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만나는 에릭 오의 애니메이션 세계

전종현

제주도의 신생 공간 하우스오브레퓨즈에서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오의 상설전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4월 25일 제주도에 흥미로운 복합문화공간이 문을 열었습니다. 바로 ‘하우스오브레퓨즈’(House of Refuge)인데요. 수십 년간 흉물로 남아있던 미준공 건물의 리노베이션을 꼼꼼하기로 유명한 서로아키텍츠에서 진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미가 일었는데, 알고 보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하우스오브레퓨즈를 기획한 주체가 바로 비스츠앤네이티브스(BANA)였거든요. BANA는 랩퍼 빈지노, 뉴진스의 메인 프로듀서로 유명한 250(2022년 발매한 음반 <뽕>으로 한국대중음악상 4관왕을 휩쓸었죠.)과 FRNK, f(x) 멤버 크리스탈 등이 소속된 부티크 음반사입니다. 하우스오브레퓨즈는 그럼 제주도에 생긴 신생 뮤직 스폿일까요? 앞으로의 미래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현재 가장 주된 기능은 카페와 전시장입니다. 제주공항에서 택시로 30분 걸리는 애월에 자리 잡은 이곳에 전시장이라니 무슨 일일까요?

현재 건물 지하에는 BANA 소속의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오의 작품 세계를 체험하는 상설전 <O :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가 열리고 있습니다. 에릭 오라는 이름이 익숙지 않은 분들이 많을 텐데요. 한국계 미국인으로 애니메이션 명가 픽사에 입사해 ‘도리를 찾아서’, ‘인사이드 아웃’ 등에 참여한 애니메이터이자, 지난 2021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오페라’를 만든 감독입니다. 지금까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감독은 에릭 오를 포함해 총 3명인데요. 앞선 두 사람이 작업한 작업에는 ‘메이드 인 호주’와 ‘메이드 인 미국’ 태그가 달렸지만, ‘오페라’는 한국의 BANA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에 오른 최초의 한국 애니메이션 타이틀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2020년 ‘오페라’를 만들 당시, 전 세계는 코로나19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관객을 만나기 힘들었고, 팬데믹이 끝난 이후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하우스오브레퓨즈를 기획하면서 ‘오페라’뿐 아니라 에릭 오의 여러 작품을 함께 설치해 체험할 수 있는 대형 미디어 전시 공간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픈 직후 상설전에 찾아가 전시를 경험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개인적인 통념을 바꿀 수 있었어요. 주인공이 서사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결과물이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릭 오의 작업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는 낮과 밤의 사이클을 무한히 순환하는 콘셉트를 기반으로 거대한 우주와 영원의 시간을 테마로 다룹니다. 가장 기본이면서 반대되는 흰색과 검은색을 접목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영향을 주며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모티프로 활용하는데요. 여기에 심장, 생선, 피, 금, 보석 등 인류에게 보편적인 상징물을 활용하며 거대한 세상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마치 절대자의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성을 집약한 작품이 바로 대표작 ‘오페라’입니다. 피라미드 형태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인류 문명에서 길어 올린 공통적인 특성, 사회를 유지하는 거대한 시스템, 이에 동원되는 주체가 맡은 다양한 역할과 행동이 우주를 움직이는 초월적 법칙에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며 마치 음과 양처럼 성하고 쇠하는 상호관계를 맺는 방식을 대서사시로 펼칩니다. 치밀한 시스템과 상징,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군상의 모습을 따라가려면 몇 번을 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세계를 이루는 뼈대를 파악하고, 각 부분의 구성과 상호관계성을 알아차리고, 터닝 포인트와 세세한 움직임을 따라가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탐구심이 강해지더군요. 다행히 거대한 피라미드 작업 옆에는 실제 아카데미 시상식에 출품한 필름 버전을 함께 놓아 두 가지 버전으로 ‘오페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최근 본 창작물 중 완성도가 무척 높아서 기대 이상으로 놀랐습니다. 전시에서 ‘오페라’ 이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오페라’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교재 역할을 하고, ‘오페라’ 이후에는 감독의 창작관을 다양한 매체로 풀었는데요. 전시의 처음과 끝이 수미쌍관을 이루는 모습에서 애니메이션을 설치 작품으로 내세운 상설전을 기획하는 데 기울인 시간과 노력을 느꼈습니다.

제주도에는 이미 좋은 문화 시설이 많지만, 이런 방식으로 흥미를 끈 예는 없기에 앞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남길지 무척 궁금해 졌습니다. 혹시 이번 여름 휴가 때 제주도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하우스오브레퓨즈의 존재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Courtesy of B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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