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배우가 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이동휘는 우리가 알던 그보다 더 좋은 배우로 한껏 향하고 있는 중이다. 재능과 감으로 무장한 그가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고자 여러모로 단련하고 있으니까.
밤새 촬영을 하고 나오셨다고요?
네. 디즈니+ <카지노>와 영화 <범죄도시>를 연출하신 강윤성 감독님 작품인데, 어제가 제 첫 촬영일이었어요. <파인>이라고 윤태호 작가님의 웹툰이 원작이에요. 악인들만 등장하는 이야기죠. 악인들의 생존 게임이랄까.
<카지노> 감독님의 차기작에 바로 함께하시는 거예요? 이런 경우 감독이 배우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는 뜻이죠.
신기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파인>이 원래는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다가 시리즈(드라마)로 바뀌었거든요. 시나리오가 돌 때 ‘이 역할 하고 싶다’고 눈에 들어오는 캐릭터가 있었어요. 벌써 5~6년 전 일이죠. 그런데 재작년 말엔가 <카지노> 프로모션을 하러 싱가포르에 갔을 때, 호텔에서 감독님이랑 쉬는 중에 그 작품 얘길 꺼내시더라고요. 연출을 맡게 되었다고.
무산될 뻔했던 작품이 다른 형태로 결국 살아났군요?
놀라운 건 제가 관심을 둔 바로 그 캐릭터 얘길 하시는 거예요. ‘동휘 네가 맡아주면 어떨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그것도 뜬금없이, 싱가포르에서. 수년 전에 눈여겨본 배역을 드디어 어제 처음 연기했네요.
요즘 이동휘에게 우주의 기운이 신묘하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겠어요. 작품 두 개가 4월 안에 공개됩니다. 19일부터는 MBC <수사반장 1958>이 시작하고, 24일에는 영화 <범죄도시 4>가 개봉해요. 둘 다 업계에서 기대작으로 꼽히고요.
이런 타이밍이 예정된 건 아니었어요. <범죄도시>는 2편 때부터 5월에 개봉하는 흐름이었는데 이번엔 4월에 하고, <수사반장 1958>은 좀 더 일찍 방영 시작할 거로 예상했다가 4월 편성으로 결정이 났죠. 공교롭게 그렇게 되었어요.
<수사반장>은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900회 가까이 방영된 시리즈죠. 한국 수사물 드라마의 원전입니다. 2024년에 그 제목을 다시 만난다니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제훈과 이동휘 버전의 <수사반장>은 놀랍게도 배경이 1950년대예요.
재산을 소와 땅으로 계산하던 시대죠. 말투나 언어도 요즘과 달라서 배우에겐 한정적인 부분이 있긴 해요. 그런데 투박하고 진솔한 매력이 있어요. 과학 수사, 첨단 장비와 거리가 있으니 몸으로 부딪치는 느낌이고. 그 시절 인물들이 범죄를 마주할 때,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가는지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재밌는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이동휘가 맡은 김상순 형사를 한마디로 하면 ‘미친개’로 소개되더군요(웃음). 수틀리면 사람도 물고 개도 물어뜯을, 일단 들이받고 보는 성격.
영화 <극한직업> 때는 요상한 형사들 속에서 저 혼자 정상인이었거든요(웃음). <수사반장 1958>에서는 제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다혈질이라 나머지 형사들이 메워주는 면이 있죠.
<범죄도시> 이야길 해볼게요. 빌런을 보면 1편의 윤계상, 2편의 손석구, 3편의 이준혁과 아오키 무네타카, 그리고 4편의 김무열과 이동휘가 있습니다. 배경은 이제 한국을 벗어나 필리핀이고, 소재는 온라인 불법 도박 시장이에요. 여기서 ‘IT 업계의 천재 CEO’인 장동철로 등장하죠.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범죄도시>라는 프랜차이즈에 합류하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은 없었나요? 이미 믿을 만한 브랜드가 된 영화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따져보게 되잖아요.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결과가 나올 것인지, 어떤 손익이 있을 것인지 이것저것 고민해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순수하게 접근하려 했어요. 동석이 형이 전화해서는 장동철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줄 때, 그저 ‘믿고 맡겨준 만큼 최선을 다해 이 역할을 소화하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우리가 2017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 <부라더>를 같이 했거든요. <범죄도시>도 그해에 개봉했고요. 당시 제가 <범죄도시>를 재밌게 봐서, 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면서 ‘다음에는 <부라더>의 코믹스러움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형과 만나고 싶다’고 했죠. 그 이후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계속 도전하고 결국엔 하나씩 꿈을 이뤄가는 형을 보면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거기다 그가 굉장한 의리파입니다. 여전히 주변에 소홀함이 없이 잘 챙겨요. 한마디로 그 형은 여러모로 후배들이 ‘저렇게 되고 싶다’고 여기게 만드는 사기 캐릭터예요.
마동석 배우는 <부라더> 이후에 <범죄도시>를 촬영했지만, 개봉은 <범죄도시>가 먼저 했네요. 그가 지금만큼의 위상이 아닐 때 같이 작업한 배우를 기억하고 챙겨준 셈인가요?
형은 제가 배우로서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이동휘가 코미디를 잘하고 즐기니까 재밌는 걸 다시 같이 해보자’를 넘어서, 제작자로서 이동휘에게 악인을 맡기는 도전을 한 거예요. 그런 면도 멋있죠. 왜냐면 보통의 제작 시스템은 그 역할을 잘할 것 같은 이에게 맡기잖아요. 주로 코미디를 하는 배우에겐 코미디 대본이, 악인을 잘 표현해낸 사람에겐 악인 대본이 들어와요. 안전하게 가는 게 제일 중요한 가치일 경우에는요. 한창 폼이 좋아서 선택지가 넓은 특별한 배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배우가 가진 고민과 숙제가 바로 그 문제에 있죠. 그런데 그런 시스템을 깨는 자들이 가끔 있어요. 정말 드물게요.
배우가 유독 특징적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하고 강한 인상을 남기면, 날개를 얻는 동시에 ‘그 이후’에 관한 숙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응답하라 1988>의 동룡이 이후 8년이 더 지났어요. 이동휘에겐 그 캐릭터 이후의 길이 짐작보다 계속 큰 숙제였던 듯하네요.
숙제라는 것도 누가 내줘야 풀거든요. 언제 해결될지, 끝내 해결이 되긴 할지 알 수 없는 어떤 숙제를 계속 풀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수사반장 1958>의 김성훈 감독님이 영화 <공조>를 연출하신 분이에요. <공조>에서 제가 북한에서 온 인물 박명호를 연기했어요. <응답하라 1988>의 동룡이나 <뷰티 인사이드>의 상백이처럼, ‘주인공 주변의 다정하거나 유쾌한 친구’ 외에 저를 좀 다른 모습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해주신 거죠. 제가 출연한 독립영화 <모라동>이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한 이후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제작비 문제 등으로 진행이 더딜 때 제작자로 나선 분 역시 김성훈 감독님이었어요.
카지노>의 강윤성 감독, <부라더>에서 형제로 만난 마동석 배우, <공조>의 김성훈 감독 등 과거의 연이 작품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군요?
네. 저를 구원해주는 몇몇 분이 존재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동휘라는 배우를 지켜보면서 제가 연기에 진심이라는 걸 알아봐주는 사람. 저에게서 그간 보여주지 못한 얼굴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 <극한직업>을 제작한 김성환 대표님도 그런 경우예요. <카지노> 역시 연이 있어요. 제가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이름 있는 역할을 맡은 작품이 전도연 선배님이 출연한 <집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10여 년 전에 개봉했죠. 그 영화를 제작한 장원석 대표님이 <카지노>를 공동 제작하며 저한테 오랜만에 연락을 주신 겁니다. 양정팔은 차무식(최민식) 옆에서 희로애락을 담아내야 하는, 그래서 재밌는 신을 담당하는 면이 있었지만, 결국엔 칼을 꽂는 인물이에요. 그런 역할도, 누아르 장르도 저에겐 첫 도전이었어요. 제가 계속 새로운 숙제를 받아들게끔 기회를 주는 이들과 만나면, 배우로서 어떤 계산 없이 맡은 바를 잘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클 뿐이에요.
듣다 보니, 비슷한 고민을 가졌을 배우 중에선 구원의 끈이 여러 개인 해피한 케이스 같네요?
그럼요.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작품 활동을 꾸준히 못한다 싶을 때는 독립영화, 단편영화를 했어요. ‘저 친구가 왜 자꾸 저 쪽으로 가서 영화 하고 있지? 무슨 고민을 하는 거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관심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그런 길을 가는지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가까운 친구마저 ‘다소 보여주기식으로 독립영화 하는 게 아니냐’ 하더라고요.
인지도 있는 배우가 비상업적인 작업을 한다는 게 ‘예술 하는 사람’처럼 이미지 메이킹하려는 일종의 허세로 비친 걸까요?
뭐랄까, 참(웃음). ‘쟤가 갑자기 왜 저런 콘셉트를 잡나’ 싶을 수도 있겠 . 그런데 저는 상업적이지 않은 것, 이를 테면 공식에서 다소 벗어난 것에도 아주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거든요. 저에겐 그런 식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 상황이 익숙해요. 데뷔 전에는 ‘네가 과연 배우 될 수 있겠냐’ 같은 소리를 더 많이 들었죠. 처음에는 부모님도 저를 신뢰하지 못했는데요, 뭐. 지금은 ‘잘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아직까지도 ‘더 잘되기는 어려울 거다’, ‘코믹 원 툴 캐릭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많아요.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시선이 있긴 있다는 거죠. 답은 하나예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몰라도 끈기 있게 밀고 나아가는 거. 그래서 누군가 훗날에 ‘내가 이동휘에 대해 착각했구나’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 저는 뭐든지 꾸준히 하다 보면 10년, 20년, 30년 뒤에라도 어떤 식으로든 결실이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제가 끈기는 좀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저예산 영화 작업을 하신 게 눈에 띕니다. 웨이브에서도 볼 수 있는 단편 <메소드 연기>는 장편으로 다시 제작된다고 들었어요. 정은채 배우와 함께한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에선 정말 근사한 일상적 연기를 보여주셨죠.
<메소드 연기>의 이기혁 감독,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의 형슬우 감독, <모라동>의 김진태 감독, 또 아직 공개되진 않았지만 올해 같이 작업한 엄하늘 감독. 작은 영화들로 저와 함께해서 장편으로 입봉한 친구들이에요. 영화계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그냥 누가 불러주기만 기다리며 가만히 있고 싶진 않았어요. 좋은 이야기를 찾아 발품을 팔고, 서로 같이 논의를 많이 했죠. 시나리오로만 존재하게 둘 게 아니라 영화화해보자고 일을 벌였어요. 예산이 작더라도 해보자고 제가 좀 고집을 피우면서.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에서는 주연 배우로 이동휘를 캐스팅할 수 있다고 하면, 제작에 더욱 탄력을 받았으리라 생각해요. 직접 시나리오를 써볼 생각은 안 했나요?
아. 쓴 거 있어요. ‘시나리오라도 써봐야겠다는 말만 하더니 못 쓰네’ 같은 소리 듣기 싫어서 어설프게라도 썼죠. 뱉은 말은 지키고 싶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에게서 <브로커>에 출연해달라는 연락이 온 거예요. 자연스럽게 감독님이 쓴 것과 제가 쓴 것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게 됐죠. 바로 알 수 있었어요. ‘나는 시나리오를 쓰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프로젝트는 고이 접어뒀습니다. 물론 태워버린 건 아니니까 그대로 있긴 하고요(웃음).
영화는, 아무리 단편이라 해도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과정이 복잡하잖아요. 말과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실행으로 옮기는 점이 놀라워요. 그렇게 사는 이동휘에게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격려해준 사람은 없어요?
기특하다는 표현까진 들어본 적 없지만, 가끔 인사를 들을 때가 있어요. 최근에야 뵙게 된 한 감독님도 그러더라고요. 잘하고 있다고, 너무 고맙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완전히 엉뚱하고 틀린 길을 가면서 고집부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제가 연기하는 재미와 행복 때문에 스스로 하는 일이라는 점이에요. 규모가 작은 영화는 상업영화에 비해 많은 관객에게 선보이기 어려우니 아쉽죠. 하지만 아쉬운 게 있어도 말했듯이 꾸준히 해 나가면, 작은 것들이 쌓여 어느 순간 아주 큰 무엇이 되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요.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이동휘의 속에는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견고한 기둥이 있는 것 같아요. 고집이 세기도 하시겠지만, 그보다 자기 갈 길을 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진짜 이동휘에 대해 깊이 알 만한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되는 것 같아요?
많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투명하게 대할수록 상대방도 그렇게 대하거든요. 인간관계에서 보이는 그대로와 다른 목적이 있으면 혼탁해지죠. 저는 남의 것을 두고 ‘저걸 내가 가졌다면’, ‘저 역할을 내가 했다면’ 같은 생각을 안 해요. 내가 가진 것, 내가 하는 것이 소중한 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존중과 축하를 보내주면서 살고 싶어요. 시사회에 초대받으면 웬만해선 다 참석하려 하고요. 어떤 배우의 연기를 보고 큰 인상을 받으면, 별로 친하지 않아도 연락처를 알아내서 제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문자를 보내기도 해요. 그 첫 시도가 <범죄도시>의 진선규 선배였어요. 이 골치 아픈 경쟁 사회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끼리라도 서로 힘을 주지 않으면, 저도 결국은 어딘가에서 외톨이로 지내고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이런 태도로 사니까 남들도 점점 그렇게 대해주는 걸 느낍니다.
이동휘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있는 인간이군요.
인간애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해요. 그 가치가 가장 중요해요. 제 나이 지금 마흔이에요. 법적으로는 서른아홉. 이 나이가 돼서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더욱 명확하게 느끼는 점이 있어요. 저는 ‘너는 좋은 사람이야’보다 ‘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식의 말을 더 많이 들은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기회를 줄 때, 제가 부족함 없고 매끈하기만 해서 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단점이 있고 모난 데 있어도 주는 겁니다. 아껴주고 믿어주니까요. 과거에는 저에게 기회가 와도 그걸 기회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큰 숙제는, 그렇게 기회와 가능성이 열렸을 때 고마움을 갖고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기회를 기회로 알고, 숙제를 숙제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우주의 기운이 도와주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려운 숙제여서 어떡해요?
곧 작품들이 공개되니까, 제가 조금씩 숙제를 해결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주시면 좋겠어요. 이번에 못 풀면 또 다른 때에는 풀 수 있도록 꾸준히 해볼게요. 말했죠, 제가 끈기 있다고.
- 포토그래퍼
- 최문혁
- 맨 컨텐츠 디렉터
- 최진우
- 헤어
- 쇼우(by 로블리샵)
- 메이크업
- 남지수(by 로블리샵)
- 어시스턴트
- 전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