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의 원형 홀을 뒤집어 버린 김수자 작가
구찌, 발렌시아가, 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부쉐론 등 럭셔리 브랜드를 운영하는 케링 그룹은 LVMH 그룹의 오랜 라이벌이죠. 근데 케링 그룹을 창업한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 세계 양대 경매회사인 크리스티의 소유주인 사실을 아시나요? 개인 컬렉션 규모만 1만여 점에 사립 미술관도 세 개나 가지고 있답니다. 파리에 미술관을 갖고 싶었는데 계속 허가가 나지 않아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먼저 팔라초 그라시(2005년), 푼타 델라 도가나(2009년)을 지었고, 지난 2021년 5월 드디어 파리 핵심 지역인 1구에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Pinault Collection, 이하 BdC)를 열었어요.
BdC는 1763년 곡물 저장소로 출발해 1889년 상품거래소, 이후에는 상공회의소와 증권거래소로 이용된 건물이에요. 260살 먹은 BdC를 미술관으로 바꾼 주인공은 안도 다다오입니다. 특히 건물 중앙에 있는 로통드(rotonde)는 그 자체로도 볼거리인데요. 로통드는 영어로 ‘로툰다(rotunda)’입니다. 보통 돔을 갖춘 원형 홀을 말해요. 그 전형으로는 로마 판테온을 꼽을 수 있고, 미술관 중에서는 뉴욕에 있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이 어마무시한 로툰다로 유명합니다. 전시장과 전시품이 끊임없이 싸우는 공간으로 말이죠. 반면 BdC의 로툰다는 아주 우아합니다. 천장에는 인류 무역의 역사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고, 유리 돔을 통해 자연광이 내려오는 게, 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에요.
이런 BdC의 로통드, 혹은 로툰다가 확 뒤집어졌습니다. 난리가 났다는 수사가 아니라, 정말 뒤집어졌어요. 김수자 작가가 보따리 마법을 부렸거든요. 천장 아래 지름 29m 길이의 원형 전시장 바닥을 418개의 거울로 뒤덮으니, 천장이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이 되며, 반원형 공간이 아래로 증식해 철썩 붙어 달항아리처럼 됐어요. 천장의 유리 돔과 거울 바닥, 두 공간이 만나 하나로 연결된 개념은 딱 봐도 이를 하나로 감싸는 보따리입니다. 보따리는 김수자 작가의 전매특허죠. 두 개의 천을 하나로 엮는 바느질에서 감전되는 듯한 영감을 얻은 이래 작가의 평생 화두로 삼았으니까요.
BdC의 거대한 로툰다 공간을 전복한 스케일을 보면 개인전이라 생각해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사실 이번 전시는 개인전이면서 동시에 단체전입니다. 지금 BdC에서는 <흐르는 대로의 세상>이라는 기획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참여 작가들을 호명해 볼까요. 참고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오직 피노 컬렉션의 작품으로만 구성했는데, 절반은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라고 합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피터 도이그, 마를렌 뒤마, 페터 피슐리와 다비드 바이스, 제네럴 아이디어, 로버트 고버, 데이미언 허스트, 안 임호프, 김수자, 마르틴 키펜베르거, 키키 코겔니크, 제프 쿤스, 베르트랑 라비에, 리우 웨이, 고시카 마쿠가, 시그마 폴케, 도리스 살세도, 모하메드 사미, 신디 셔먼, 스터티번트, 쑨위안과 펑위, 폴 타부레, 볼프강 틸만스, 살만 투르, 로즈마리 트로켈, 뤼크 튀이만, 프랭크 월터, 프란츠 웨스트, 크리스토퍼 울.
잠깐만 흘겨봐도 면면이 굉장한데요. 김수자 작가는 이번 기획전의 참여 작가이지만, 기획전 안에서 개인전 형태로 진행합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카르트 블랑쉬(Carte blanche) 덕분이에요. 카르트 블랑쉬는 ‘백지 수표’라는 관용어입니다. 이게 전시에 쓰이면, 기획부터 실현까지 전권을 특정 아티스트에게 맡기는 프로젝트를 가리킵니다. 김수자 작가는 이번 기획전에서 카르트 블랑쉬를 받아 개인전 형식으로 마음껏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권리를 얻었어요. BdC 개관 이후 두 번째인데요. 첫 번째는 알바니아 출신의 작가, 안리 살라(Anri Sala)였습니다. (참고로 지금 에스더 쉬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답니다)
김수자 작가는 <호흡 — 별자리 To Breathe — Constellation>이라는 전시 제목 아래 정말 다양한 작업을 배치했습니다. 로툰다 뒤집기는 기본이고, 로툰다 공간을 둘러싼 24개의 쇼케이스마다 작품을 넣었어요. 작가가 19년간 사용해서 몸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요가 매트, 굽는 과정에서 생긴 갈라짐을 살린 도자기, 파리의 도시 불빛을 천체처럼 찍은 사진, 작년 멕시코에서 진행한 퍼포먼스를 담은 사진, 세상을 떠난 사람이 생전 사용했던 물건을 싼 보자기 등 일상적으로 보이지만 작가의 핵심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지하 공간에는 영상 축제가 열립니다. 상하이, 델리, 도쿄, 뉴욕 등 번잡한 도시를 배경으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작가의 뒷모습을 담은 퍼포먼스 영상 ‘바늘 여인’을 비롯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세계 여러 대륙을 옮겨가며 천을 둘러싼 문화 모자이크를 표현한 ‘실의 궤적’ 연작 여섯 편이 처음으로 한데 모여 전편 상영 중입니다.
북적이는 오프닝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이 깜짝 등장했다고 해요. 3월 20일 시작한 이번 전시는 오는 9월 2일까지 계속합니다. 2024 파리올림픽을 보러 가는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늘었네요!
- 사진
-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김수자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