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K-하이틴’, 넷플릭스 시리즈 <하이라키>.
6월 공개되는 넷플릭스 시리즈 <하이라키>는 철저한 계층 구조가 존재하는 명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하이틴물은 하이틴물이되 계층을 경유해 학교를, 나아가 우리가 사는 사회를 말하는 작품. 여기에 배우 노정의, 이채민, 지혜원, 이원정은 저마다 사연과 비밀을 품은 열여덟 청춘으로 등장한다. 마치 이들이 은밀히 나선 방과후 모임처럼, 네 얼굴이 <더블유> 카메라 앞에 섰다.
지금 드라마계에서 떠오르는 가장 신선한 얼굴을 그러모은 작품이 있다면, 그건 바로 6월 공개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하이라키>일 거다. 노정의, 이채민, 김재원, 지혜원, 이원정까지. 1998~2001년생의 다섯 청춘이 집합한 작품은 어쩌면 우리가 학원물에 기대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하이라키>를 단순히 ‘학원물’이라는 틀에 가둬놓기엔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다. 조직이나 집단의 계층 구조를 뜻하는 ‘하이라키’를 제목으로 사용한 이번 작품은 철저한 계급도가 존재하는 명문 사학 ‘주신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0.01%의 소수가 질서이자 법으로 군림하는 이곳에 비밀을 품은 전학생이 입학하며 견고하기만 했던 그들의 세계에 균열이 생겨가는 이야기. 서사가 진행될수록 먹이사슬과도 같은 인물 간의 관계는 묘연해지면서 거대한 갈등의 소용돌이가 펼쳐진다. ‘하이틴 스캔들’을 표방하는 만큼 <하이라키>는 열여덟 청춘이 통과하는 어떤 싱그러움에만 주목하진 않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층’이 강조된 만큼 이번 작품에서 학교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학교 혹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사이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계층이 존재하고, 각 계층마다 희비가 존재하며, 계층 간의 어우러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스캔들이 작품에 그려진다. 카메라는 학교 안과 밖 모두 담아내고, 어린아이와 성인의 경계에 있는 청춘들은 성장통을 겪으며 앞으로 질주한다. 한편 사랑, 우정, 복수, 연민이 뒤엉킨 이야기는 뚜렷한 개성과 사연을 가진 캐릭터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재벌 그룹의 장녀로 주신고에서 ‘퀸’으로 통하는 ‘정재이’(노정의), 남모를 비밀을 품고 학교에 입성하는 전학생 ‘강하’(이채민), ‘폭군’이라 불리며 주신고 서열 1위 자리를 꿰차고 있는 ‘김리안’(김재원), 굴지의 무역회사 막내딸로 호시탐탐 ‘퀸’의 자리를 노리는 질투의 화신 ‘윤헤라’(지혜원), 유력 정치인 가문의 아들로 반전을 품고 있는 ‘이우진’(이원정)까지. 어딘가에서 본 듯, 또 낯선 사연과 반전을 가진 인물들은 지금 ‘차세대’로 통하는 다섯 배우의 연기를 입고 세상에 나왔다. 장르물의 홍수 속에서도 어쩐지 쉽게 찾아볼 수 없던 ‘K-하이틴’이 이제 막을 올린다.
이채민
<W Korea> <하이라키>를 연출한 배현진 감독과는 2022년 tvN <환혼: 빛과 그림자>로 만난 적이 있죠?
이채민 네. <환혼: 빛과 그림자>에서 ‘상인 3’ 역할로 짧게 출연했어요. 1회에서 술을 빚을 물을 받으러 창고에 들어갔다가 고윤정 배우와 마주치는 역할이었는데, 촬영 분량도 2~3회 차로 굉장히 짧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 감독님이 다음 작품에서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귀띔해주셨는데 정말 <하이라키>로 재회할 줄은 몰랐죠. 제 어떤 모습을 좋게 봐주셔서 또다시 함께하나 의문이 들면서도 적어도 〈환혼: 빛과 그림자> 때와 비교해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하이라키>에서 연기한 ‘강하’는 서사의 열쇠를 쥔 인물이에요. 철저한 계층 구조에 따라 굴러가던 주신고가 전학생 ‘강하’의 등장으로 서서히 균열이 생기죠. 2022년 tvN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 2023년 tvN <일 타 스캔들> 등에서 주인공의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면, 이번 작품에선 서사를 주도하는 ‘키 맨’이에요.
배현진 감독님과 재회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데뷔 이후 처음으로 극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돼서 더 뜻깊은 것 같
아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부족한 모습은 역시나 또 보이더라고요. 무게나 책임도 느꼈지만 더,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그보다 컸던 것 같고요. <하이라키>는 어떤 원동력이 되어준 작품이죠.
캐릭터의 밑그림을 그려갈 때 집중한 키워드가 있었나요?
‘직진’이요. ‘강하’는 주신고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멈추지 않고 앞으로 직진하는 인물이에요. 그러면서 견고했던 학교의 질서와 그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사수하려고 애쓰는 인물을 격파해가고요. 실행력이 남다른 인물이죠. 남 눈치 보는 성격도 아니고요.
학창 시절의 자신과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있나요?
설마요! 저는 ‘댕댕이’ 그 자체였습니다(웃음). 웃음도 많고 장난기도 가득했어요. 무엇보다 평화주의자로서 친구들과 다투지도 않았고요. 문제가 있으면 몸으로 부딪치기보다 말로 잘 해결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강하’가 세상을 사는 방식을 보며 새로 알게 된 것도 있어요?
사실 ‘강하’는 저에게 없는 모습을 많이 가진 인물이에요. 특히 깡다구 있게 밀어붙이는 면모가 그래요. 저는 평소 생각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래서 ‘강하’가 짓던 눈빛에서 뭔가를 새롭게 길어오게 된 것 같아요.
배우 노정의가 연기한 주신고의 ‘퀸’인 ‘정재이’ 앞에선 직진만 하던 ‘강하’가 어쩐지 뒷걸음질을 치기도 하죠. 노정의와 호흡하는 신이 많았을 듯한데, 가까이서 지켜보며 어떤 배우라는 인상이 스치던가요?
이번에 정의를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굉장히 영리한 배우예요. 동료 배우들을 살뜰히 챙기면서도 자기 것을 확실히 하는 스타일이에요. 상황 판단도 빠르고요. 카메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굉장히 똑똑해요.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의를 통해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저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요. 무엇보다 좋은 배우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고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내뿜는 건 정의만의 매력이자 힘인 것 같아요.
계속해서 연기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호기심이 늘 저를 연기로 이끄는 것 같아요. 본래 저는 호기심이 생기는 대상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사람이거든요. 도전 앞에서 자주 망설이는 스타일이고요. 그런데 여러 캐릭터를 만나면서 ‘얘는 뭘까?’ 하며 호기심이 자극됐어요.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를 보게 되고, 연기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나의 말투, 표정, 눈빛을 발견하고, 그게 최종적으로 카메라를 통해 비춰진 모습을 보는 과정 하나하나가 저에게 흥미를 주는 것 같아요. 사실 학창 시절엔 지극히 현실에만 사는 사람이었거든요. 상상도 잘 안 하는 스타일이었고요. 그래서 요즘엔 모니터링할 때마다 ‘내가 좀 변했구나’ 싶어요.
최근 본인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머릿속에 ‘타인’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요. 원래 저는 저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나’가 제일 중요해서 시야
가 무척 좁았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고, 배역을 연구하려면 무엇보다 타인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잖아요. ‘좋은 애티튜드를 갖춘 배우’라는 평가도 결국엔 얼마나 상대 배우와 주변 스태프를 세심하게 챙기느냐에 따라 내려질 테고요. 그래서 요즘 들어선 타인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어요. 저에겐 아주 큰 변화예요.
이채민의 비밀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최근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김치찌개도 직접 끓여 먹었고요(웃음). 요즘처럼 빠릿빠릿 부지런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자립이라는 게, 혼자서 하루를 책임지면서 살아간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주변 환경에
따라 또 달라지는 저를 보면서, 나 스스로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도 잘 돌아보며 사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이에요.
노정의
<W Korea>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새로운 얼굴을 제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해요. 특히 SBS <그 해 우리는>에서 연기한 인기 아이돌 ‘엔제이’와 넷플릭스 영화 <황야>에서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아남은 10대 소녀 ‘하수나’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죠.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곧 공개하는 <하이라키>는 훗날 어떤 의미로 새겨질까요?
노정의 뭐랄까, 20대 초반의 가장 큰 추억으로 남을 작품 같아요. 전부 또래 배우였잖아요. 선후배랄 것 없이 정말 학교 다니는 느낌으로 촬영했어요. 오래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던 동료들이었어요. 또 이런 것들을 떠나서 지금 나이이기에 풍기는 풋풋함이 고스란히 담기기도 한 듯해요. 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커요. 이번 작품은 ‘하이틴 스캔들’을 표방하는데 데뷔 이후 처음으로 시도하는 장르였어요. 그래서 더 반가우면서도 걱정도 앞섰는데, 어쨌든 저 혼자 해나가는 게 아니니까요. 친구들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노정의의 언어로 다시 쓰는 <하이라키>는 어떤 작품일까요?
결국엔 성장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십대로서 성장해가는 단계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시기와 질투가 담겼어요. 그건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나이대에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고요. 이런 감정선이 드라마적으로 무척 탁월하게 표현된 작품이에요. 또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아픔이 얼마나 다른지, 그 크기엔 어떤 차이가 있고, 그로 인한 상처가 아무는 방법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지를 제시해요. 아마 끝까지 시리즈를 보다 보면 ‘아, 이걸 얘기하고자 했구나’가 보일 거예요.
이번 작품에서 만난 ‘정재이’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재벌 그룹의 장녀이자 주신고에서 ‘퀸’으로 통하죠. 고슴도치, 선인장을 키워드로 캐릭터의 밑그림을 그려갔어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돋우지만 실은 누구보다 연약하고 정이 많은 인물이거든요. ‘정재이’가 가진 아픔이 대번에 읽히지 않게하기 위해 어떤 밸런스를 특히 신경썼던 것 같아요. 남몰래 간직한 아픔으로 인물이 행하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나쁘다로 비치고 또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되게끔 그 중간을 찾으려고 고민했죠.
한 작품은 곧 하나의 레슨이기도 하잖아요. 이번 작품으로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있어요?
이번 작품으로 비로소 감독님과 소통하는 과정을 덜 무서워하게 된 것 같아요. 워낙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잖아요. 저에게 감독님은 늘 어른의 존재였어요. 궁금한 게 있어도 수천 번 고민해서 질문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들으면 어쩌지, 내가 틀렸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마냥 조심스럽던 나이를 지나 이제는 감독님과 소통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아요. 물론 감독님마다 성향도 다르고 그래서 소통 방식도 다르겠지만, 이제는 두려움만 앞서기보단 나도 함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전작 <황야>의 경우 특히 감독과 배우가 자유로이 소통하는 현장이었다고 들었어요. 이때 얻은 경험이 <하이라키>에서 진가를 발휘했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전부 선배님인 현장이었잖아요. 그 현장에서 보면서 배운 것 같아요. 주변 스태프와 충분히 소통하고 서로 챙기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걸 그때 제대로 알았어요. 전작에서 배운 걸 이번 <하이라키>현장에서 잘 써먹은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고 가장 듣고 싶은 피드백이 있다면요?
‘노정의구나.’ 이 한마디요. 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아요. 작품뿐 아니라 MC에 도전하기도 하면서요. 제 또래 친구들은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연기를 하는지 아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도 많거든요. ‘누군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뭘 했는데?’ 그래서 이번에 작품이 공개되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들었을 때 제가 했던 작품도 또렷이 떠올리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 자신의 어떤 얼굴이 발견되길 원해요?
사랑스럽고 능글맞은 모습. 사실 그게 저에게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안 해본 영역이니까 알고 싶고 만들어가고 싶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 tvN <선재 업고 튀어>를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거든요. 덕분에 월요일, 화요일이 너무 행복할 정도예요(웃음). 드라마에서 한없이 사랑스러운 인물이 등장하잖아요. 팬으로 시청하면서도 ‘내가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저도 몰래 그려보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연기를 하는 동력은 무엇이에요?
도전 정신요. 새로운 것에 부딪치고 한계를 뛰어넘는 걸 좋아해요. 운동도 안 해본 게 있다면 다 해보려고 하는 성격이고요.
작품을 선택할 때도 안 해본 배역이라면 손이 가는 것 같아요. 저의 이런 지점이 가끔은 무모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는데, 또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해서 다양한 작품과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요즘 꽂힌 건 뭐예요?
<선재 업고 튀어>의 팬이기도 하지만 tvN <눈물의 여왕>도 못지않게 팬이거든요. 아니, 그래서 지금 마지막 회를 하고 있는데!(웃음) 그런데 최근 <눈 물의 여왕>을 보면서 ‘홍해인’에게서 이번에 제가 <하이라키>에서 맡은 ‘정재이’의 모습이 살짝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순간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아서 그때 다급하게 배현진 감독님께 전화했어요. 아무래도 제가 ‘정재이’에게 너무 애정을 갖고 있다 보니 겹치는 지점이 보였나 봐요. 어쩌면 비슷할 수 있는 캐릭터를 김지원 배우님께선 또 다르게 표현한 걸 보면서 새로움도 느낀 것 같아요. 어쨌든 요즘엔 두 작품이 저에게 가장 큰 자극을 줘요. 덕분에 제 월, 화, 토, 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어요. 요즘엔 ‘왜 이렇게 일주일이 느리게 갈까?’를 가장 고민해요(웃음).
이원정
<W Korea> 작년 KBS <어쩌다 마주친, 그대>로 신인상을 거머쥐었죠. 그즈음 어느 인터뷰에서 “드디어 할아버지가 아는 채널에 나와서 좋았다”라고 말한 게 기억에 남아요.
이원정 할아버지가 올해로 96세시거든요. 옛 세대다 보니까 지상파 3사만 취급하세요(웃음). 원래는 어떤 작품이나 배역이든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에요. 모든 것엔 때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할아버지가 딱 7번만 누르면 저를 볼 수 있으니까 욕심이 났던 것도 있었어요. 어쨌든 그렇게 ‘백희섭’을 만났는데 참 천운이었죠.
할아버지가 배우 이원정의 1호 팬인가 봐요.
1호 악성 팬이죠(웃음). 군인 출신이세요. 아주 보수적이어서 제가 배우하는 걸 극구 반대하셨어요. ‘절대적으로 우리 집안에선 딴따라가 나올 수 없어!’라고 말하셨을 정도예요. 예고 진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를 찾아가 말했어요. ‘할아버지,저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 뒤로 3개월 동안 저를 안 보셨고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저의 1호 팬이시죠.
‘백희섭’은 누구보다 꿈 많고 변죽 좋은 음악 소년이었죠? 캐릭터를 만들고자 전라도 사투리를 배우러 광주에 가고, 고문 신 촬영을 위해 얼굴에 발열 크림을 바르고 사우나에 갔다고 들었어요.
누군가는 ‘굳이?’라고 생각할 만도 한데 전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감독님의 믿음에 응하고 싶었거든요. 감독님이 저를 뽑은 이유는 딱 하나였어요. 겁이 없어서. 오디션장에 연보라 후디에 청바지 차림으로 갔거든요. 전라도 사투리도 쓸 줄 모르는데 ‘몰라, 난 나대로 할래’ 하면서 했고요. 정말 겁 없이 했는데 그 모습을 좋게 봐주셨어요.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몰아붙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디션에 붙자마자 바로 짐 싸서 광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만난 할머니
를 붙잡고 대뜸 녹음기를 켰죠. ‘할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 녹음 파일을 노이로제가 걸릴 만큼 들은 것 같아요. 고문 신을 찍기 전엔 사우나에서 미련하게 버티다 쓰러졌는데 친구가 뺨을 때려서 깼고요. ‘백희섭을 연기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백희섭’이 되고 그 틀을 만들어놓으면 알아서 몸이 반응해주겠지, 란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틀을 만든 후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기.’ 평소 배역에 접근하는 방식인가요?
배우는 작품과 배역을 오랜 시간 연구하고 분석한 후에 비로소 카메라 앞에 서잖아요. 그런데 관객 입장에선 그런 전후 사정이 전혀 중요하지 않죠. 처음 화면을 마주하는 순간은 단 한 번도 발생해본 적이 없는 일이고, 그들 입장에선 처음 일어나는 순간이에요. 그래서 실은 모든 게 약속된 거고 배우의 머릿속엔 전후 사정이 다 있지만 그걸 까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치밀하게 계산해서 배역에 접근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기엔 머리가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해력 하나는 뛰어나요.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다져놓고 그 이후엔 본능에 맡기자는 주의예요. 이원정이 아니라 ‘백희섭’이라면, 이번 <하이라키>에서 맡은 ‘이우진’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그건 그때 가서 보자, 이런 생각이에요.
<하이라키>의 오디션은 어떻게 기억돼요?
원래는 김재원 배우가 연기한 ‘김리안’ 역의 오디션을 봤어요. 재벌 그룹의 후계자인 만큼 고가의 시계를 빌려 오디션 현장에 갔죠. 처음 문을 열고 탁 들어갔을 때 손목에서 보이는 블링블링함! 이게 저의 의도였어요(웃음). 그런데 아쉽게 떨어졌죠. 물론 아쉬웠지만 저는 진짜 겁이 없다고 생각이 드는 게, 오디션 현장에선 ‘쟤 뭐지? 쟤 좋은 것 같은데?’란 인상만 남겨도 충분하다고 느껴요. 당장엔 저를 안 써도 언젠가 생각나면 다음 작품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로 오디션 탈락 한 달후 배현진 감독님께 연락이 왔어요. 그때 감독님이 제안해주신 배역이 ‘이우진’이었어요.
‘이우진’은 유력 정치인 가문의 차남이죠. 이 배역엔 어떻게 접근했어요?
역할을 만나면 습관을 만드는 편이에요. ‘이우진’의 경우 대권 주자의 아들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매스컴에 노출됐고 그런 만큼 어떤 강박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습관을 만들 땐 평소 저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심하면서 행동을 쪼개기 시작해요. 의자에 앉는 방법, 대화 시 테이블에 손을 올려두는 방법까지 생각해요. ‘이우진’의 습관을 만들 땐 ‘절제’를 키워드로 잡았죠. 천방지축인 저를 좀 죽이느라 애먹었어요(웃음).
배우로서 자신의 어떤 얼굴이 발견되길 원하나요?
악역을 맡아보고 싶어요.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하이라키>에서 감독님이 유독 좋다고 말해주신 신이 있어요. ‘이우진’이
‘강하’를 처음 만나는 신이에요. 그 신에서 제가 보인 눈빛, 제가 정말 자신 있는 부분이에요. 아까 얘기했다시피 저는 천방지축이라 했잖아요. 그 에너지가 어디 가겠어요. 사실 이 안에 다 있거든요. 그래서 동양인 최초로 조커를 연기하는 꿈을 꿔요. 사람은 절대적으로 결핍 덩어리잖아요. 조커 역시 결핍이 쌓여 최악의 방법으로 표출된 인물이었고요. 우리 모두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만큼, 저는 그 결핍의 결정체를 보여줄 악역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하이라키>가 세상에 공개되고 가장 듣고 싶은 피드백은 뭐예요?
‘쟤 누구야?’ 이런 궁금증의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
지혜원
<W Korea> 2022년 넷플릭스 시리즈 <안나라수마나 라>, 2023년 KBS <어쩌다 마주친, 그대>, 올해 공개하
는 <하이라키>까지. 공교롭게 최근 연이은 3편에서 모두 악역을 연기했어요.
지혜원 <안나라수마나라> 이후 특히 악역 제안을 여러 번 받았어요. ‘백하나’로서 짓던 표정을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평소 웃을 때와 무표정일 때 차이가 크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 그 낙차를 특히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하이라키>에서 연기한 ‘윤헤라’의 캐릭터 설명엔 늘 ‘질투의 화신’이란 말이 따라다니죠. 주신고 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질투심과 열등감을 숨김없이 발산해요. 반면 전작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고미숙’은 시종 어떤 서늘함을 가지며 남모르게 악을 행하는 인물이었죠.
맞아요. 같은 악역이지만 결이 굉장히 달라요. ‘고미숙’을 연기할 땐 말씀하신 서늘함에 집중하려 했어요. 그 서늘함으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영문 모를 공포심을 주는 인물이었죠. 반면 <하이카리>의 ‘헤라’는 대놓고 나쁜 말과 행동을 하지만, 그게 밉지만은 않게 비쳐야 하는 캐릭터였어요. ‘러블리’는 ‘헤라’를 설명하는 한마디예요. 사실 열여덟이라면 누구나 호기심, 질투,열등감으로 가득하잖아요. ‘헤라’는 태어날 때부터 사랑만 받고 자라서 물건이든 사람이든 갖고 싶은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예요. ‘헤라’가 나쁜 언행을 해도 밉지 않게 보이는 게 중요했는데, 사실 대단히 추상적이잖아요. 그래서 나쁜 언행 자
체에 중심을 두기보다 인물을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그의 천성을 순수하게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하이라키>의 오디션은 특히나 대대적으로 치러졌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사실 대번에 끌리는 배역은 10번 중 2번꼴로 찾아오거든요. 그런데 ‘헤라’는 보자마자 ‘이거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디션이 4차까지 진행됐는데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준비한 것 같아요. 제 옷장에서 가장 화려한 옷만 골라 입고 오디션장에 갔고요. 1, 2, 3, 4차 오디션마다 MBTI를 물어보셨는데 왠지 ‘헤라’는 외향적인 E 성향일 것 같아서 ENFJ라고 속여 말했어요. 저 INFJ인데도(웃음). 사실 저랑 닮은꼴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거든요. 집안, 성격, 옷 스타일, 말투 어느 하나 공통점이 없어요. 그런데 이유 없이 연애 상대에게 끌리는 것처럼 ‘헤라’가 제 안에 각인된 듯했어요.
배역에 접근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나요?
인물이 행하는 행동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저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캐릭터기 때문에 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요.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조금씩 인물에 가까워지는데, 막상 촬영에 돌입할 땐 제가 찾은 여러 이유 중 하나를 선택해서 그걸 믿고 밀고 나가는 편이고요. 사전에 메모도 분석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에 ‘헤라’를 연기하면서는 좀 다르긴 했어요.사랑스럽고 통통 튀는 성격의 ‘헤라’는 어쩐지 분석하면 할수록 그 인물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틀 안에 가둬두면 매력이 없어지는 인물이란 걸 깨닫는 순간 아차 싶었어요. 그래서 <하이라키>는 제가 여태 연기하기 위해 가졌던 틀을 전부 내려놓고 촬영해본 케이스였어요.
돌이켜 돌파구가 되어준 작품은 무엇이었어요?
<안나 라수마나라>요. 원래 저는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고 아주 계획적인 성향의 사람이에요. 연기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안나라수마나라>는 배우들의 자유도가 특히나 강조되는 현장이었어요. 감독님 역시 즉흥성을 끌어내길 원하셨고요. 모든 걸 계획해 현장에 나갔는데 계획대로 진행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몸이 굳더라고요. 초반엔 그것 때문에 정말 애를 먹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계속 무너지고 깎이니 계획 밖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얻은 교훈이 있어요. ‘무너진 다음에 일어나는 방법을 수집하자.’ 무너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 작품이었어요.
배우로서 자신의 어떤 얼굴이 더 발견되길 원해요?
장르적으론 액션 누아르에 호기심이 커요. 몸 쓰는 데 자신이 있거든요. 또 배역으로 말하자면, 여태 캐릭터성이 강한 인물을 연기해왔잖아요.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존재를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JTBC <나의 해방일지> 같은 작품을 만난다면 극 중 어떤 인물이든지 즐겁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자신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생각이 많아서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거리가 바뀌어요. 깊이 몰두해 고민했던 걸 하루아침에 말끔히 잊기도 하고요. 이런 저 자신이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젠 저의 그런 모습조차 받아들이는 시기인 듯해요. 점점 유연해지고 가벼워지는 거겠죠? 지금은 생각을 더는 방법도, 여러 선택지를 뒤로하고 후회하지 않는 방법도 익혀가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나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까, 이게 요즘 저의 가장 큰 화두예요.
- 포토그래퍼
- 김신애
- 헤어
- 장해인(이원정, 이채민), 홍현승(노정의, 지혜원)
- 메이크업
- 황희정(노정의, 지혜원), 장해인(이원정, 이채민)
- 어시스턴트
- 전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