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ROH, 그리고 한국 서울의 휘슬, 두 젊은 갤러리들의 적극적인 교류
서울과 현대미술이 가장 뜨겁게 조우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작년 한국에 론칭한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2023년 9월 6일부터 9일까지 열리기에 앞서 분위기는 일찍부터 달아올랐다. 첫 번째 페어를 경험한 국내외의 모두가 그 활기찬 에너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120여 개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다. 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늘어난 숫자로, 갤러리들의 활동지는 지역별로 다양하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향력을 가진 메가 갤러리들의 경우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걸쳐 지점이 분포되어 있지만, 결국 한 갤러리의 태도와 성향은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더블유>는 미국 동부에서 출발한 두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와 페이스갤러리, 서부에서 출발한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 런던에서 출발한 화이트 큐브와 리슨갤러리를 비롯해 멕시코시티를 뿌리로 거점을 넓힌 쿠리만주토, 자카르타의 영 갤러리인 ROH, 그리고 한국의 중견 갤러리인 갤러리현대와 영 갤러리인 휘슬까지 두루 조명했다. 이 밀도 있는 프리뷰는 광활한 아트페어장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끄는 <더블유>식 가이드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이 탁월한 갤러리들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신의 현재가 조금씩 보인다는 점이다. 갤러리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서울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ROH & Whistle ROH &휘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ROH, 그리고 한국 서울의 휘슬. 가끔, 우연히 혹은 자발적인 호기심으로 서로를 살펴보게 된 두 갤러리의 대표는 이제 한 부스 안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협업을꾀 한다. 그리고 아시아권 도시에서 활동하는 다른 젊은 갤러리들과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트페어는 보통 경쟁이 치열하고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곳이지만,
그런 환경에서 서로 연결되는 어떤 걸 함께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지 보고 싶습니다.”– ROH 대표
“페어장이라는 환경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의 제약이 많다 보니 좀 더 유기적으로, 열린 상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휘슬 작가들이 대부분 신작으로 준비를 하기도 했고요.”– 휘슬 대표
국제적인 아트페어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아티스트, 컬렉터뿐 아니라 갤러리스트, 전시 운송과 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아트 핸들러, 큐레이터, 미술에 관심이 많은 일반 관객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이 모두 플레이어가 된다. VVIP라 할 만한 컬렉터나 미술관의 수집위원회 중 일부는 페어가 시작되기 전 주말쯤 입국해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를 관람하고 작가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등 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뒤, 아트페어가 시작한 직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도 한다. 적어도 일주일간 숨 쉴 틈 없이 미술 축제가 벌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아트페어의 핵심은 무엇보다 다양한 갤러리가 한자리에 모여 폭넓은 고객을 대상으로 작품을 판매하는 비즈니스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페어장에 모인 갤러리와 그 관계자들은 서로에 대해 잠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기도 하고 ‘아니다’이기도하다. 그런데,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하나의 부스를 함께 나눠 쓰는 두 갤러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ROH와 서울의 휘슬을 보면 애초에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사이좋게 공간을 나눠 쓰기로 한 두 갤러리는 그저 페어 참여 비용을 공동 부담하는게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일종의 팝업 전시를 함께 꾸렸다. 아트페어에 모인 갤러리들이 막연히 비즈니스 경쟁 상대라고만 생각하면 수수께끼처럼 보일 법한 일이다. 갤러리는 미술 작품을 판매하는 비즈니스가 맞다. 하지만 갤러리의 존재 근거인 작가와 작품은 돈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와 함께 일하는 갤러리의 활동 역시 돈이나 계약 관계로만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의 갤러리가 모이는 아트페어는 판매 경쟁의 장이면서 처음 만난 사람끼리 친구가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젤에서 만난 사람을 홍콩에서 만나고, 다시 서울에서 마주치고, 짬이 날 때는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기도 하다가 업계의 동료가 한 명씩 늘어나는 것이다. 비행기로 7시간 떨어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대한민국 서울에서 서로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ROH의 대표 락사마나 ‘준’ 티르타지(Laksamana ‘Jun’ Tirtadji)와 휘슬의 이경민 대표가 그랬다. 작년에 열린 첫 프리즈 서울은 두 갤러리의 대표가 짧지만 강렬하게 교류할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전 세계 다른 도시에서 열린 아트 페어와 미술 행사들을 통해 ‘간헐적이고 국제적인 미술계 우정’을 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경민 대표가 자카르타에 들를 일이 생겨 ROH의 갤러리 공간을 방문하고, 현지 작가들의 스튜디오까지 찾으면서 두 갤러리 사이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계약서는 없지만 신뢰로 이뤄지는 협업’이 시작되었다.
암석의 결정체인지, 플라스틱을 녹여 만든 덩어리인지, 아니면 산호초를 가져와 인공 안료로 채색한 것인지 헷갈리는 한국 작가 현남의 조형 작품이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 같지만 현실에선 전혀 일어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도네시아 작가 아구스 스와게의 거대한 수채화 작품을 보면 ROH와 휘슬이 서로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두 갤러리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모두 여러 개의 정체성을 지닌 모습이다. “그림인 것 같지만”, “사진인 것 같지만”, “조각인 것 같지만” 등 하나 이상의 조건을 달고 반전을 선보인다고 해야 할까. 두 갤러리의 대표를 각각 따로 만나하나의 부스를 공유하는 기획에서 어떤 방향으로 작품을 선택했는지 물었을 때도 페어에서 선보일 작품들처럼 서로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답을 들려주었다. 먼저, 휘슬은 이번 프리즈 서울로 국제 아트페어의 메인 부스에 처음 참여하게 된다. “제가 자카르타 공간을 방문하거나 여러 도시에서 다시 만나면서,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점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게 된 셈이에요. 그래서 함께 뭔가를 추진해보자고 했을 때 상당히 빨리 진행됐어요. 페어장이라는 환경은 어쩔 수 없이 제약이 많다 보니 좀 더 유기적으로, 열린 상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휘슬 작가들이 대부분 신작으로 준비하기도 했고요.” 휘슬 이경민 대표의 이야기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의 작업 속도나 상황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기에, 결국은 두 갤러리가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놓고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작품과 작가를 정하는 방식으로 일이 흘러가게 되었다. ROH의 대표 ‘준’ 티르타지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 프리즈 서울 부스에서 우리는 일종의 협업이라는 개념을 밀어붙이려 합니다. 서로가 공유하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거죠. 아트페어는 보통 경쟁이 치열하고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곳이지만, 그런 환경에서 서로 연결되는 어떤 걸 함께 보여주는 것이 가능한지 보고 싶습니다.”
광물이나 일상의 작은 물체를 극단적 배율로 확대 촬영하고, 여러 번의 촬영을 거친 뒤 정교하게 합성해 때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무언가처럼 보이게 만드는 김경태 작가의 작업과 눈으로만 보아서는 도무지 어떤 물질인지, 심지어 추상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데이비 링가르의 12분짜리 영상 작품은 두 갤러리가 의기투합한 데 대한 또 다른 힌트가 된다. 큐레이터가 주제를 정하고 관련 작품을 그러모아 긴 시간 진행하는 미술관에서의 주제전과 달리, 짧은 기간 판매를 위한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된 아트페어 부스는 여러 제약을 안고 이뤄진다. 미술관 전시가 일관성을 추구한다면, 아트페어 부스의 미덕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는 다양성이 장점이다. 하지만 ROH와 휘슬이 함께 구성한 올해 프리즈 서울 부스는 묘하게도 다양한 동시에 일관적인 모습이다. 어쩌면 부스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들 또한 두 갤러리의 대표들처럼 친구이자 동료 관계를 맺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 ROH와 휘슬의 대표들은 두 갤러리를 뛰어넘어 더 많은 교류를 꿈꾸고 있다. 이들은 프리즈 서울이라는 특별한 기회를 활용해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등 다른 아시아권 도시에서 활동하는 젊은 갤러리들과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려 단단히 준비 중이다. 그 형태는 함께 작은 디너 자리를 연다던가 바쁜 페어 운영 시간에 잠시 잠재적 동료가 운영하는 부스에 들러 인사와 함께 연락처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프리즈 서울에서 하나의 부스로 공동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ROH와 휘슬은 이미 ‘간헐적이고 국제적인 미술계 우정’을 나누는 관계를 넘어섰다. 이들의 관계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트페어의 호흡도 넘어섰다. 휘슬의 작가로 작품을 선보이는 현남은 이미 작품을 위한 연구 활동으로 몇 주간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반둥 지역의 화산 등을 탐색하고 돌아왔다. 프리즈 서울 이후에는 다시 인도네시아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떠날 예정이다. 휘슬과 함께 일하는 김태윤 작가는 내년 초 발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창작에 매진하게 된다. 서로의 활동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어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맺어진 인연이 ‘신뢰로 이뤄지는 협업’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소속 작가들을 상대편 갤러리가 있는 나라로 보내 창작을 돕는 것으로까지 확장되는 모습이다. 이경민 대표 역시 프리즈 서울 이후 다시 한번 자카르타를 방문할 계획이다. 휘슬과 일하는 한국 작가를 인도네시아로 보내는 것처럼, 이번에는 ROH와 함께하는 작가들이 한국에서 창작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 조금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하는 인도네시아의 컬렉팅 문화, 그리고 다양한 공적 지원이 존재하는 한국의 인프라. 이는 두 갤러리가 각자의 상황에 맞게 함께 풀어갈 좋은 바탕이 될 것이다.
ROH와 휘슬, 두 갤러리가 꿈꾸는 아시아 지역 젊은 갤러리들과의 더 적극적인 교류는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미술계의 많은 일이 그렇듯, 올해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벌어진 어떤 일이 구체적인 결과를 맺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마치 이경민 대표가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해외 아트페어에서 ROH를 처음 알게 되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 이경민 대표는 자카르타에서 온 ROH를 보고 두 번 놀랐다고 기억한다. 동시대 미술과 쉽게 연결되지 않던 인도네시아에서 국제적 아트페어에 참여한 갤러리라는 사실에 한 번, 그 갤러리를 이끄는 대표가 1988년생으로 젊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준’ 티르타지가 말한다. “미술계의 많은 사람은 큐레이팅이나 미술사를 배경으로 갤러리를 시작하지만, 제 경우에는 벽에 그림을 걸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아트페어나 비엔날레가 뭔지도 잘 몰랐죠.” 결국 그 오랜 호기심의 끈이 이어져 프리즈 서울이라는 계기를 통해 오늘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ROH와 휘슬이 하나의 부스로 함께하는 올해 프리즈 서울 역시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 어디선가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각자의 나라에서, 혹은 다시 한번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를 통해서.
- 에디터
- 권은경
- 글
- 박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