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미노루 노마타의 한국 첫 개인전 <映遠 – Far Sights>이 열리고 있다
우리가 발 디딘 곳에서 너무나 먼 어느 세계의 풍경을 캔버스에 펼치는 화가, 미노루 노마타(Minoru Nomata). 그의 한국 첫 개인전 <映遠 – Far Sights>가 열리고 있다. 때로는 숭고한 감정마저 안겨주는 그림들이 평안함과 공허함이 뒤섞인 미지의 세계로 초대한다.
작가의 뒤편에 걸린 작품 ‘Points of View-31’(2004)을 두고, 작가는 뉴욕에서 벌어진 9·11 테러 사건을 언급했다. 불완전한 구조물을 지지체가 받쳐주는 그 모습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허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어떤 힘을 느낄 수 있다.
전시 중인 화이트 큐브 서울의 모습.
도쿄가 메가시티로 변하기 전이었던 20세기 중반, 개울이 흐르는 동네에서 기모노 염색공의 아들로 태어난 미노루 노마타(Minoru Nomata)는 부모님이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옷감에 물을 들이고 씻어내는 모습을 구경하며 자랐다. 풍족하지는 않았던 그의 유년 시절은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내며 풍요로워졌다. 그는 집 안에 굴러다니던 나무 조각으로 직접 장난감을 만들거나, 처음 접한 미국이나 영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SF 소설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1955년생인 그는 학생운동의 흥망성쇠와 폭발적인 경제 성장, 버블의 붕괴와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거대한 자연재해 등 일본 사회의 극적인 변화를 모두 겪은 세대다. 일본은 삶의 모든 분야에서 분류와 체계가 명확한 사회가 되어갔고, 청년 미노루 노마타는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창조적 열망을 웬만큼 충족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창작을 향한 마음에 온전히 문을 여는 건 시간문제였다. 1980년대 도쿄의 미술계는 대안적 에너지로 끓어올랐고, 노마타는 빈 창고를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개조한 사가초 익스히비트 스페이스(Sagacho Exhibit Space, 1983~2000)에서 1986년 첫 전시를 치렀다. 예술학교를 졸업한 디자이너가 창조한, 도무지 현실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물을 묘사한 그림. 미술계는 전통적 일본 미술이나 작가의 유형과는 한참 거리가 먼 미노루 노마타의 등장을 열렬히 반겼다. 그가 2024년 1월 12일부터 3월 2일까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첫 개인전 <映遠 – Far Sights>로 우리에게 인사한다. 비칠 영, 멀 원. 일본에서는 ‘먼 광경을 투영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가 제목에 있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풍경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발 디딘 세계 너머에서나 느낄 법한 기이한 감각을 안겨준다. 이 평온함은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안겨주기도 한다. 전쟁과 테러와 자연재해가 벌어진 땅의 폐허에 새로운 풍경을 건축해가듯, 자신만의 이미지로 세상을 창조하는 그를 갤러리에서 만났다.
번호가 붙은 작품명들이 암호 같기도 하다. ‘Ascending Descending-8’(2018).
당신의 작품에는 웅대하고 정교하게 묘사된 미지의 구조물이 등장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뭔가를 그리게 되었다. 기모노 염색 일을 하는 부모님이 굉장히 바쁘셨기 때문에 놀이 자체도 내가 만들어서 놀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작은 정보를 가지고서 내가 좋다고 느끼면 상상으로 더 내용을 만들어보고, 부풀려가는 작업을 했던 셈이다. 그런 놀이가 지금의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아주 작은 스케치에서 시작해 적어도 열 장 정도를 그리다 보면 거기서 다른 형태가 도출되고, 거기에 시간을 들이면 점점 더 정돈된 작품이 나온다.
작업을 할 때 상당히 많은 스케치를 하면서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자료를 모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쌓아온 스크랩북이 아주 많다. 무료 전단지나 카드 회사 광고물, 신문 같은 것들인데, 매일은 아니지만 지금도 계속 스크랩한다. 종종 그 스크랩북을 보면서 일상에서 마주친 것이나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 등을 반추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작품에 반영되는데, 형태의 비율이나 모양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어떤 분위기나 기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을 만들 때는 그걸 모르다가 시간이 지나고서야 작품의 어떤 면이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있다.
그런데 작품들을 보면, 그 세상 안에는 사람의 존재가 없는 듯하다. 무언가 시작되기 직전의 모습인지, 어떤 일이 끝난 후 사람들이 떠난 곳인지 모호한 느낌이다. 작품 속 세계에는 누가 살고 있나?
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다만, 작품을 본 뒤에 너무 현실적이고 생생한 감각보다 눈앞의 상황에서 벗어난 어떤 편안함 같은 그런 느낌이 남길 바란다. 거기에 이르기만 한다면 해석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내가 늘 생각하는 건 모든 것을 하나의 의미로만 파악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내 작품이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도록 아주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보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생각을 부풀릴 수도 있고, 하나의 작품 안에서 서로 부딪치는 생각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 작품 중 ‘포인트 오브 뷰-31’이 그런 작품이다. 거대한 호의 반쪽을 지지체가 받치고 있는 이 작품은 사실 나머지 절반을 그린 다른 작품과 한 쌍을 이룬다. 그 작품은 지금 미국 뉴욕에 가 있다.
번호가 붙은 작품명들이 암호 같기도 하다. ‘Eastbound-25’(1999).
나머지 반쪽이 멀리 떨어진 도시에 있고, 두 그림이 합치면 온전한 하나의 호가 보인다는 사실이 멋지다. 해석이 더 풍부해질 테니까.
사실 두 개의 그림이 한 쌍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거기에서 또 느껴지는 약간의 슬픔이나 고독함이 있달까. 하지만 이미지를 보면 거대한 구조물과 그 밑을 받쳐주는 지지체가 있다. 허무한 분위기가 나지만, 그런 허무함마저도 무언가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요하고 현실 너머의 세상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당신의 작품은 그 자체로 일종의 평안함을 안겨준다.
나도 종종 내 그림 안에서 평안을 구한다. 1990년대 초 딸이 크게 아파서 한 달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마음의 평안을 위해 돌이나 산 같은 자연의 사물밖에 그릴 수가 없었다. 인공적인 것은 전혀 그려지지가 않았다. 때로는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생각하면서 평안을 찾기도 한다. ‘건축’은 차갑고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나는 그림에 감정을 담을 때도 있다. 주로 빛과 어둠을 통해서. 배경의 음영만이 아니라 이미지를 흐리게 만들기도 하고, 빛의 방향을 순광에서 역광으로 설정하거나 하늘에 뜬 구름을 통해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에 사람이 등장하진 않아도 일종의 분위기나 기운, 기세가 존재한달까.
작품들의 재료가 유화, 아크릴, 수채 등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더 큰 작품으로 전개를 앞둔 스케치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다. 한국에서의 첫 번째 전시인 만큼 다양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나?
재료마다 작품이 완성됐을 때 그 느낌의 차이가 크다. 그런 점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서도 어떤 재료로 그것을 구현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작품을 완성한 뒤에 이미지를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그려볼까 생각할 때도 있고, 한국에서 나를 처음 선보이는 만큼 전시작으로 나다운 작품, 나를 잘 보여주는 대표 작품을 선택하려 했다. 그중에서도 꼭 소개하고 싶었던 작품은 콩테와 목탄, 파스텔로 그린 ‘파 사이트’ 연작이다. 동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해서 골랐다. 말하자면 여백을 읽어내는 힘을 초대하는 그림들인데, ‘한국에서 전시를 한다’라고 생각할 때 직감적으로 이 연작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대부분 시리즈 작업을 하고, 긴 시간에 걸쳐서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업한다. 그러다 보면 늦게 완성되는 것과 좀 빨리 완성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같은 주제로 만든 연작이지만 서로 꽤 달라 보이는 경우도 생긴다.
어두운 심상이 반영된 ‘Ghost-2’(2014).
캔버스에 그린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이지만, 캔버스 옆면까지 그림이 이어지는 ‘고스트’ 연작을 보면 마치 더 큰 어떤 이미지에서 일부를 오려내 캔버스로 가져온 것 같다.
일본 미술에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암시하는 전통이 있다. 거대한 파도를 묘사한 호쿠사이의 판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우키요에만 보더라도 그렇다. 나 역시 작품에서 무언가의 일부만 보여주면서도 전부를 알거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걸 무척 좋아한다.
수많은 스케치와 스크랩북, 여러 개를 동시에 창작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은 시간을 초월한 듯한 인상도 있다.
실제로 그렇다. 내 스케치와 스크랩북, 거기서 이어진 작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그러니까 그 안에는 나의 과거, 작품을 만드는 바로 지금 나의 관심사에 해당하는 현재,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신경이 쓰이거나 마음에 걸리는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 심지어 같은 이미지도 다른 시기에 보게 되면 여러 생각이 중첩되면서 해석이 달라진다. 그 또 다른 해석과 당시의 세상을 겹쳐서 보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고정된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의 일상이 궁금하다. 작품을 창작하는 매일의 루틴은 어떻게 이뤄지나?
‘온종일 작업한다’가 내 루틴이다(웃음). 지금 내가 사는 맨션에서 위층이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고, 아래층이 작업실이다.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순간 창작을 하기 때문에 루틴이라고 할 만한 건 없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특별한 의식도 없고. 눈뜨면 작업실로 내려가고, 때가 되면 위층으로 올라가서 가족과 식사하고 정돈한 다음 다시 내려가서 계속 작업하는 식이다.
작가가 한국에서 꼭 소개하고 싶었다는 ‘Far Sights-7’(2009) 연작.
작업할 때 미니멀 테크노나 앰비언트 장르를 즐겨 듣는다고.
음악은 작업을 할 때 감정 이입에 큰 도움이 된다. 어떤 느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 대한 상상력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그래서 효과적으로 창작을 돕는 것 같다. 몰입을 위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앰비언트 음악은 브라이언 이노를 통해 접했는데, 처음 들었을 땐 도저히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음악만 듣는 게 아니라 클래식, 재즈, 혹은 뭐라 분류할 수 없는 음악도 많이 듣는다. 요즘은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옛 영화 사운드트랙을 많이 듣는데, 음악이 나를 완전히 다른 장소로 데려가주는 느낌이다.
분류할 수 없는 음악을 즐겨 듣는 것처럼, 당신의 작품 혹은 작가로서의 당신 역시 고정된 분류와는 거리가 있다. 1986년, 당신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작가로 데뷔했다.
사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 건 내가 원하는 창조적 활동을 하면서 생계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예술이나 미술과 거리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런 영향이 있어선지 내 작품도 전통적으로 쉽게 분류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전시를 한 사가초 익스히비트 스페이스 역시 그런 곳이었다. 이곳을 설립한 고이케 카즈코는 많은 것들에 분야와 분류가 정해져 있는 일본 사회와 예술계에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고이케 카즈코는 이후 다나카 이코와 함께 무인양품을 만든 사람인데, 그런 그녀가 만든 공간 덕분에 내 작품을 보여줄 수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그 시절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기는 어렵다.
도쿄와 서울은 그리 멀지 않다. 이곳에서 두 도시의 차이점 혹은 서울만의 리듬을 느꼈나?
한국은 디지털 기술이 굉장히 빠르게 발전하고 변화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서울에 와 직접 보면서 많이 놀랐다. 나는 상당히 아날로그적 사람이고, 오랫동안 일본에서만 미술 작가로 활동했다. 그런데 디지털 세대인 딸이 내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면서 일본을 벗어나 서울 같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가 내게 연락한 것도 내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디지털에 대해서는 상당히 묘한 감정을 느낀다.
- 포토그래퍼
- 박종원
- 글
- 박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