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욱, 젊은 날의 초상

권은경

또 다른 얼굴을 하고서 우리 앞에 나타난 이재욱

외롭고 강한 <환혼>의 장욱과 교도소에서 다이내믹한 한 철을 보내고 생을 마감한 <이재, 곧 죽습니다>의 조태상을 지나, 명석한 만큼 포부도 큰 <로얄로더>의 한태오가 된 이재욱. 그 말간 얼굴에 친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검정 가죽 베스트는 릭 오웬스 by 무이 제품.
검정 가죽 베스트는 릭 오웬스 by 무이, 검정 팬츠는 앤더슨 벨, 슈즈는 프라다 제품

하얗고 깨끗한 이재욱의 얼굴에 과연 상처와 멍 자국을 내도 괜찮은가, 고민했어요. 멍이 아주 잘 들었습니다(웃음).
원하는 콘셉트나 느낌이 있는지 사전에 물어봐 주셨죠. 그간 화보 촬영 전에 그렇게 먼저 의견을 물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평소 봐둔 느낌도 있어서, 조금은 파격적인 걸 해보고 싶다고 편하게 몇 가지를 말씀드렸네요. 오늘처럼 어떤 텍스처가 있는 사진 작업이라면 다면적인 제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비주얼 작업에 마음이 열려 있는 배우군요.
배우로서 생각해보면, 나도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볼 때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거든요. 오늘 촬영하면서 저의 여러 얼굴을 봤어요. 화보 작업을 둘러싼 모든 스태프가 각 분야 전문가들이잖아요. 이건 어떨지, 저건 어떨지 망설이기보다 전문가들에게 믿고 맡기면 재밌는 장면이 연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가 얼마 안 됐어요. 막연히 상상만 하던 저의 또 다른 이미지를 스태프들이 구체화해주죠. ‘한번 해보자. 아님 말고’ 같은 마인드가 생겼어요. 기회만 된다면 앞으로 또 도전적인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요즘 이재욱의 전반적인 상태는 어떤가요?
그냥 매번 감사하고 있어요. 자주 하는 말이지만 작업하는게 너무 좋고, 거기서 행복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에요.

내가 하는 일에서 자주 감사함과 행복함을 찾는 거. 실제로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죠.
저는 일도 일로만 느껴지진 않아요. 매일매일이 달라요. 같은 일상의 반복이 하나도 없죠.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해도 그대로 들어맞는 게 없이 계속 상상도 못한 환경을 마주해요. 그 점이 재밌죠.

흰색 슈트는 시스템 옴므, 안에 입은 티셔츠는 페라가모, 슈즈는 프라다 제품.

배우로 사는 삶은 어떤지, 연기 자체에선 얼마나 재미를 찾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매일매일이 새로운 기분으로 살고 있군요?
연기할 때는 당장 10분 후의 미래도 예측할 수가 없어요. 저 혼자 들여다보고 만들어가는 일이 아니라 다 같이 작업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따라요. 닭장에서 닭 잡는 장면을 찍는데 갑자기 닭이 탈출한다거나, 내가 서 있는 곳은 맑은데 저쪽에서는 비가 막 쏟아진다거나.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하루가 정말 빨리 지나가요.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이재욱은 지금 한창 일의 현장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저는 10년 차가 되어도 똑같이 말할 것 같은데요? 사실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마흔 즈음에 다시 들어보고 싶긴 해요. 그때도 제가 지금과 같을지,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거든요.

요즘은 <탄금>이라는 드라마를 찍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죠? 아직 공개되려면 멀었지만요. 촬영 중인 작품의 캐릭터나 분위기 때문에 영향을 받기도 하나요?
그럼요. 일주일에 4~5일씩 촬영해요. <환혼>을 해봤지만, 정통 사극은 <탄금>이 처음이에요. 목소리 톤을 최대한 낮춰 말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좀 더 힘 있고, 전달력이 확실했으면 좋겠어서. 그리고 ‘저’라는 말을 확실히 자주 사용하게 되네요. 평상시 어휘에서도 그런 낮춤말이 기본적으로 세팅되는 거죠.

2월 말부터 디즈니+에서 <로얄로더>가 공개되고 있습니다. 한태오는 명석하고 배짱 있는 인물이에요.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재벌가의 혼외자인 강인하(이준영 배우)와 손을 잡죠. ‘제일 높은 곳’까지 오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소위 흙수저의 그 꿈에 얼마나 공감하세요?
공감하기 힘들죠. 머리 좋은 흙수저가 ‘대기업에 입사해서 여기를 장악해버릴 거야’라고 요약할 수도 있는 이야기니까.

검정 가죽 재킷은 록 제품.

<로얄로더>를 택한 이유는 뭔가요?
1부 첫 신에서, 태오가 얼음송곳을 들고 있어요. 현재를 보여주는 그 신 이후 과거로 넘어가서 이야기가 흘러요. 태오가 왜 피범벅이 된 채 서 있는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어쩌다 그런 상황이 펼쳐진 건지 궁금해서 끌렸어요. 그리고 한 인물의 학생 시절부터 성인까지 긴 시간을 쭉 연결해서 보여주는 캐릭터도 해보고 싶었고요.

욕망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욕망으로 가득 찬 인물을 결코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감하고 이해하기 힘든 인물과 포개지기 위해 어떤 식으로 접근하나요?
작은 조각들을 모으려고 해요. 예를 들면 대기업에 입사한 흙수저 대신 저의 상황과 감정에 대입해보는 거죠. ‘봉준호 감독님과 작업해보고 싶다’, ‘그 작업을 위해서 오디션이라도 한 번만 보고 싶다’ 같은 마음. 한태오에게 대기업이 있다면, 제 경우는 칸으로 대체해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간절함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까요. 내가 어느 순간에 간절했는지, 어느 순간 진심이 우러나오는지 들여다보고 되돌아보면서 내 안에서 끄집어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제 상황과 마음을 극 중 인물에 대입할 수 있는 조각들이 나와요. 그렇게 기억을 상기하면서 캐릭터에 입혀가요.

흥미로운 얘기네요. 욕망은 대개 결핍과 관련이 있잖아요.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들에겐 가난, 사랑받지 못했다는 감정 같은 전형적인 결핍이 있곤 합니다. 이재욱에겐 어떤 종류의 결핍이 있다고 느끼세요?
누구나 어느 정도의 결핍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인터뷰에서도 자주 언급했는데, 예전에는 옷이나 신발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요. 친구가 명절에 용돈 받아서 뭘 샀다더라, 하면 한 번씩 구경해보는 아이였어요. 그런 욕구가 워낙 강하다 보니 그에 따른 작은 결핍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최근 저의 새로운 결핍감을 발견했어요(웃음).

오, 뭘까요?
제가 먹는 것엔 돈을 안 아끼더라고요. 돌이켜보면 그런 점도 작은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옛날에 먹고 싶은 걸 참은 적이 많고, 배우 생활을 하면서 관리가 필요해서 또 참은 적이 많다 보니 못 먹은 게 많은 거예요. 왜 다음 날 촬영이 있다 하면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 있잖아요. 그래서 먹을 수 있을 때 맘껏 먹으려고 해요, 보상 심리 때문에.

빨강 니트 톱과 안에 입은 티셔츠는 페라가모 제품.

제가 신인 시절의 이재욱을 인상적으로 본 이유가 있거든요. 10대 때부터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봤다는 사실이요. 패스트푸드점, 웨딩홀, 고깃집 서빙부터 편의점, 피시방, 세차장 등등. 사장님이 업종을 변경하면 따라 옮기기도 했다면서요. 그런 경험치가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바도 있다고 생각해요. 디테일한 연기에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어주기도 할 테고요.
제가 일하면서 쌓은 스킬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더 크게 느끼고 얻은 바가 있어요.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사장님들을 겪으면서 저는 말의 무서움을 아주 잘 알게 됐어요. 말실수나 내가 선택한 단어가 자칫 위험할 수도, 또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걸 배운 듯해요. 제가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거든요. 신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렇게 열심히 했나요?
뭐, 사람마다 시간을 쓰는 방법은 다르니까요. 제가 풍족한 환경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금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저는 이런저런 일을 하는 데 재미를 느꼈어요. 다만 일의 루틴이 자리 잡고, 그게 일상이 되면 또 싫증을 느끼더라고요. 여러 분야에서 일해본 이유가 그래서예요. 그런 성향 때문에 배우라는 직업이 아주 잘 맞죠. 계속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의 무서움을 알았다는 그 경험치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을까요? 목소리와 신중한 화법 때문인지 이재욱에게는 남자 어른 같은 듬직한 인상이 있습니다.
제가 ‘나는 운이 좋다’는 표현을 자주 하거든요. 데뷔 초부터 오디션을 다니면, 감독님들이 저를 좋아해준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어요. 어떤 친구는 짧은 대화만 오가고 오디션이 끝났다는데, 저는 질문도 많이 받고 이런저런 대화를 한 적이 많거든요. 저부터가 어떤 상황에서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그런 면이 저의 자산이 될 수도 있겠네요.

가족과 있을 때 이재욱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일단,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나요, 어머니라고 하나요?
엄마라고 해요.

애교도 부릴 수 있는 아들인가요?
저는 가장 같은 아들이에요. 누나도 여동생 같고, 엄마도 소녀 같으세요. 우리 집에 남자가 저 하나거든요. 그래서 가장 같다고 말하는 건데···. 가족이 저에게 의지하는 게 느껴져요. 그리고 가족이 의지할 수 있는 제가 절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요. 예를 들어 저한테 ‘힘들지?’ 하고 물어봐도 ‘에이, 힘든 게 뭐가 있어’라고 합니다. 그런 순간에도 그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은 거죠.

검정 재킷, 안에 입은 티셔츠, 팬츠는 모두 릭 오웬스 제품.

듬직한 사람 맞네요. 그럼 힘들 때는요? 기댈 사람이 있나요, 이겨내려 하나요, 그저 흘려보내려고 하나요?
어··· 저는 힘든 걸 즐겨요. 스스로 무언가를 해결하려 해도 잘 안 될 때가 있죠. 그런 것들을 부여잡고 스트레스를 받는 편은 아니에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말을 아주 좋아해요.

소리 지르면서 화낼 때도 있긴 하죠?
예전에는 있었지만, 요새는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 연기하면서도 이 부분 때문에 좀 어려웠거든요. 화내는 거요. 살면서 생각보다 소리 지를 일이 많지 않더라고요.

일상에서는 소리치며 화낼 일도 없지만, 작품 속에서는 분노의 주먹을 날리기도 하는 게 배우의 재밌는 인생일 테고요. <로얄로더>의 한태오만큼은 아니더라도,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봤나요?
어릴 때는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 했죠. 아직 이 일을 택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성공이라는 기준을 갖기에는 너무나 애매한 직업 같아요. 아쉬움이 계속 남거든요. ‘조금만 더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는데’ 하며 후회해요. 그런데 또 알아요, 조금만 더 어떻게 했어도 집에 가서 똑같이 후회했으리라는 걸(웃음). 제가 완벽주의자냐 하면 그런 것 같진 않아요. 모호한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죠. 만족감은 사실 상대적인 거잖아요.

그렇게 늘 아쉬움이 남기 때문에 매번 애를 쓰고, 매일 새로운 기분으로 사는 거군요?
후회를 최소화하려니 현장에서 늘 진심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선배님들에게 여쭤본 적도 있어요. 잘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계속 들고, 자꾸 생각이 나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느냐고. 그럼 ‘아이고, 만족하는 게 어딨니’ 같은 대답을 들어요. 왜냐면 늘 시간 제약이 따르거든요. 그렇다 보니 아쉬워도 그냥 넘어가야 할 때가 있죠. 혹은 만족할 만한 연기를 했어도 소품이나 다른 환경 요소에 문제가 있어서 다시 촬영해야 할 때도 있는 거고요. 그러니까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들에게도 아쉬움이 남는 게 이 일일 거예요. 완벽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만약 제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느끼는 날이 오면 성공이라는 걸 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웃음)

셔츠는 아미리, 베이지색 스커트 팬츠는 드리스 반 노튼 제품.
검정 재킷, 안에 입은 티셔츠, 팬츠는 모두 릭 오웬스 제품.
빨강 니트 톱과 안에 입은 티셔츠는 페라가모 제품.
검정 가죽 재킷은 록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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