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곳에서 작가를 만났다
리움미술관 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개인전 <보이스>에선 이상한 생명체들이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전시장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곳에서 작가를 만났다. 사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해준 이 주인공의 목소리는 가까이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만큼 작고 여리다.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열리는 리움미술관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연쇄적으로 분주하다. 태어나고 죽길 반복하듯 발광하는 반딧불이, ‘나는 결국 망가 카탈로그에 나오는 다른 이들처럼 되고 말았어’라며 독백을 이어가는 영상 속 ‘안리’라는 캐릭터, 연주자 없이 스스로 연주되는 피아노. 거대한 가벽은 저만의 속도로 유유히 움직이고, 극장 입구에서 떼어온 듯한 디자인의 차양은 모스 부호를 내보내는 듯 빛의 신호를 퍼뜨린다. 런던 테이트모던의 거대한 터바인 홀을, 또 파리 팔레드도쿄의 전 공간을 조명, 소리, 영상, 음악, 움직임으로 채우며 마법적인 순간을 안겨준 필립 파레노가 서울에서 대규모 전시를 벌인다면, 리움미술관도 그 전체 공간을 내줄 법하다. 필립 파레노는 언제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전시를 감각 경험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관심은 단순히 오브제를 생산하는 일보다 그것이 전시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상호작용에 있다. 한편으로는 ‘그런 전시가 가능하겠어?’ 싶은 것들을 기어이 해내고자 전시 관계자들이 생고생을 하게 만드는, 골치 아픈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보이스> 전에서 그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다수의 목소리를 실마리 삼아 전시장 안팎의 요소들과 관객이 서로 연결되는 환경을 상상했다. 미술관 외부에 들어선 거대한 타워, 작품명 ‘막(Membrane)’이 사령관 내지 인공두뇌 역할을 맡았다. 그곳에서 어떤 자극이 어떤 데이터로 변환되는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막’은 전시장 곳곳의 스피커는 물론, 여러 작품과 데이터를 송수신하며 서로 연동된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 보고 귀 기울이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타워라니, 다소 기괴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물도, 사건도, 전시장의 고유한 공기와 활기도, 전시가 끝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 필립 파레노의 작업은 전시라는 그 일시적 속성을 뒤엎으려는 것처럼 과거의 작업과 재료를 계속 끄집어내 재구성하는 식이다.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을까? 태양이 사라지고, 지구가 멸망한 뒤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필립 파레노는 리움미술관 M2관의 유리창에 오렌지빛 시트를 사용해 따뜻하고 낮은 조도를 만들었다. 작품명은 ‘석양빛 만, 가브리엘 타드의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그는 지구가 영원히 석양빛 속에 잠기는 이야기를 연출한다. <보이스> 전은 2월 28일부터 7월 7일까지 일정 기간 동안만 이어지고, 그동안 M2관의 시각은 늘 ‘해 질 무렵’이다.
“미술관 안팎을 걸어 다니는 동안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는 동시에 듣기도 하고, 또 무언가가 다른 것을 움직인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그 일들이 서로 연결되고 동기화되어서, 사람들의 집중력이 전시장을 부유하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이 제가 기대하는 바예요.” 전시장에서 걷고 있는 필립 파레노를 위층에서 바라봤다.
모든 작가에게 전시의 출발점은 전시 공간이 되겠지만, 특히 당신은 공간과 장소를 세밀하게 고려하는 아티스트죠. 기자간담회 때 리움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언급해주셨는데,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특별히 어려운 점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요. 전시 공간에서 소리의 반향이 거의 없는 그 음향적 측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욱 전시와 사운드의 싱크로율을 높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M2관의 경우 꽤 어둡다는 점에서, 화이트 박스라고 할 수 있는 일반 미술관과는 다르다고 느꼈어요.
약 1년 전 이곳에서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전시 오프닝에 당신이 참석한 걸 봤어요. 당시엔 ‘내년이나 내후년에 필립 파레노도 이곳에서 전시를 하려나 보다!’ 하고 짐작했죠. 혹시 음향적인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 전시명이기도 한 ‘목소리들’이라는 주제를 잡았나요?
몇 년 동안 생각해왔고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요. 목소리를 물체로 구현하는 작업 말이에요. 목소리가 실제로 공간을 떠다니는 걸 느껴보면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간 안에 있는 사물들이 목소리를 가진 주체가 되는 거죠. 이상한 생명체들이 행진을 벌이는 것 같은 모습을 상상해보면 좋겠군요.
사진 촬영을 하면서 위층에 있던 제가 아래층에 있는 당신을 바라볼 때 잠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상한 생명체들이 천천히 행진하는 분위기’를 감지한 순간이었던 것 같네요. 제 눈에는 당신도 그 행진하는 무리 중 하나였죠.
맞아요, 저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웃음). 사람들이 쏟는 관심과 그들의 움직임에 관한 것. 연극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전시장 곳곳에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혹시 그 내용이나 메시지도 중요한가요? 아니면 그저 소리로서 존재하는 건가요?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보통 전시들을 볼 때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해하는 것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전시 말이에요. <보 이스> 전을 완성한 후 제가 깨달은 건 이 전시의 밀도가 꽤 높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블랙박스’ 안에서는 영상 작업 세 편이 연달아 흐릅니다. 독립된 곳에서 따로 보여주기도 하는 영상 세 편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꽤 강렬하죠. 눈에 보이는 게 많지만, 그걸 다 볼 필요는 없어요. 거기서 무엇을 포착해서 이해하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작품의 스위치를 켜든 끄든, 기계는 늘 작동하는 셈입니다. 그 안에 영혼(Ghost)이 있거든요.”
전시장에서 무언가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가장 크게 받았어요. 사물들은 각자 나름대로 작동하고, 기계 소리나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죠. 퍼포머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미술관 안팎을 걸어 다니는 동안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는 동시에 듣기도 하고, 또 무언가가 다른 것을 움직인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그 일들이 서로 연결되고 동기화되어서, 사람들의 집중력이 전시장을 부유하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이 제가 기대하는 바예요. 주의와 집중 그 자체가 공간 안을 떠다니는 느낌요.
퍼포머들은 뭘 하고 있는 건가요? 공연은 당신의 동료인 티노 세갈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술이라는 것을 신체와 연결시키고 싶은데, 그런 점에서는 바로 티노 세갈이 전문가거든요. 예전에 ‘손으로 어떻게 춤을 출 수 있을까?’ 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이면서 그와 처음 일을 시작했죠.
그 많은 요소들 속에서 떠다니다가 누군가 다소 혼란함을 느끼거나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관객도 있겠지만요. 전시를 뜻깊게 감상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안내가 되는 말을 남겨주실 수 있나요?
누군가 여기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웃음) 전 그럴 것 같진 않아요. 제가 학생 때 미술관에서 관객과 어린이들을 안내하는 가이드 일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관해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술을 어려워해요. 가끔은 내가 뭔가를 놓쳤다 생각하고, 이해하지 못해 힘들어하죠. 저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아요. 제 말은, 뭐든 여러분이 보면서 알아낼 수도 있고, 알아냈다는 점에서 그건 근사할 거예요. 한국에서는 혹시 예술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나요?
해외 관계자들에게서 ‘한국인은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게 많고, 놀라울 정도로 미리 공부해 오기도 한다’ 같은 소감을 들었어요. 이왕 전시를 찾았으면 뭐라도 배우고 얻기를 원하는 이들이 분명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작품 설명 캡션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다시 들여다볼 것처럼요.
그래서 제 전시장에서는 캡션이 깜박거리게 만든 겁니다. 캡션을 그냥 텍스트로 써놓은 게 아니라, 불빛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하는 화면으로 만들었죠. 유럽에서도 사람들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캡션에 집중하거든요. 제가 ‘깜빡이는 라벨’(2013)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죠. 여러분은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깜빡거리니까요. 심지어 작품에 관한 정보를 표시하는 라벨마저도.
전시장이 문을 닫은 후에도 불빛이 계속 깜빡거리면서 ‘나 여기 살아 있다’고 말하는 듯한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죠. 2022년 글래드스톤 서울과 파리 피노 컬렉션에서의 전시 때 ‘마운트 아날로그’라는 작품이 그랬어요. 리움미술관이 문을 닫은 후에도 그렇게 작동하는 작품이 있나요?
리움에 어떤 규정이 있는지, 리움이 밤새 작품의 전원을 계속 켜둘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작품의 스위치를 켜든 끄든, 기계는 늘 작동하는 셈입니다. 그 안에 영혼(Ghost)이 있거든요.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빛, 사운드, 움직임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죠.
‘삶의 의지를 넘어서 생동적 본능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2018)은 238점의 반딧불이 드로잉을 이용한, 발광하는 투명 LED 설치 영상입니다. 반딧불이 작업은 1990년대 초반 ‘빌라 아르송’에서 그룹전을 할 때 처음 선보였다고요.
네. 정원의 덤불에 조명을 이용해 반딧불이 무리처럼 보이는 작업을 만들었어요. 그건 밤이 되어야 눈에 보였죠. 반딧불이가 밤에만 우리 눈에 보이듯이. 전시가 대여섯 시까지만 하고 문을 닫았기 때문에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그 작업은 눈에 띄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그때 반딧불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만 나타났어요.
‘차양’ 연작, ‘말풍선(투명)’, ‘움직이는 벽’이 보이는 전경. 어떤 말도 담겨 있지 않은 말풍선은 무중력 상태로 표류하고, 흔한 가벽처럼 생긴 작품은 천천히 움직이며 관람객의 시야에 영향을 끼친다.
갤러리나 미술관이 문을 닫고 나서도, 아니 문을 닫은 후에야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는 이유는 뭔가요?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보든 보지 않든 존재하거든요. 무언가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우리와 나란히요.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예를 들어 수장고에 보관된 그림을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들어가서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을 기반으로 한 제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 작품을 보건 말건, 그들과 연결된 컴퓨터 프로세싱은 계속해서 작동해요.
<보이스> 전시의 초입에서 관객이 마주치게 될 눈사람 모양의 작품이 생각나네요. 우리가 보든 보지 않든, 미술관이 운영 중일 때나 문을 닫은 후에나 눈 덩어리는 점점 녹겠죠. 아티스트로서 당신의 큰 주제인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거기에 있군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눈사람은 계속 녹아내리고, 물고기 풍선들은 여전히 떠다닐 테죠. 반딧불이 작품도 비슷합니다. 그 작품은 ‘더 게임 오브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을 프로토콜 삼아 애니메이션화한 자동기계(Automaton)인데, 반딧불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식이에요. 생성과 소멸을 계속 이어가죠. 이건 영원한 게임이에요.
2022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을 할 때, 바닥에 깔린 한 ‘카펫’이 당신 작품이었어요.
창문을 통해 석양빛이 쏟아지고 있는 이미지의 그 작품명이 ‘저녁 6시’더라고요. 이상하게 울컥했어요. 빛이 들지 않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에겐 그 카펫이 낭만적인 사치품이 되어줄 것 같았거든요. 빛 없는 집에 빛을 박제해 두는 거죠.
작품을 잘 읽으셨네요. 그 카펫을 만든 이유가 주방에 들어오던 빛을 기억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저는 노동 계급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자랐어요. 늘 돈이 충분하지 않았죠. 살던 집 주변에 큰 건물이 많아서 집 안으로 빛이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딱 5시쯤, 그 순간이 되면 아파트에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저는 특히 반딧불이 작업을 둘러싼 이야기가 궁금했어요. 과거 당신이 암 투병을 하는 동안 집중적으로 반딧불이를 그렸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리는 일은 당신이 하는 여러 작업 중에서 성격이 다른 하나죠.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서 완성하는 작업을 주로 하시는데, 그리기는 오직 혼자서 하는 작업이잖아요.
시작할 땐 별생각 없이 그냥 했어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편으로요. 그런데 뭔가를 하면 할수록 그걸 잘하게 되잖아요. 처음엔 잘 못 그렸는데 치료를 받는 동안 드로잉 실력도 점점 늘었죠. 저에게 반딧불이는 대단한 영혼을 가진 종류로 보여요. 반딧불이를 그리는게 좋은 기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어요. 그들이 계속 깜박거리는 것처럼, 영원히 깜박거릴 것처럼 한 점, 두 점, 세 점··· 계속 그리다 보니 어느 순간 ‘오, 반딧불이가 움직이게 만들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좀 더 개인적인, 나만의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었달까요.
반딧불이를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그때까진 없었어요. 그래서 더 신비로운 생명체로 다가왔죠. 제가 실제로 반딧불이를 본 건 한참 뒤의 일이에요.
200여 점이나 되는 반딧불이 드로잉을 주변에 다 나눠 줬다는게 사실인가요! 보관하기엔 수량이 너무 많아서였나요?
그 드로잉들은 포틀래치(Potlatch)에 가까웠기 때문에 작품으로 판매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건 옳지 않게 느껴졌어요. 또 그것들이 펼쳐져 나가면서 지도를 만들 듯이 확산하길 바랐어요. 드로잉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도 같은 걸 보고 싶긴 합니다.
현재 소유자들을 추적해서 그 위치를 좌표로 찍어보면 어때요? 그 점들이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모습도 상상이 가고요.
하하. 엄청 멋질 거 같네요? 할 수만 있다면.
반딧불이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삶의 의지를 넘어서 생동적 본능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일본 망가 캐릭터 ‘안리’에 목소리를 부여해주는 영상 작품 ‘세상 밖 어디든’(2000)과 전시장 여러 곳에서 공명하는 ‘델타 에이’(2024)의 목소리를 위해선 한국 배우 배두나를 찾으셨어요. 혹시 리움에서 추천해준 인물인가요?
아니에요. ‘목소리’를 찾다가 그녀를 알게 됐고, 만나보고 싶었어요. 여기 리움의 사무실에서 만나 어떤 프로젝트인지 설명해줬죠.
배두나 씨에게 어떤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음. 타워를 만들고 있는데, 그 구조물에 영화적 성격의 허구적인 생명체가 구현된 것을 상상하고 있다고 말해줬어요. 저에게 타워는 한마디로 잠재적인 촬영 장소이고, 그 생명체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감지하지만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캐릭터라고요. 캐릭터에게 그녀의 목소리로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지 물었죠. 타워 구조물인 ‘막’은 성장과 형성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발전합니다. 배두나의 운율과 억양을 통해 자신이 인식하는 것을 형성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전시를 설명하려고 노력한 건 처음이에요. 배우와 함께 작업한 경험도 처음이고요.
당신은 영화를 만들기도 하잖아요. 경기 중인 지단을 17대의 카메라로 담은 <지단: 21세기 초상> 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는데 이번 전시에 빠져서 아쉬워요. 물론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를 기대한 축구 팬이라면 당황할 수 있을 작품이죠.
영화 작업을 다시 해보고 싶어요. 요새 장편 영화를 준비 중이긴 합니다만, 아직 쓰고 있는 단계예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저도 몰라서 말해줄 수가 없네요(웃음). 아담 써웰이라는 소설가와 함께 쓰는 중인데,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아직도 고민이에요. 배우들과 작업해보고 싶은 이유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거든요.
쓰는 일에 대해 언급하셔서 말인데, 당신이 과거에는 생각하고 풀어갈 일이 있을 때 ‘쓰기’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었다가 언젠가부터 잘 쓰지 않게 됐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걸 봤어요. 혹시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요?
물어본 것과 관련된 건 아니지만, 저에게 전환점이 된 계기는 있어요. 어느 시점에 제가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 같은데요. 2007년에 <포스트맨 타임>이라는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여러 아티스트와 협업해 극장 무대에서 시간 기반의 작업을 만들어내는 전시였죠. 아주 규모가 큰 일이어서 전시를 마친 후에 제가 많이 지치고 아팠어요. 그때, 내 주관성을 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전환점이 생겼죠. 글을 쓸 때는 어떤 개념을 표현하려고 애쓰지는 않아요. 평론가의 관점을 좋아합니다. 일을 외부에서 바라보면서 영감의 원천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아마 이제는 소통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덜 쓰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예술이 소통에 관한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쓰고 싶다는 욕구가 예전처럼 다시 돌아올 수도 있죠. 제가 바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상황인 것처럼요. 그러니, 써야죠.
당신에게 큰 임팩트를 준 전시나 예술 작품은 뭔가요?
많이 있는데, 지금 떠오르는 건 존 케이지의 개인전이 머스 커닝햄의 개인전으로 변화한 전시예요. 한 작가의 작품들로 시작해서는 날이 갈수록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하나둘 교체되는 식이었죠.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 거예요. 아름답죠. 하지만 저는 사실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전시의 재연을 통해 봤다고 할 수 있어요. 예술은 ‘보이지 않지만 상상하는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석양빛에 잠겨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작품 ‘여름 없는 한 해’.
M2관 전시 전경.
‘미술관’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보편적인 전시장의 모습과 다른 정경을 만들어내면서, 틀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방식을 펼치려는 아티스트로 보이거든요. 그런데 미술관이란 여러 의미로 하나의 거대한 틀이기도 하잖아요.
미술관은 실험을 하기에 환상적인 공간이 될 수 있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중요한 곳이지만, 변화가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우리가 아는 미술관의 형태는 지금 시대로부터 멀지 않은 과거에 발명됐다고 할 수 있죠. 생긴 지 150년이나 200년 정도밖에 안 됐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 진화하고 변화해야죠. ‘모더니티’는 모든 것을 박스로 만들었어요. 밤에 춤을 출 수 있는 박스, 음악을 듣고 보기 위한 블랙과 그레이 박스, 쇼핑할 거리가 있는 화이트 박스···. 현대는 이 모든 박스들에 관한 이야기죠. 저는 개방적인 걸 만들고 싶는데, 전시 공간이란 일종의 물리적 특성을 가진 곳이고요. 새로운 미술관은 건축물의 새로운 형태나 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어요. 틀에 박힌 형태보다는 좀 더 유동적인 무엇 말입니다.
아티스트가 되길 잘했다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나요?
오, 물론 있죠. 완전히요. 그런데 저는 제가 시각 예술가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어요. 장학금을 받고서 수학을 공부할 줄 알았죠. 그러다 예술 학교에 친구가 있으니 거기로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집 없이 살게 될까 봐 두려웠고, 경제적 사정도 좋지 않아서 좀 복잡했어요. 정말 아티스트가 될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죠. 그런데 선생님들과 이야길 나누면서 호기심이 생겼어요. 매번 ‘내년에는 또 다른 한 해를 보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살다 결국 아티스트가 되었네요. 아티스트의 삶이 결정된 일은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그럼 아티스트로 살아서 힘들 때는요?
항상 힘들지 않을까요?(웃음).
어떤 전시를 하든 당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꼭 미술을 하는 아티스트로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아티스트로서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요?
소설을 쓰고 싶어요. 소설이야말로 전시의 궁극적인 형태라고 생각하거든요. 별다른 기술 없이, 그저 책을 펼쳐서 읽기만 해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아름다워요. 저도 그렇게 꼭 만들어보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센서로 미세한 환경 요소를 수집하면서 이 전시의 두뇌 역할을 하는 ‘막(膜)’.
작가는 만화용 캐릭터를 개발하는 일본 회사에서 ‘안리’라는 캐릭터의 원본 이미지에 대한 권리를 구입해 다양한 매체로 생산했다. 그중 영상 작품 ‘세상 밖 어디든’.
- 포토그래퍼
- NICOLAI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