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왔으면 싶은 그 시절 트렌드 12

전여울

때론 먼지 묻은 지난날에서 빛나는 옥석 같은 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미 지나갔고 오늘날 멸종되다시피 한 트렌드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귀환을 간절히 희망하는 흐름을 12명이 밝혔다.

원 플러스 원의 극장 – 동시상영관

멀티플렉스 시대가 본격 개막하기 이전, ‘동시상영관’이라는 게 있었다. 영화 한 편 값으로 두 편을 연달아 볼 수 있던 ‘1 뿔 1’ 개념의 극장이. 동시상영관 인기가 끝물이던 시절, 아빠는 어린 나의 손을 끌고 허름한 동시상영관을 기웃거리곤 했다. 그때 연달아 본 홍콩 도박 영화와 할리우드 ‘액숀’ 영화 제목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구석 자리에 앉아 서로의 입술을 열심히 빨아대던 언니 오빠들의 실루엣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동시상영관은 그런 곳이었다. 영화를 ‘본다’ 못지않게, 뭔가를 ‘경험한다’는 개념도 강했던 공간. 멀티플렉스 시대인 지금이야 영화 흥행 성패가 2주 만에 판가름 나지만, 개봉 영화가 ‘개봉관, 재개봉관, 동시상영관’으로 순차적으로 내려가던 그때 그 시절, 동시상영관은 흥행의 마지막 관문이기도 했다. 관람료가 개봉관보다 저렴했기에, 용돈이 궁했던 전국 씨네필에겐 사랑방 그 이상이기도 했다. 동시상영관이야말로 ‘티켓값 무서워서 극장 가기 꺼려진다’는 시대에 부활한다면 크게 환호받을 시스템이 아닐까? 극장 관계자 여러분, OTT에 빼앗긴 극장가에도 봄이 오길 바란다면, 동시상영 어떤가요. 이거 잘만 하면, 먹힌다니까요?
– 정시우(영화 저널리스트)

가장 ‘인스타그래머블’한 바 경험 – 플레어 바텐딩

플레어 바텐딩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성행한 장르다. 숙련된 바텐더가 셰이커 등의 기물을 저글링하며 펼치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톰 크루즈가 열연한 영화 <바텐더>의 ‘Hippy Hippy Shake’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바텐더들이 곡예에 가까운 묘기를 펼치는, 클래식 바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하이 텐션’의 에너지.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서는 긴긴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니 많이 이들이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고 지금은 점차 사라져서 ‘투비’, ‘아초’, ‘하우스라운지’ 같은 몇몇 바에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인스타그래머블한 장면이 각광받는 요즘, 플레어 바텐딩은 얼마든지 모던하게 부활할 가능성이 농후한 희소가치 있는 문화가 아닐까? 화려한 공연 중심의 콘셉트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바 ‘겟 올라잇’의 성공 사례를 보면 앞으로 체험형 바 공간은 다채롭게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 흐름 안에서 플레어가 다시 화려하게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플레어가 더 궁금하다면 이 분야의 전설로 불리는 정선호 바텐더의 유튜브 채널 ‘와이치 TV’를 검색해볼 것.
– 김아름(주류 브랜드 컬처 매니저)

그리운 두툼한 테두리 – 베젤

베젤이 점점 사라지는 게 싫다. 베젤은 스마트폰, TV 등의 디스플레이에서 화면이 보이는 출력부를 제외한 주변 테두리 부분을 이른다. 베젤이 얇다는 것은 같은 크기여도 디스플레이 면적을 더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의 상징이라 베젤리스 디자인 경쟁이 지금도 한창이다. 오래된 TV, 아니 초창기 스마트폰을 떠올려보라. 베젤이 엄청 두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폰이 피처폰 시대를 끝장내고,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폰 자체의 조형적 디자인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졌다. 제품 디자인 그 자체보다 UI/GUI 디자인이 중요해졌고, 화면을 디자인하는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베젤리스 디자인은 인간과 기계의 최소한의 경계마저 사라지는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시각적 징후이자 전조 같다. 종국에는 애플 비전프로에서 본 것처럼 눈앞에서 가상의 디스플레이가 펼쳐지는 시대에 돌입할 텐데, 아직 기계와 일심동체가 될 준비를 하지 못한 나는 어쩐지 베젤리스 포비아가 생길 것만 같다. 참고로 나는 디스플레이를 보호하는 두툼한 케이스가 있고, 심지어 상판에는 로낭&에르완 부홀렉 형제가 직접 사인해준 비트라의 새 모양 오브제를 올려둘 수 있는 삼성 셰리프 TV를 사용하고 있다.
– 전은경(디자인 저널리스트)

가장 확실했던 음악 취향 탐색의 장 – 라이브 클럽

나의 첫 라이브 클럽 공연은 스무 살 때였다. 주중의 라이브 클럽은 언제나 무대 아래 관객보다 무대 위 연주자가 더 많았고, 연주가 끝난 앞 순서 팀은 당연하게 관중석을 채워 앉아 다음 팀의 공연을 즐겼다. 홍대엔 클럽도, 밴드도 정말 많았다. 언제나 열 곳이 넘는 클럽에서 서른 팀 정도의 밴드가 연주를 했다. 여러 클럽을 호핑하며 시간이 들지만 자연스레 음악 취향을 탐색하던 이들은, 이제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알고리즘이 인도해주는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 산업은 손이 많이 가는 것에서부터 더 편리한 방향으로 흐르더니, 어느새 다시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이 유행을 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취미로 LP를 모으고 듣지만, CD를 사서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지는 않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의 라이브 클럽 공연은 CD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괜히 해본다. 요즘의 문화는 소셜미디어에 점령당하고 낭만마저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아이들은 스마트폰이 생겨도 놀이터에서 뛰놀 듯이 어른들도 아직 낭만을 추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과거를 추억한다고 생각한다. 라이브 클럽 공연은 낭만이 넘치는 것도, 또 돈이 안 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그 많은 라이브 클럽과 밴드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 구름(음악 프로듀서)

삶과 사상을 날것 그대로 전하던 이들 – 리릭시스트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일까? 무엇이든 살아남기 위해 점점 단순해졌고, 힙합 가사도 별반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요즘 시대 쓰인 가사를 보면 사용된 단어수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마약과 여자 타령일 땐, 조금은 참담한 마음도 든다. 가사의 분량이 절대적으로 짧아지고 가사가 소리 자체의 쾌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이전, 힙합 신엔 위대한 리릭시스트가 많았다. 우선 투팍과 제이지가 대표적이다. 투팍은 ‘Keep Ya Head Up’, ‘Brenda’s Got a Baby‘에서 여성 인권을 말할 땐 인권운동가로 변신했고, 제이지는 ‘Smile’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레즈비언이었으며 그 사실을 숨기고 가족을 부양해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최근 SNS상에선 드레이크를 두고 그가 ‘래퍼’인지 ‘엠씨’인지를 가리는 설전이 오간 적이 있다. 내 기준에서 그는 래퍼가 분명하고, 2010년대 켄드릭 라마와 제이콜을 끝으로 진정한 엠씨들과 리릭시스트들은 멸종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체, 그 많던 리릭시스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 임재린(‘세이투셰’ 대표)

다시 세상을 이롭게 – 착한 예능

플랫폼이 다양화하며 프로그램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을 빠르게 가로챌 수 있는 소위 ‘마라맛’ 예능을 만드는 게 관건이 되어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홀린 듯 보지만, 요즘 유행하는 스낵성 콘텐츠를 본 후 뒷맛이 씁쓸해지는 건 혹시 나뿐일까?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익 예능이 대세였다. 정지선을 지키면 냉장고를 선물하는 <양심냉장고>, 전 국민에게 독서 열풍을 일으킨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소외된 이웃의 집을 고쳐주는 <러브하우스> 등의 프로그램은 웃음은 물론 사회적 이슈까지 녹여내며 예능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이후에는 <무한도전>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선한 영향력을 전달했지만 소재 고갈과 시청률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출생자들인 알파 세대가 등장하며 이른바 ‘착한 예능’이 다시금 부활하지 않을까 점치는 PD들이 주변에서 여럿 보인다. 알파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과 ESG에 관심이 높고, 그들 스스로가 소비자이자 제작자라는 점이다. 자연스러운 웃음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까지 생각하는 세대. 때문에 이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춘 ‘진정성’을 녹여낸 콘텐츠가 다시금 방송가에 돌아오지 않을까? 편안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의미를 담은 프로그램, 2000년대 흥했던 착한 공익 예능이 재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태희(프리랜스 PD)

시끌시끌했던 낭만의 시대 – 스케이트보드 온라인 커뮤니티

‘보드 잘 타는 사람들하고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부하지만 초보 스케이터가 기술만큼이나 알고 싶어 하는 팁이다.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꾸준히 열심히 타고, 가끔 음료수도 건네다 보면 언젠가 그들 무리에 섞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렇게 길고 복잡한 과정을 덜어준다. 90년대 PC 통신으로 이륙한 ‘스케이트보드 온라인 커뮤니티’는 포털 사이트의 카페나 클럽, 자체 웹 커뮤니티로 이어지며 고공 성장했다. 지역별로, 혹은 마음 맞는 이들끼리 뭉친 각각의 그룹은 대회나 행사를 통해 전국구 모임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뉴비’들을 품어주어, 한국 스케이트보드 문화 성장의 기틀을 세웠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커뮤니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줄줄이 문을 닫았고, 당시 그룹을 이끌던 핵심원들이 인생의 갈림길 뒤편으로 사라질 때 바통을 이어받을 뒷심 좋은 주자도 없었다. 그때 마침, 인스타그램이라는 강력한 소셜 매개체가 등장했다. 그러나 뉴비들이 ‘인싸’들의 탄탄한 그물망을 비집고 들어가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것이 내가 인스타그램을 온라인 커뮤니티의 완벽한 대안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옛 시절의 커뮤니티를 키보드 배틀과 ‘좆목질’로만 바라보며, 커뮤니티 문화의 부활을 꺼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커뮤니티 덕에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성장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조광훈(스케이트보드 매거진 <데일리 그라인드> 편집장)

자연, 사람, 공간과 교감했던 – 대규모 조각 및 설치 작품

오늘날 미술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예술 총감독 체칠리아 알레마니를 선임해, 참여 작가 90%가량이 여성이던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불 지핀 여성 작가 돌풍이 거세다. 여기에 전 생성형 AI가 예술적 활동을 돕는 ‘도구’로서 활약하며 창작자 자리까지 넘보기에 이르렀다. 여성에 대한 ‘뒤늦은’ 재조명은 응당 마땅하다 여기나, 유행에 민감한 소셜미디어 숏폼처럼 휘발성 짙은 미디어를 활용한 작품의 물결 속에서 미술관 안팎에서 공간과 묵묵히 감응하던 대규모 조각, 설치 작품이 유난히 그립다. 이를테면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나 뉴욕 MoMA 야외 정원에 들어선 리처드 세라의 무게감 넘치는 거대 조각 작업, 혹은 휴스턴 로스코 채플을 마주한 작은 연못 속 바넷 뉴먼의 대형 조각 ‘브로큰 오벨리스크’처럼 자연 그리고 사람과 교감하는 작품 말이다. 작품과 닿은 공간이 조각의 부차적 개념이 아닌, 그 자체로 관람객 앞에 조각과 동등하게 대면해 지각 경험에 영향을 주고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는 대규모 설치작을 상시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을 국내에서도 하루빨리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 황다나(미술 칼럼니스트)

애꿎게 생략된 쓸모들 – 문선과 몰딩

‘무문선’, ‘무몰딩’ 인테리어를 홍보하는 포스팅을 SNS상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행이 휩쓸기 전 한국 아파트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문선과 몰딩, 걸레받이는 모두 고스란히 그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평활도가 낮은 철근 콘크리트조의 아파트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고안해낸 디테일이다. 집을 이루는 각 부위의 미감을 조율하지 못한 채 적용된 이런 디테일들은 그 시절 집의 풍경을 어수선하게 만들곤 했다. 시간이 지나 차라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하자는 방향으로 스타일을 통일하는 것이 그나마 손쉽게 많은 사람을 만족시킨 해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나 방문은 보통 나무로 만들고, 벽은 페인트나 벽지로, 바닥은 목재나 석재로 마감한다. 서로 다른 재료들은 수축과 팽창의 정도가 다르고, 서로 다른 재료들은 서로 다른 시공자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기에 이를 중재하는 부재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즉 몰딩과 문선은 언제나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잘 조율해내야 하는 것인 셈이다. 건축에서 좋은 존재 이유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던한 요즘 집에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로 촌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문선과 몰딩. 이제는 다시금 삭제와 생략 대신 필요한 것들이 제자리에서 필요한 일을 하게 하는 디자인의 귀환을 바라야 하지 않을까? 한 수종으로 된 마루와 적정한 높이의 걸레받이를 함께 골라보는 것은 어떨까. 내 소중한 침실로 들어가는 관문을 기념해주는 잘 다듬어진 문선, 그 문선의 형제와도 같은 천장 몰딩을 도입하는 것은?
– 남호진(건축사사무소 ‘김남건축’ 소장)

마라맛 이전의 슴슴한 맛 – 멜로물

비록 멜로 영화 붐 시절을 오롯이 경험하진 못한 세대지만, 언니 오빠들이 풀어주는 ‘썰’들을 귀동냥으로 들으며 그 당시의 분위기를 익힐 순 있었다. 그래서일까? 데이트한다 치면 생각 없이 영화관으로 향하곤 했다. 간질간질한 연애 초기, 부스터를 달아주기에 멜로 영화만 한 게 없었다. 하지만 멜로 영화가 극장가의 최고 히트 상품이 되자 곧이어 양산형 작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랑한 젤리, 솜사탕 집어 먹듯 손이 많이 갔고 너무 먹어서 그런지 질리기 시작했다. 멜로라는 장르가 그저 그런 흔한 것이 되면서 그 사랑 이야기보다 네이트판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 시대가 찾아온 거다. 이후 OTT란 신세계가 열리고 콘텐츠가 다양화되면서 제작사들은 오랜 시간 멜로에 쏟던 공력을 자극적인 장르물에 쏟았다. 간간이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야심 차게 준비한 멜로물이 나왔지만 제대로 힘 한번 못 쓰고 극장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사이 중국, 대만에서 완성도 높은 멜로 영화를 만들어냈고 그 판권을 우리가 수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수입 멜로물이 내 눈물, 콧물을 뽑아갈 때면 급해진 마음에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가 더 잘 만들 수 있을 텐데!’ 온갖 블록버스터와 각종 세계관을 섭렵하며 도파민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반복하고 있지만 어딘지 가슴이 허하고 휘발이 빠르다. 다시금 ‘마라맛’이 아닌 슴슴한 사랑 이야기가 재림하면 어떨까?
– 김수현(저스트엔터테인먼트 마케팅 사업부 실장)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장식적이었던 – 아르데코 조명

과거 세 들어 살던 집에는 아마도 그 집이 지어졌을 때부터 자리를 지켰을 샹들리에가 거실 천장에 달려 있었다. 나뭇잎을 닮은 옥색 장식이 달린 금속 조명. 소켓마다 각기 다른 색의 전구가 끼워져 그간의 세월과 무관심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이 조명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유년 시절을 보낸 80~90년대에는 보편적으로 이런 아르데코 스타일의 조명이 쓰였기 때문이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집에는 별도의 요청이 없다면 늘 사각형의 LED 박스가 시공되고 대체로 사용자도 별 불만을 갖지 않는 듯하다. 이를 생각하면 과거의 집은 참 볼거리가 많은 낭만 가득한 곳이었다. 재력에 따라 크기와 장식의 섬세함은 달랐을지라도 각자 나름의 취향을 바탕으로 오래 쓸 만한 조명을 골라서 달곤 했다. 반면 요즘 대중에게 소비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은 무색무취의 취향이라 할 만큼 건조해서, 가구뿐만 아니라 따뜻해야 할 조명까지도 창백하게 만들고 있다. 주기적으로 매거진과 트렌드 리포트에서 다음 트렌드로 아르데코를 예고했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정말 때가 되었다. 분명 지금의 집에는 더 많은 컬러와 다채로운 장식이 필요하다.
– 박지우(‘오드플랫’ 대표)

이제는 없어진 뜨거움 – 동인(同人)

어느 업계든 비슷한 것 같다. 잘나가는 사람은 잘나가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해서 다양한 유닛 활동을 한다. 으레 아이돌, 가수, 밴드가 그렇듯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가 여러 콜렉티브 활동에 몸담는게 미술계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통상적인 모든 유닛 활동처럼 콜렉티브 활동은 멤버들의 관심사를 신속하게 확장하는 데 유리하고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름과 명성, 영향력과 부가가치를 남긴다. 모든 것이 가속하는 세계에서 미술이 더는 빨라질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를 때 콜렉티브의 가속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콜렉티브 활동은 목표 지향적으로 최적화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그럴싸하고 거의 단점 없는 활동이다. 무엇을 선언하는 일, 격렬하고 담대하게 주장하는 일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현재의 내가 선명해질수록 미래의 내가 위협받기 때문일까? 내가 나의 적이 되는 것. 콘텐츠가 영원히 살아있는 세계의 딜레마다. 정갈하고 안전한 말이 보장하는 야망이 참을 수 없이 지루할 때, 옛 동인 활동이 제시했던 엉성하게 혹은 뜨겁게 쓰인 미학적 매니페스토가 읽고 싶다.
– 윤율리(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아트워크
채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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