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친구를 잃은 여자가 밀고 나아가는 유려한 복수극.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의 옥주는 해야 할 일을 해낼 때까지멈추지 않는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야 한 편의 공연이 끝나는 것처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흘의 기간 중 가장 뜨거운 온도로 향하기 시작한 첫 금요일, 10월 6일. 전종서와 이충현은 부 산에 있었다. 이날 오후 공개한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는 부산 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인 ‘한국 영화의 오늘 – 스페셜 프리미어’에 초청받았다. 국제 영화제 공식 초청작들이 개봉을 앞두고 국제 영화제에서 최초 상영하는 관례에 따라 <발레리나>는 하루 전날 센텀시티에 있는 극장에서 먼저 공개한 상태였다. 칸 영화제의 정신은 여전히 ‘영화가 역사의 일부가 되려면 극장을 거쳐야 한다’는 주의이지만, 적어도 2023년의 부산에서는 영화를 그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극장 대신 OTT라는 개봉관으로 향한 작품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산업의 흐름을 고스란히 껴안은 부산에서 영화는 그저 모두 영화다. 다만 좀 더 부지런하고 특별한 관객들이 있을 뿐이다. 집 안에서 폰으로, 노트북으로, 혹은 TV 화면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가 지극히 자연스러워진 지금, 누군가는 손도 눈도 빠르게 영화제 예매 전쟁을 기꺼이 치른다. 특히 영화제를 통해 넷플릭스 작품을 스크린으로 본 이라면 전 세계 시청자 중에서 상당히 희귀한 경험자의 지위를 갖는 셈이다. 출연 배우나 감독,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을 그들에겐 전리품이 주어질 만하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극장에서 <발레리나> GV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틴 케이스에 든 엽서 세트와 키링 등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는 굿즈를 선물로 받았다. 영화의전당 근처 한 카페가 잠시 <발레리나>의 네온 빛으로 물든 밤도 있었다. 이충현 감독과 전종서, 김지훈, 박유림 배우, 또 이 작품으로 첫 영화음악 감독에 도전한 프로듀서 그레이가 60여 명의 초대받은 팬과 만나는 이벤트 자리였다. ‘영화감독이 디렉팅하는 화보’를 위한 우리의 논의는 부산에서 <발레리나>를 둘러싼 관계자들이 밀도 있는 일정을 소화하는 사이에도 틈틈이 이루어졌다. 사실 화보에 영화감독을 끌어들이는 이 특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까지 망설일 이유는 충분했다.
<더블유> 미국판은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등 여러 영화 시상식이 연달아 열리는 시기에 맞춰 연초마다 ‘디렉터스 이슈’라는 테마로 감독판 화보를 선보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기획한 화보에서는 미셸 윌리엄스와 세스 로건을 비롯한 <파벨만스>에 등장하는 가족이 모여 사막으로 소풍을 떠났다.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 속에서 파도가 집어삼킬 뻔했던 얄리차 아파리시오를 화보에선 잔잔한 바닷가에 세워두고 촬영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하녀가 된 몰락한 귀족 가문의 엠마 스톤을 데리고 이런 콘셉트의 화보를 찍었다. ‘집 안에서도 오트 쿠튀르 의상을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한 채 15마리의 개와 사는, 어느 정신 나간 중산층 여인의 하루’. 할리우드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패션지가 끌릴 만큼 작품과 감독, 배우라는 세 요소가 균등하게 매력적인 예를, 모두가 맞아 떨어지는 타이밍에 만나기란 쉽지 않다. <발레리나>와의 프로젝트는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했다. 물론 매달 패션지가 작업하는 문법을 다소 벗어나는 모험이 될 수 있다는 각오도 해야 했지만.
“영화에서 옥주가 발레리나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또 다른 의미로 옥주 역시 발레리나예요.” <발레리나>를 쓰고 연출한 이충현 감독의 말이다. 영화를 만들 때 그는 주인공 옥주의 유려한 액션 연기와 복수 과정 자체가 하나의 발레 공연처럼 보이길 바랐다. 재밌는 건 음악감독을 맡은 그레이 역시 시나리오를 보며 ‘어떻게 보면 옥주라는 인물이 곧 발레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그레이는 옥주와 ‘빌런’이 거칠게 맞붙는 식의 장면을 일종의 공연 무대로 연상하면서, 발레 용어를 제목으로 쓴 트랙들을 만들기도 했다. “화보에서는 전종서 배우를 좀 더 발레리나에 가까운 직접적인 이미지로 보여줘도 좋겠어요.” <발레리나>의 주인공은 이제 핏자국을 지우고서 발레코어룩을 입었다.
이 영화는 스타일리시한 매무새로 완성한 복수극이다. 경호원 출신 옥주(전종서)가 발레리나인 친구 민희(박유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접하고,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최프로(김지훈)를 쫓는 복수극. 피의 복수를 향해 치닫는 액션 장르물의 줄거리는 대개 간단한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사보다 출혈의 양이 많을 때 복수의 맛이 달콤해지기도 한다. 다시, 그 한 문장은 이렇게 뻗어나간다. 왜 복수하는가? 복수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한 작품에서 피바다를 만드는 인물들의 동기는 이야기가 흐르며 벌어질 무자비한 응징과 괴력의 근원이 된다. ‘죽은 아내가 남긴 강아지를 놈들이 죽였기 때문에’, ‘배신자를 처단하고 내 자식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그들은 움직인다. 무미건조하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 <발레리나>의 주인공은 하나뿐인 친구를 잃었다. 옥주가 몸을 사리지 않고 행동으로 나서게 만드는 그 상실감은 옥주가 되어야 할 배우에게 결정적 단서다. “작품이 미술과 촬영 편집 등을 거치면 애초 상상했던 것과 다른 톤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는 게 재밌죠. 우선 시나리오만 봤을 때 제가 받은 느낌은… 아주 슬펐어요. 슬프고 아름다운, 시적인 인상이 강한 이야기였어요.”
전종서가 시나리오에서 얻은 감정은 자신의 옥주를 만드는 데 중요한 태도가 되었다. 여배우로서 복수와 액션이라는 키워드를 소화하기 위해 레퍼런스가 될 만한 기존 작품들을 검토했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의외의 대답을 봐도 그렇다. “딱히 그렇진 않았어요. 그보다 저한테는 민희 역할을 누가 맡을지가 아주 중요했어요.” 텍스트상으로만 존재했던 그 인물이 어떻게 구체화되어 눈앞에 나타날까? 전종서에게 민희는, 작품을 위해 서로 지탱하고 받쳐줘야 하는 핵심적 축이었다. “저는 민희가 럭비공처럼 아주 통통 튀는 인물일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박유림 배우는 참 깨끗하더라고요. 같이 작업하면서 강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고요. 연기에는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배어 나와요. 민희 역시 그랬어요. 여리고 쉽게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전종서는 티빙 시리즈 <몸값>,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 경제구역>, 할리우드 영화인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을 통해 야생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적 있지만, 이번에는 집중적인 액션을 해내야 했다. 옥주가 독보적 실력을 지녔다는 점은 도입부에서부터 드러난다. 비니를 푹 눌러쓴 채 어슬렁거리듯 마트에 들렀다가, 시비 걸어오는 과격한 남자들을 가뿐히 처리하고 무심히 제 갈 길 가는 여자. “저는 대본을 아주 많이 읽고, 제가 생각해둔 연기가 맞는지 감독님들에게 물어보는 걸로 모든 작품을 시작해요. 그 과정에서 감독과 내가 얼마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조율하죠. 사전에 연기 준비는 따로 하지 않는 편이에요. 대사 외에는 뭔가를 외우거나 정해진 대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요.”
합의된 움직임이 중요한 액션 신을 소화하는 건 배우에게 과격한 안무를 수행하는 일과 비슷하다. 현장에 던져진 후 동물적 감각으로 연기하길 즐기는 전종서는 설계된 안무를 해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하다 보니 그냥 연기보다 액션이 더 재밌는 거예요!(웃음) 몸을 부딪치고, 땀 흘리고, 그렇게 얽히면서 하는 게. 액션 팀과 금세 친해졌어요.” 은밀했던 재능이 이렇게 밝혀지는 걸까? 전종서의 몸은 사실 오래전부터 헬스, 요가, 자전거 타기, 수영 등등을 즐겼던 몸이다.
<발레리나>에서 마음에 드는 점 중 하나는 그 누구도 청승을 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감상적인 면을 자아내며 관객을 설득하려 할 때 으레 등장하고야 마는 신파의 낌새가 이 영화엔 없다. 대신 옥주와 민희, 두 친구가 과거에 함께한 보통의 날들이 복수극 사이사이 플래시백으로 흐른다. 이충현 감독은 <발레리나>를 만들 때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소재가 영화의 세계로 들어오는 한, 이제 펼쳐질 일은 통쾌한 응징이다. 그 과정에서 <발레리나>는 시각적 즐거움이 있는, 잘 세공된 영상미를 택했다. 미술적으로는 3D 아티스트들이 만든 비주얼이나 추상적 이미지 등 가상의 공간에서 더 영감을 얻었다. 그건 꽤 과감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 작품은 액션 장르이지만 그것만이라고 말할 순 없어요. 촬영, 미술, 음악 등에서 미적으로도 아름다운 동화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이충현의 동화에는 예를 들면 이런 페이지도 있다. 놀이공원에서 볼 법한 귀여운 트럭 속엔 총기류가 가득하다. 황량한 벌판과 파란 하늘이 이루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화염 방사기가 내뿜는 거대한 연기 구름이 피어오른다. 잔혹함과 예쁨, 탁한 피가 낭자한 세상과 갖가지 색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어항 속 세상 등이 만들어내는 낙차는 <발레리나〉의 재밌는 지점이다.
영화 산업에 몸담은 이들에게서 ‘이제 신인 감독에게 투자하려는 모험가는 거의 없다’는 소리를 들은 건 꽤 오래전부터다. 그 말은 ‘잡지계는 사양 산업이다’와 비슷한 맥락의 투정이었을까? 1990년 생인 이충현 감독은 서른 즈음에 첫 장편영화 <콜>을 촬영했다. 그를 주목받는 젊은 감독으로 만든 건 중년 남성이 모텔 방에서 여고생과 화대를 흥정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단편영화 <몸값>이다. 14분 안에 강렬한 반전의 쾌감을 안겨준 그 이야기는 다른 감독의 손에서 참신한 DNA를 더욱 확장한 3시간짜리 버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종서와 박신혜가 출연한 스릴러물 <콜>은 전종서의 두 번째 영화다. ‘이창동의 선택’과 함께 데뷔한 배우가 다음 스텝을 내딛으며 ‘이 구역의 미친 여자’로 활약할 때, 이충현은 자신을 비롯한 신인들의 패기가 현장에서 기분 좋은 호흡으로 이어졌던 걸 기억한다. “<콜>을 작업하면서도 느꼈지만, 전종서 배우는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돌변하는 면이 강해요. 이미 어느 정도 분량을 찍었다고 생각하고서 좀 두고 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을 보여줬죠. 결국 그렇게 담은 장면을 사용한 경우가 많아요. 배우가 그렇게 해주면 연출하는 입장에선 뜻밖의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어요.”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화보 촬영장에서,
몇몇 순간.
검정 테 안경을 쓴 사람이 이충현 감독,
그 옆에 검정 비니를
쓴 사람은 조영직 촬영감독이다.
전종서와 두 감독은 영화 <콜>에서도 함께 작업했다.
이번 <더블유> 화보의 사진가는 <콜>에 이어 <발레리나>에서도 이들과 함께 작업한 조영직 촬영감독이다. 영화 <경주>, <피에타>, 〈꿈의 제인> 등 주로 독립 영화에서 연출자의 눈이 되어준 그 역시 <콜> 작업 때는 ‘장편 신인’이었던 셈이다. 그는 사진에도 애정을 가진 촬영감독으로, 영화 〈파수꾼>의 포스터 작업을 하기도 했다. 화보에서 어떤 비주얼을 만들어가면 좋을지에 관해 회의할 때 이충현은 여러 가지 레퍼런스 이미지를 제안했다. 민트초코 케이크나 총은 영화에 등장한 요소다. “인물이 수조 너머로 보이거나 쭉 늘어선 수조 사이에 있는 식으로 담아보려 해요. 수조 안에 이미 설치된 조명과 반사 효과도 적극 활용하고요. 이 화보 촬영 공간에서 민희의 집 느낌이 많이 나네요. 민희는 없지만 옥주와 민희가 같이 있다는 기분으로 작업해볼 수 있겠어요.”
물고기, 어항, 바다 등은 <발레리나>에서 은유의 이미지로 재차 등장한다. 물고기가 물에서 유영하듯 자유롭게 춤추길 갈망한 한 발레리나와 토 슈즈 대신 총을 지닌 발레리나가 이 작품에 있다. 그리고 복수는 피로한 법이다. 전종서는 말했다. “신기한 점이 있어요. 어떤 작품을 하는지에 따라 제 얼굴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최근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촬영하고 나서 알게 됐어요. 자주 웃고, 예쁘게 바라보고, 사랑스러운 대사 속에서 몇 개월을 지내니까 어느 순간 제 인상에서도 그런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참 신기해요.” 영화 <발레리나>의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더블유> 화보를 마친 후 전종서는 총총걸음으로 촬영 무대를 떠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길을 떠나던 옥주의 뒷모습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