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의 남성복 데뷔전

이예지

세상에 앙코라를 외치다

밀란 남성 패션위크 첫날 열린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의 남성복 데뷔는 2024 S/S 시즌 여성복 컬렉션에 대한 ‘미러링’으로 진행됐다. 브랜드 헤리티지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은 물론, 사바토의 절제되고 간결한 미학을 통해 구찌의 새로운 챕터가 탄생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던 지난 1월, 밀라노는 낮고 조용하게 들뜬 분위기였다. 2024 F/W 시즌 밀라노 남성복 패션위크의 첫째 날 구찌의 새 수장 사바토 데 사르노의 남성복 데뷔가 예고되어 있던 터였다. 한국 앰배서더로는 박재범과 아이유가 참석했고, 게스트 중 멀끔한 재킷을 입고 참석한 엘리엇 페이지가 시선을 모았다. 자레드 레토가 없는 구찌 패션쇼라니, 새로운 인물들이 프런트로를 장식한 이탈리아 메가 하우스의 새로운 챕터가 더욱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컬렉션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제철소인 밀라노 북부의 폰데리아 카를로 마키에서 열렸는데, 쇼장에 들어서 첫 번째 룩이 나오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깨달은 사실은 이번 남성복 데뷔쇼가 사바토의 진정한 첫 번째 데뷔쇼, 지난 2024 S/S 여성 컬렉션에 대한 ‘미러링’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런 ‘반복’은 거대 하우스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철저하게 헤리티지를 분석하고, 하우스의 상징들을 절제되고 간결한 자신의 미학으로 더욱 단단하게 다지며 다시금 새 출발선에 선 디자이너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두고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좋아하진 않아요”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구찌의 아이코닉한 재키백과 홀스빗 로퍼가 다양한 버전으로 등장했다. 재키백은 여성 컬렉션보다 한층 커진 사이즈로 하우스를 상징하는 여러 컬러를 접목했고, 두꺼운 솔을 더한 로퍼는 클리퍼를 닮은 모양으로 펑크스러움이 가미됐다.

여성복에서 이미 엿봤듯, 프라다, 발렌티노 같은 정통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를 거친 그답게 고급스러운 소재와 각 잡힌 테일러링은 감탄할 만큼 훌륭했다. 감도 있는 컬러 팔레트, 정제된 테일러링의 재킷과 코트가 주를 이뤘고, 기다랗게 휘날리도록 같이 스타일링한 스카프가 드라마틱한 신을 연출했다. 하우스의 상징적인 구찌 홀스빗 로퍼와 재키백이 다양한 버전으로 재해석됐고, 간결하게 로고가 장식된 트랙 재킷, 두툼한 후디, 연두색 항공 점퍼 등 적절하게 스포티함이 가미된, 평소에 자주 입을 듯한 일상복의 럭셔리화가 남성복에서도 두드러졌다. 이따금 등장한 크리스털 이브닝웨어나 페더 장식 코트는 미니멀해진 컬렉션에 화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다만 사디스트적인 가죽 장갑, 맨살에 두른 스카프는 어딘가 모를 사바토의 관능적이고 로맨틱한 면모를 짐작하게 했다.

밀라노는 사바토가 처음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고 말한 곳이다. 실크 초커로 된 스카프, 크리스털 칼라와 베스트, 무거운 목걸이 등은 모두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크 론슨이 제작한 쇼 음악 ‘Not Enough’에서는 프랑스 뮤지션 Lucky Love가 ‘Masculinity(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이어 쇼장에 앙코라가 가득 메아리치며 쇼가 막을 내렸다. 구찌 앙코라는 “구찌를 통해 다시 패션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기회”라며 사바토의 비전을 다시금 게스트들에 각인시켰다. 이탈리아성, 장인 정신, 좋은 취향, 아름다움. 현재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장기를 능숙하게 보여준 사바토의 다음 컬렉션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사진
COURTESY OF G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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