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다시 만난 김환기

권은경

LG OLED에 의해 되살아난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 뉴욕에서 왜 김환기인가?

화가 김환기가 타계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머물며 그의 대표작인 전면점화 연작을 시작하고 탐구해나간 곳, 뉴욕. 뉴욕의 아트 신이 가장 분주해지는 5월, 프리즈 뉴욕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예술이 되살아났다. LG OLED가 이 거장의 존재를 세계 아트 신에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마련한 일이다.

프리즈(Frieze), 테파프(TEFAF), 나다(NADA) 등 크고 작은 아트페어가 열리며 세계 미술계 인사들이 모여드는 5월의 뉴욕. 그중 그들을 뉴욕으로 향하게 만드는 큰 힘, 프리즈 뉴욕이 5월 1일부터 5일까지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 위치한 더 셰드(The Shed)에서 열렸다. 68개 갤러리의 부스가 층층이 자리를 잡았고, 건물의 최상위층인 8층에는 유리 천장 아래로 밝은 햇살이 적절히 쏟아지고 있었다. 프리즈의 글로벌 파트너인 LG OLED의 라운지에 다가서자 이런 문구가 보였다. ‘Kim Whanki 1913-1974’, ‘뉴욕, 여기서 다시 만나다’. 거기서 마주한 김환기의 예술은 그 자리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작품이면서도 회화와는 조금 달랐다. 한국의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김환기의 작품을 디지털라이징 작업으로 재해석한 다섯 점. 각각의 LG OLED TV 스크린은 디지털 캔버스가 되어 김환기의 작품을 새롭게 구현했다. 김환기 사후 50주년을 맞는 해, 현대미술계의 심장인 뉴욕에서 그의 이름과 예술이 되살아난 순간이다.

감상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 없이 최대한 빠른 걸음과 사교성으로 곳곳을 누벼야 하는 페어장에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디지털 캔버스가 거장의 궤적을 연상하고 상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도시의 호텔방에서도 이 한국 대기업의 로고가 찍힌 TV를 볼 수 있는 시대에, ‘압도적인 화질’ 같은 기술력은 2024년의 TV가 너무나 당연하게 갖춰야 하는 자격이라고 여겼다. LG OLED 라운지에서 그 기술력과 퀄리티라는 게 뭘 말하는지 새삼 인지한 이유는 김환기의 점과 붓질을 되새긴, 또 시적인 색조를 표현한 무빙 효과 덕분이다. 예를 들어 김환기가 1972년에 완성한 붉은 점화(‘14-III-72 #223’)는 점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캔버스 너머로 무한히 확장하는 듯한 그림이다. 디지털라이징 작업으로 다시 태어난 미디어아트에서는 원화의 무수한 빨강 점과 노랑 요소가 무질서하고 자유롭게 반짝거린다. 태양 빛이 TV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글거리는 것처럼, 혹은 물이 둥그런 파형을 이루며 퍼져 나가듯이. 사방 구도 연작 (‘무제’)의 미디어아트 버전은 김환기가 화면의 모서리마다 선을 그어 화면을 분할시켰던 작업 과정을 밟듯, 느린 속도로 선과 선이 그려지는 과정을 담는다. 십자 구도 연작(‘7-VI-69 #65)은 원의 동적인 심상을 표현하듯 작은 점이 천천히 번진 끝에 원화와 같은 상태의 모습으로 완성되는 식이다.

뉴욕에서, 왜 김환기인가. 한때 김환기라는 이름은 경매가를 통해 자주 언급되곤 했다.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계속 갈아치웠다거나,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 최고가 10위 안에 든 그의 작품이 여덟 점이라거나. 전면점화를 비롯해 작가의 ‘힘’을 보여주는 그 대표작들은 모두 김환기가 뉴욕에 사는 동안 작업한 것이다. 그는 1963년부터 1974년 수술 후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뉴욕에 머물렀고, 이 기간 동안 한국적인 모티프로 구상 작업을 하던 양식에 변화를 꾀하면서 특유의 추상미술 세계를 심화시켰다. 김환기가 아내 김향안과 함께 뉴욕주의 발할라에 있는 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최고가 갱신’ 같은 사실만큼 알려지진 않은 듯하다.

LG전자 HE 브랜드커뮤니케이션 담당 오혜원 상무는 말했다. “작년 프리즈 서울에서 김환기 작품을 담기로 하면서 우리가 디지털 아티스트들과 함께 지속했던 고민은 ‘우리의 기술로 가장 빛나던 거장의 색을 되살릴 수 있을까’였다. 단순히 작품을 LG OLED라는 그릇에 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색을 살려내는 LG OLED라는 기술로 그의 예술을 다시 부활시키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작년 프리즈 서울에서는 이 디지털 작업들과 더불어 김환기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들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은 데 이어, 올해는 그 연장선에서 김환기 작가에게 정말 의미 있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이 전시를 가져오기로 결정, 세계 아트 신에서도 거장을 다시 환기시키고 사랑받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작가 김환기를 사랑한다는 <아트넷(Artnet)>의 에디터이자 미술 평론가 앤드루 러셋(Andrew Russeth)은 LG OLED가 불러일으킨 김환기를 두고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뉴욕은 김환기와 함께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정점인 시절을 보낸 곳이니 뉴욕은 더욱 운이 좋다.”

김환기의 흔적과 정신을 되짚는 뜨거운 자리는 페어장과 떨어진 곳에서 더 규모 있게 마련되었다. 뉴욕한국문화원(원장 김천수)이 신청사 개관 기념 특별전으로 공들여 준비한 전시, <환기 인 뉴욕>이 그 자리다. 뉴욕한국문화원은 1979년에 개원했다. 80년대와 90년대에도 문화원의 자그마한 갤러리에서는 부지런히 전시가 열렸다. 그곳은 백남준, 김창열을 포함한 한인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미국 내 고향이었다고 한다. 신청사를 위해 맨해튼에 신축 건물을 세우는 과정은 팬데믹까지 거치며 몹시 다사다난했지만, 이제 문화원은 전시는 물론 여러 프로그램을 훨씬 좋은 환경에서 전개할 수 있는 번듯한 공간으로 45년 만에 새롭게 단장했다. 문화원을 허브 삼아 타지에서의 삶을 동행한 한국계 작가들과 관계자들이 생전에 이 모습을 봤다면 사무쳤을 것이다. 뉴욕한국문화원의 조희성 큐레이터는 개관 기념 특별전을 기획하기 시작한 몇 년 전부터, 오직 <환기 인 뉴욕>이라는 제목을 생각했다. “회고전을 하듯이 대작이나 유명한 작품을 모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없었어요. 무조건 김환기 선생님의 뉴욕 시절에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이미 작가로, 또 교수로 상당한 권위가 있었던 분이에요. 1950년대에 3년간 파리 생활을 하실 때도 그곳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였고요. 하지만 뉴욕에서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시절에 쉰 살의 동양인이 권력도, 명예도 다 버리고 낯선 곳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선택을 하신 거예요.”

환기미술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실현된 <환기 인 뉴욕>은 약 10년간 이어진 김환기의 ‘뉴욕 시대’ 작업 중 수십 점, 특히 종이 작품을 주로 다룬다. 그의 일기와 편지글 내용을 풍부하게 곁들인 전시 구성에 작품 설명 캡션 같은 것은 굳이 필요치 않다. 이곳에서도 <환기 인 뉴욕>의 헤드라인 파트너인 LG OLED가 프리즈 뉴욕에서 선보인 미디어아트 다섯 점이 함께했다.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김환기, 김향안 부부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뉴욕 지인들이 개인 소장품을 내놓으며 거들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김환기와 가깝게 지내며 그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많이 받았던 조각가 존배도 있다. 그는 맨해튼에 거주하던 김환기, 김향안과 교류한 한인 예술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앞선 예술가들의 대를 잇듯이, 시간이 흘러서는 존배 부부가 브루클린의 작업실로 한인 예술가들을 초대하며 챙기는 역할을 했다. “김환기 선생은 순수한 분이었어요.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늘 초심을 지켰죠. 그런 특징이 작업에 녹아드니 작품에서도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선생은 선을 긋는 것이 산책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선을 긋는 동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담아낸 거예요.” 존배가 김환기에게 선물 받은, 진분홍과 파랑과 노랑이 쓰인 그림도 <환기 인 뉴욕>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환기가 ‘여기 스튜디오에 있는 그림 아무거나 골라봐라’ 했을 때, 눈에 보이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고른 것이라고 한다.

미술사학자이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로 잘 알려진 최순우는 김환기에 대한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이역에서 수화 김환기 형이 기세했다는 전갈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멋’이 죽었구나, ‘멋쟁이’가 갔구나 하는 허전한 생각을 먼저 했었다. (중략) 말하자면, 그는 한국의 멋을 폭넓게 창조해내고 멋으로 세상을 살아간 참으로 귀한 예술가였다. 내가 굳이 그를 화백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색과 예술가적 폭이 그렇게 매우 넓기 때문이다.’ 이조의 목공이나 백자의 참맛을 알고 골동품을 수집했던 김환기. 무언가를 수집했던 것만큼이나 그는 수필과 일기와 편지를 많이 남겼다. 김환기의 수필과 일기를 모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환기미술관)를 보면, 기록의 행위로 적은 듯한 간결한 일기는 그때그때의 그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65년 1월 19일. 종일 제작. 명랑한 기분으로 나간다.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 ‘65년 1월 20일. 그림은 첫 번 촉필로 성공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순수하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67년 11월 4일. 현대미술관에 나가 피카소를 보다. 천애무구한 즐거움의 장난들이다. 미감각이 한 세기는 앞서가는 사람이다. 재료, 유파, 아무튼 피카소가 하지 않은 일이 없다. 전무후무한 인간 피카소.’

뉴욕 시절, 작업 중인 김환기의 모습. 그는 늘 서서 그림을 그렸다.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그리고 김환기에게는, 김향안이 있었다. 아내이면서 예술과 지성과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대등한 동반자. 1963년 10월, 뉴욕에 먼저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김환기가 김향안에게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 남창에서 따듯한 햇볕이 들어와요. 3평 남짓 되는 방이요. 맑은 광선에서 모처럼 과슈나 해보겠어.” 김환기에게 멋과 풍류를 아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면모가 있었다면 김향안은 냉철한 이성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향안 선생님은 여성과 남성 여부를 떠나 어른으로서 빛나는 인간성을 가진 분이었어요. 또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딱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셨죠. ‘수화를 위한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목표였어요.” 김향안의 지인으로, 김환기가 타계한 후 김향안 옆에서 일을 도왔던 안성숙의 말이다. 그녀는 8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소호에서 화랑을 운영하며 백남준과도 긴밀하게 일한 아트 전문가다. ‘수화’는 김환기의 ‘아호’이다. 김향안은 생전에 “수화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작가, 하면 수화’라는 의미다. 본인이 신뢰하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물’로 여겼지만, 경제적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김향안은 환기미술관 건립을 집념으로 추진하고, 그 와중에도 재능 있고 성실한 작가들에게 장학금을 주곤 했다. “한 가지 참 안타까웠던 점은 있어요. 과거에는 작가를 알리고 전시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랑을 찾아다니면서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야 했거든요. 향안 선생님은 그렇게 진보적인 마인드를 가진 큰 사람이었음에도 그런 과정을 마땅치 않아 하셨어요. 이제 뉴욕과 이 인근에 사는 분들이 <환기 인 뉴욕> 전시를 보고 ‘우리에게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우리와 같이 뉴욕에 함께 살았던 작가구나’ 하는 점을 느끼면 큰 감동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환기 사후 뉴욕에서 기관 차원으로 그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환기를 전속 작가로 두었던 포인 덱스터 갤러리에서 그가 타계한 직후 추모전 형식의 전시를 연 적은 있지만,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뉴욕의 무대가 부재했다는 점은 놀랍다. LG OLED가 쏘아 올린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는 프리즈 뉴욕과 뉴욕한국문화원이라는 두 축으로 2024년 이렇게 되살아났다. 아트 페어는 지나갔지만, 5월 2일 시작한 <환기 인 뉴욕> 전시는 6월 13일까지 이어진다.

‘68년 1월 2일. 선인가? 점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70년 1월 27일.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60년대 후반부터 수년간 김환기의 일기에서는 그가 작업을 두고 고민한 흐름이 읽힌다. 그 시절,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떠오른 뉴욕에서 자신의 위치는 뭘지 알아가고자 작가로서 새로운 챕터를 시작했던 그는 그림을 들고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가 길거리 화가들에게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지, 너무 동양적인지’ 물어봤을 때, ‘우주적이다. 우주 느낌이 난다’라는 반응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자연과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며 점 하나하나에 담았을 그리움, 그렇게 완성된 점의 우주. 뉴욕에서 다시 만난 김환기는 우리가 알던 김환기이자 새롭고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김환기였다.

SPONSORED BY LG OLED, COURTESY OF WHANKI FOUNDATION, WHANKI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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