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전위예술가 성능경 작가의 ‘신문 읽기’

김신, 전여울

1944년생으로 한국 1세대 전위예술가 성능경 작가의 ‘신문 읽기’ 퍼포먼스가 <더블유>의 지면에서 펼쳐졌다

면도칼로 신문사의 제호, 광고, 사진만 남겨두고 모든 기사를 오려내어 앙상한 뼈대만 남긴 작가는 텍스트를 오려내며, 신문을 소리 내어 읽고, 다시 오려내기를 반복한다. 촬영이 있던 날, 2023년 8월 10일 자 신문에서 작가가 생선 뼈처럼 발라낸 텍스트는 하나하나 의미심장했고, 작가가 남겨놓은 이미지와 해체된 신문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성능경 작가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창의적 행보는 로에베(Loewe)의 오랜 아이덴티티와 일맥상통한다.

검은색 싱글브레스트 코트, 레이스업 슈즈는 Loewe 제품.

가죽 톱과 팬츠, 레이스업 슈즈, 의자에 걸어놓은 파스텔 컬러 스퀴즈 백은 Loewe 제품.

성능경 작가가 신문의 텍스트를 오려내어 뼈대만 남긴 작품.

성능경 작가가 신문에서 오려낸 텍스트 조각.

“높고도 높은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시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신이시여. 이미 벌써 사망한 신이시여. 두 번 죽을 운명이신 신이시여. 돈이 되는 예술만 돌게 하시는 신이시여. 억울하고 황당해하시는 신이시여. 이제 모두 현현하시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널리 굽어살피소서.” 예기치 못한 태풍이 서울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북상하고 있던 8월 어느 날, 예술가 성능경은 서울 강남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부채에 직접 적은 제사 축문을 소리 내 읽었다.

그 소리는 무척이나 컸기에, 축문 낭송이 시작됨과 동시에 스튜디오에 있던 좌중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축문의 마지막 구절까지 읊은 성능경은 이내 한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로 부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재가 눈처럼 내렸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부채를 쥔 성능경은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 한 명, 한 명 앞으로 다가가 부채질하며 주문처럼 들리는 말을 토했다. “건강하시라, 행복하시라, 돈 많이 버시라.” 그는 리본이 달린 여성용 샤워캡, 타이츠처럼 몸에 밀착된 짧은 팬츠, 새파란 잔디색의 로에베 카디건을 걸친 채였다. 어쩐지 그의 차림은 그를 기인으로 보이게도 만들었다.

작가가 입은 머쉬룸 루스 핏 니트, 데님 팬츠, 레이스업 슈즈, 모델이 입은 테크니컬 새틴 소재의 빨강 드레스, 스웨이드 클로그 슈즈, 퍼즐 백은 모두 Loewe 제품.

작가가 입은 머쉬룸 루스 핏 니트, 데님 팬츠, 레이스업 슈즈, 모델이 입은 테크니컬 새틴 소재의 빨강 드레스, 스웨이드 클로그 슈즈, 퍼즐 백은 모두 Loewe 제품.

신문 오려내기 작업 중인 성능경 작가.

1944년생, 올해로 여든을 맞은 성능경은 요즘 들어 부쩍 ‘신예’ 소리를 듣는다. 1970년대 화단에 등장해 한국 미술사에서 ‘개념 사진’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반세기 넘도록 활동해 왔지만, 세상은 그의 진가를 이제야 알아보기라도 한 듯 최근 들어 국내외에서 그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 3월 백아트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을 시작으로 5월 국립현대미술관 단체전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8월 갤러리 현대에서 개막하는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9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단체전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내년 초 리만머핀 뉴욕에서 예정된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 예술이 예술 아닌 것에 복무하는 것을 극히 경계했던 탓에 오랜 세월 작가는 세속의 현장을 피해 비주류의 궤도에 머물러 있었다.

지난 3월 백아트 서울에서 개최한 개인전만 해도, 1991년 이후 그가 생애 두 번째로 갖은 상업 화랑 전시였다. “내가 요즘에 생각해보면 예술가 같지가 않아요. 무슨 사업가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가난한 길로 돌아갈까도 생각해요. 사실 예술가의 길이란 그런 거거든요. 영어 ‘Prostitute’에는 두 가지 뜻이 있죠. 하나는 창녀, 다른 하나는 예술성을 팔고 포기하는 예술가예요. 사전에 이미 그렇게 정의되어 있고, 사전이 모든 걸 말하고 있는 셈이요. 예술성을 놓치는 것, 예술가에겐 제일 위험한 거죠. 하지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어요. 젊어서 돈을 충분히 번 후에 예술을 하겠다. 그런데 예술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요? 이도 저도 다 필요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예술 생각, 저녁에 잘 때도 예술 생각, 그것밖에 없어요.” 성능경이 말했다.

픽셀 후드 스웨트셔츠, 데님 팬츠, 레이스업 슈즈는 Loewe 제품.

8월 말 생애 세 번째 상업 화랑 전시와 9월 프리즈 서울이라는 미술계의 빅 이벤트를 코앞에 둔 이때, 로에베의 2023 F/W 컬렉션의 키 룩을 담는 <더블유> 화보에 성능경이 함께하는 것. 이는 한평생 예술가로 살아온 그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이례적 사건이기도 했다. “오늘 아침 촬영장으로 나서기 전 집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처음부터 이런 촬영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벌컥 화를 냈어요. 새로운 경험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않겠어요? 화랑 사람도 이번 촬영에서 내가 몇 벌이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 거라고 당부하더군요. 하지만 옷을 갈아입는 건 지극히 ‘일상의 행위’예요. 사람에게 옷을 갈아입고 벗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위가 없죠. 다만 이러한 일상을 약간 특수화 시키면 오늘같이 패션 화보로 불릴 만한 일이 탄생할 테고요.”

초록색 니트 카디건과 쇼츠, 레이스업 슈즈는 Loewe 제품.

부채에 적어온 제사 축문을 읽으며 퍼포먼스를 펼치는 성능경 작가.

패션과 예술 사이의 경계 혹은 위계는 사라지고 옷 갈아입기라는 일상성 혹은 특수성만이 남게 된 이번 화보 촬영은 성능경의 예술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퍼포먼스 작업인 ‘신문 읽기’를 행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 <제4회 앙데빵당>전에서 첫선을 보인 ‘신문 읽기’(1976)는 작가의 시그너처 매체인 신문과 이를 소리 내 읽고 오리는 행위가 결합된 개념적 작업이다. ‘신문 읽기’(1976)의 원전은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 <제3회 ST전>에서 발표한 작품 ‘신문: 1974. 6. 1 이후’(1974)로, 당시 작가는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전시장을 찾아 그날 발행된 <동아일보>에서 사진, 광고만 남겨놓은 채 면도칼로 기사를 오려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앙상한 뼈대만 남은 신문은 당일 하루간 전시장 벽면 패널에 게시됐다. 당시는 유신체제 초중기로 언론 검열이 극으로 치닫던 시기, 어쩌면 검열의 대상이었던 신문 기사를 벼린 칼로 도려내 해체하고 무효화하는 것은 기성 질서에 대한 미학적 저항인 셈이다.

“그 당시엔 신문을 읽고 오리는 행위만으로 관객에게 긴장감을 줬어요. 정치적 상황이 엄혹했기에 사람들은 뒤에서 ‘저 사람 잡혀가는 것 아니야?’라며 수군거렸죠. 말하자면 ‘신문 읽기’는 기사를, 언어를 오림으로써 여백을 만드는 작업이었어요. 여백이 만든 사라진 의미, 잠재태가 무엇인지를 자꾸만 제시하려 했던 거죠.” ‘신문: 1974. 6. 1 이후’ 작업으로 남은 것은 다름 아닌 사진들, 기사를 모조리 오려내자 캡션을 잃고 맥락에서 분리된 사진들이었다. 성능경은 이 사진들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기사를 제거하니까 남는 건 사진뿐이었죠. 종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사진이 상당히 매력적인 거예요. 내가 군대에서 제대한 1973년, 개념미술이 우리나라에 진입했고 당시 한국 화단에선 입체미술이 크게 유행했어요. 그 흐름에서 작가들이 굉장한 물질을 동원하는 거예요. 이우환 선생 같은 경우엔 돌멩이, 유리, 동판, 철판… 하여튼 엄청난 물질을 동원해서 예술을 실현했죠. 그 당시 활동하던 람들은 물성을 통해 ‘나’를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나도 한번 해봤어요. 그런데 아주 무참히 참패를 당했죠. 이후 자연스레 개념미술에서 말하는 ‘탈물질’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미술을 물질로 증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거세한 후 예술을 증언하려는 것. 나에게 사진은 바로 ‘탈물질’하는 것이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사진은 물질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체로 제시되는 것이었죠. 그렇게 1970년대 중반 사진을 매체로서 동원했는데, 이런 사례는 한국에서 처음이지 않았나 생각해요.”

<더블유>와의 작업을 위해 성능경 작가가 부채에 제사 축문을 적어왔다. 그는 큰 소리로 축문을 낭독한 뒤, 불로 태우며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성능경의 말처럼 한국 미술계에서 사진은 계보가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사진을 매체로 국내에 최초로 도입하고 ‘찍는 사진(Taking Photo)’에서 ‘만드는 사진(Making Photo)’으로의 가능성을 엿본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작가 자신이 사과를 먹는 과정을 촬영한 ‘사과’(1976), 미술 잡지가 지닌 문화 권력의 위상에 질문을 던지며 10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신체에 미술지 <공간>을 ‘위치’시킨 ‘위치’(1976), 몸을 폈다 오므리며 반복하는 행위를 12개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수축과 팽창’(1976) 등이 초기 사진 대표작으로, 성능경은 자신의 매우 과정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사진이란 수단으로 기록했다. “내 사진에선 과정이 중요하죠. 다른말로 ‘결론을 유보한다’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결론을 유보하면 더 많은 과정이 축적되고 더 좋은 결론이 유도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과정이 강조되죠. 우리의 삶이란 것도 과정이잖아요. 이러한 유사성, 동질성을 예술에 한번 실현해보고 싶었죠.”

더블브레스트 맥시 코트는 Loewe 제품.

구조적인 형태의 핑크 가죽 톱과 주름 스커트, 램스킨 소재의 부츠는 Loewe 제품.

“(사진가 홍장현에게) 카메라 뭐 쓰세요? 나는 니콘 F2를 썼어요”, “내가 분홍색 샤워캡을 쓰고 모델이 파란색 샤워캡을 쓰는 건 어떨까요? 여성성, 남성성을 바꿔보는 거죠”. 화보 촬영이 있던 날, 그곳에 팔순 노인은 없고 단지 무척이나 호기심 어린 예술가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촬영 도중 성능경의 가방에선 그가 챙겨 온 고무신, 중절모, 색안경 따위가 불쑥불쑥 소품으로 나왔고 그때마다 예기치 못했지만 마침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듯한 절묘한 장면이 연출됐다.

“평생 이 짓만 하고 살았잖아요.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을 한단 말이죠. 대개는 나이 먹을수록 성장이 둔해지면서 기성 사회생활을 하다가 성장이 정지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말하자면 성장의 정지 단계죠. 대부분의 사람은 거기서 마치지만, 다행히 나는 예술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이는 아마 예술의 가장 큰 장점일 거예요.”

파스텔 가죽 재킷과 검정 팬츠, 검정 스웨이드 클로그 슈즈는 Loewe 제품.

작가가 신문에서 오려낸 이미지 중 하나를 물고 포즈를 취한 모델.

여전히 자신을 성장하는 인간이라 말하는 그는 프리즈 서울이 개막하기 하루 전인 9월 6일 고덕동에 위치한 전시장 ‘라이트 룸’에서 외국인 100명과 함께 ‘신문 읽기’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유신체제 시대 바들바들 떨며 혼자 신문을 읽었던 그가 이제 달라진 시대에 서서 다 다른 언어를 쓰는 100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의 작업을 새로 쓴다. “내가 죽어도 ‘신문 읽기’가 계속해서 유효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요. 퍼포먼스를 초연할 당시엔 신문을 읽고오리는 행위만으로도 관객에게 긴장감을 줬어요. 하지만 세상이 변했잖아요. 이제 긴장감이 사라진 거죠. 긴장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대상, 나아가 종이 신문이 사라지는 것에대한 재해석으로 올해 자하미술관에서 30여 명과 함께 ‘신문 읽기’를 시도하기도 했어요.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과 함께한 것이죠. 누군가 그 풍경을 보고 SNS상에서 댓글을 달고 웅성웅성대는 현상과도 같았다고 말하더군요. 참으로 맞는 말이에요. 여러 사람이 신문을 읽는 소란 행위와 SNS상에서 이뤄지는 소란 행위가 거의 동질화되는 현상이 빚어진 거죠. 이런 다양한 시도가 ‘신문 읽기’를 되살려주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테크니컬 새틴 소재의 드레스, 레이스업 슈즈, 블랙&화이트 파세오 백은 Loewe 제품.

한편 9월 성능경의 ‘신문 읽기’가 시대와 호흡하며 재탄생하기에 앞서, 8월 23일 갤러리현대에서 그의 생애 세 번째 상업 화랑 전시가 개막한다. 전시 제목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그는 평생 자신의 작품을 ‘망친 예술’로 명명함으로써 틀에 박힌 예술의 문법, 인간 삶의 조건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한마디로 성능경의 예술 동력은 ‘망치기’, 그는 이에 대해 말했다. “망치면 망칠수록 예술성은 높아져요. 그래서 전시장을 찾을 관객에게 말하고 싶군요. 너무 엄숙한 것, 영원한 것, 의미 깊은 것을 기대하지 마시라. 단, 와서 망친 것이 더 아름답다는 걸 얻어 가시라. 그것뿐이에요.”

깃털 장식 톱과 팬츠, 램스킨 소재의 부츠는 Loewe 제품.

신문 읽기 퍼포먼스를 하는 중 촬영된 성능경 작가의 손.

“예술성을 놓치는 것, 그게 예술가에겐 제일 위험하죠. 하지만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어요. 젊어서 돈을 충분히 번 후에 예술을 하겠다. 그런데 예술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요? 이도 저도 다 필요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예술 생각, 저녁에 잘 때도 예술 생각, 그것밖에 없어요.”

성능경 작가가 자신의 손바닥에 적어 보인 인상적인 메시지.

테크니컬 새틴 소재의 롱드레스, 스웨이드 소재의 클로그 슈즈는 Loewe 제품.

패션 에디터
김신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홍장현
모델
성능경 작가, 루루
헤어
이현우
메이크업
오가영
어시스턴트
신지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