하려면 많은 투자와 연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이게 일종의 방어벽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킬리안 파리 향수를 카피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려면 우리가 사용한 그 비싼 원료가 있어야 하니까.


킬리안 파리는 한국에 니치 향수로 유명했는데,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예전에 너무 비싸서 아무나 못 사는 향수였지만, 요즘 백화점에 가면 30만~40만원대 향수가 흔하게 보인다. 니치가 니치가 아니게 되고, 럭셔리의 희소성이 줄어든 요즘의 향수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지금 시장 자체가 혼란스러운 환경인 건 맞는 것 같다. 워낙 새로운 브랜드가 많이 출현하고 있고, 한 브랜드에서도 매우 다양한 향이 나오고 있어 무척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나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향수에 대해 정말 잘 이해하고 전문적으로 지식과 애정을 가진 이들은 남을 것이고, 재미 삼아 만든 브랜드들은 몇 년 못 가 사라지지 않을까? 시간이 답이다.


근데 오늘 아침에는 어떤 향수를 뿌렸나? 당신이 이곳에 들어섰을 때 정말 좋은 향기가 났다. 당신만의 향수 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여행할 때는 향수를 어떻게 챙기는지도 궁금하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만의 센트 워드로브(Scent Wardrobe)를 갖고 있다. 보통 오늘 입은 옷 스타일, 기분,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따라 고르는 향수가 달라진다. 여행할 때는 트래블 스프레이 두 가지는 꼭 챙기는데, ‘엔젤스 쉐어’가 필수고, 어느 국가에 가는지에 따라 그 마켓에 맞는 향수 하나를 더 고른다. 그래서 한국에 올 때는 ‘문라이트 인 헤븐’을 챙겨 왔다. 요즘 작업 중인 향료들을 갖고 다니며 테스트도 하는 편인데, 오늘 아침엔 ‘세이크리드 우드’의 두 가지 다른 퓨어 퍼퓸 버전을 양 손에 한 번씩 스프레이 해서 그 향이 한데 섞여 났을 것 같다.


지금까지 당신의 이력을 보면 이 모든 것은 후각 예술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된 것 같다. 향을 만드는 것이 여전히 즐거운가? 열정이 없었다면 아마 금방 그만뒀겠지. 향을 하나 만드는 것 자체가 아주 오래 걸리는 작업이고,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어떻게 배합할지 등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열정 없이는 재미있는 향수도 탄생하지 않을 거다.

Kilian Paris 임페리얼 티
중국의 유서 깊은 전통 차, 재스민 그린 티에서 영감 받아 탄생한 향수. 재스민 삼박 앱솔루트를 품은 그린 티 어코드를 중심으로 베티베르, 머스크, 베르가모트, 라미나리아 해조류의 향기가 순수하고 기품 있는 향기를 완성한다.
50ml, 34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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