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아니쉬 카푸어의 첫 개인전을 연 남다른 감각의 이 갤러리는 미술관처럼 천천히, 깊은 호흡으로 움직인다.
서울과 현대미술이 가장 뜨겁게 조우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작년 한국에 론칭한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2023년 9월 6일부터 9일까지 열리기에 앞서 분위기는 일찍부터 달아올랐다. 첫 번째 페어를 경험한 국내외의 모두가 그 활기찬 에너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120여 개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다. 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늘어난 숫자로, 갤러리들의 활동지는 지역별로 다양하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향력을 가진 메가 갤러리들의 경우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걸쳐 지점이 분포되어 있지만, 결국 한 갤러리의 태도와 성향은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더블유>는 미국 동부에서 출발한 두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와 페이스갤러리, 서부에서 출발한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 런던에서 출발한 화이트 큐브와 리슨갤러리를 비롯해 멕시코시티를 뿌리로 거점을 넓힌 쿠리만주토, 자카르타의 영 갤러리인 ROH, 그리고 한국의 중견 갤러리인 갤러리현대와 영 갤러리인 휘슬까지 두루 조명했다. 이 밀도 있는 프리뷰는 광활한 아트페어장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끄는 <더블유>식 가이드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이 탁월한 갤러리들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신의 현재가 조금씩 보인다는 점이다. 갤러리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서울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LISSON GALLERY 리슨 갤러리
1967년 런던에 갤러리를 설립한 이후 40여 년이 지나서야 다른 도시에 두 번째 지점을 낸 리슨 갤러리. 1970년대에 당시로는 낯선 미국의 개념주의 미술을 소개하고, 1980년대에는 아니쉬 카푸어의 첫 개인전을 연 이 남다른 감각의 갤러리는 미술관처럼 천천히, 깊은 호흡으로 움직인다.
“이제 미술의 역사는 어느 한 곳만 중심으로 삼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중심이 없다면, 모든 곳이 스스로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 요.
그리고 이런 변화는 외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하죠.”-리슨의 갤러리 파트너 루이스 헤이워드
지난 몇 년 동안 유서 깊은 메가 갤러리들이 속속 한국 진출을 꾀했지만, 리슨 갤러리는 서두르는 일 없이 한국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지점을 낼 계획은 없는 걸까? 리슨의 갤러리 파트너 루이스 헤이워드 (Louise Hayward)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갤러리 공간은 전 세계 곳곳에 일곱 군데면 충분해요. 서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지는 않지만, 우리 팀원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은 2~3개월에 한 번씩 꼭 한국에 들릅니다.” 런던에서 출발한 리슨 갤러리는 현재 뉴욕, 상하이, 베이징, LA까지 5개 도시에 총 일곱 갤러리를 운영 중이다. 서울에 사무소나 갤러리 공간을 열지는 않았지만, 헤이워드가 말하듯 리슨 갤러리 직원들은 꾸준히 한국을 방문하며 소속 작가들의 작품 판매나 미술 기관과의 협력을 도모한다. 느리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협력. 설립 60주년을 향해 가는 리슨 갤러리가 한국에 지점을 내지 않은 채 활동을 이어가는 건 반세기 넘게 쌓아온 갤러리 운영의 노하우 덕분인지도 모른다.
사실 리슨 갤러리와 한국의 인연은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갤러리는 1996년 런던에서 이우환 작가의 첫 영국 개인전을 개최하며 그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갤러리답게, 2023년 지금까지도 이우환 작가와 꾸준히 함께 일한다. 리슨 갤러리는 전 세계 아티스트들을 영국과 유럽에 소개하는 역할을 반 세기 넘게 이어왔다. 설립 초기인 1970년대엔 당시로서는 낯선 미국의 개념주의 미술가들을 영국 관객에게 소개했고, 1980년대에 아니쉬 카푸어의 첫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남다른 감각과 긴 호흡으로 작가들을 지원했다. 분명 상업 갤러리이지만 마치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국제적 큐레토리얼 프로그램과 공공미술 커미션, 토론과 대담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한 리슨 갤러리는 조금은 천천히 움직이는 행보를 보여왔다.
그러니까 리슨 갤러리가 영국이 아닌 다른 지역에 처음으로 지점을 낸 건 갤러리가 문을 열고서 40년도 더 지난 2011년 밀란 지점을 열면서부터다. 뉴욕 지점은 그로부터 5년 뒤인 2016년에, 아시아 첫 지점인 상하이 갤러리는 2019년에야 문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확장한 지점은 2023년에 문을 연 LA 로, 2019년 폐업한 2개 층, 740여 ㎡ 규모의 게이 바 건물을 리노베이션했다. 미술관들이 그렇듯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움직이는 곳이라면, 이렇게 마련한 일곱 개 갤러리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말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갤러리 공간을 확장하는 것보다 꾸준한 리서치 트립을 통해 지식과 관계를 쌓아가는 쪽이 장기적으로는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한국의 컬렉터와 미술 관계자들은 더 많은 걸 알고 싶어 하고, 세련되고, 관대합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를 이야기하면 한국 사람들은 더 알고 싶어 해요. 그런데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한국 사람들은 새로운 걸 배우고 싶은 마음, 호기심, 이해에 대한 욕구가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 지점을 내지는 않았지만 서울만이 아니라 대구, 부산, 수원 등을 정기적으로 오간다는 리슨 갤러리 전시팀이 프리즈 서울을 통해 소개하는 작가들은 이름만으로 누구나 알 법한 작가들과 한국 관객에겐 조금 낯설 이름이 적절히 섞여 있다. 그들이 파악한 한국 사람들의 특성이 맞는다면, 새로운 아티스트를 접한 한국 관객은 재빨리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습득하길 기대할 것이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아트페어 부스. 아마도 그 시작은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조금 다른 모습을 한 작품’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줄리언 오피의 ‘Figure 1, position 3’(2022)는 LED 모니터나 전광판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익숙한 ‘Walker’ 연작 속 사람의 형상을 3차원으로 구현해 보여준다. 서울역 앞 빌딩의 거대한 파사드에서 움직이는 행인들의 모습 등을 통해 오피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들어진 사람의 모습이 비스듬히 몸을 누인 모습에 바로 줄리언 오피를 떠올릴 것이다. 불그스름하고 거대한, 지름 1.25m짜리 반짝이는 거울처럼 보이는 아니쉬 카푸어의 붉은색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리슨’이라는 이름은 낯설 수 있어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작가의 이름, 실제로 본 적 없더라도 어디선가 이미지를 통해 마주쳤을 작품을 리슨 갤러리의 부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트페어는 컬렉터들에게 멋진 작품을 파는 곳이에요. 하지만 작품은 계속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작품을 둘러싼 대화와 신뢰가 깃든 관계는 지속되어야 하죠. 그래서, 아트페어라는 짧은 기간과 공간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프리즈 서울보다 조금 일찍 시작해 더 늦게 끝나는 서울 북촌에서의 팝업 전시 <Time Curve>는 페어가 열리는 코엑스 부스를 들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리슨 갤러리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마련된 서울 팝업 전시에서는 페어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과 더불어, 페어장에서 볼 수 없는 작가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궁극적으로는 작품 판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아트페어 환경보다 조금은 더 자유롭게 큐레이팅 전시를 펼치는 셈이다.
페어장과 팝업 전시장 두 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작가 중에는 2022년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 <심층 여행사>를 선보인 로르 프루보가 눈에 띈다. 당시 개인전에서 가상의 여행사라는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실제 여행사 사무실처럼 생긴 공간을 꾸몄던 작가는 이번에는 평면 작품을 선보인다. ‘내러티브’를 작업의 출발점 삼아 아틀리에 에르메스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이 3차원의 공간 전체를 채우는 방식이었다면, 같은 출발점을 가진 작업이 프리즈 서울과 리슨 갤러리 팝업 전시에서는 평면의 형태로 다시 소개된다. 이는 작가를 기억하는 컬렉터에게도, 수장고에 들어갈 작품을 고민 중인 미술 기관 관계자에게도, 혹은 지난해 열린 개인전을 놓치고 이번 아트페어와 팝업 전시를 통해 작가를 처음 만난 관객에게도 즐거운 발견이 되어줄 것이다.
페어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팝업 전시에서 눈에 띌 작가도 있다. 2021년 스페이스K 서울에서 ‘변화율’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연 라이언 갠더. 그는 언뜻 스치듯 보면 미술 작품이 아니라 공간의 일부로 착각할 법한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이를테면 전시 공간 한쪽에 넌지시 떠올라 천장에 닿은 풍선처럼 보이는 ‘모든 종류의 영하 257도(Two hundred and fifty seven degrees below every kind of zero)’(2018)가 그렇다. 너무나 감쪽같이 풍선 모양을 한 이 작품은 사실 유리섬유로 만든 조형물로, 시각에 대한 우리의 견고한 믿음을 돌아보게 만드는 정교한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바 있는데, 몇 년 전 열린 그의 전시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듯 반갑게 작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리슨 갤러리의 아트페어 부스나 팝업 전시, 혹은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전시에서 조만간 한국인 작가를 만나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숨 가쁜 갤러리 신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여유를 잃지 않고 자신만의 안목을 보여준 갤러리의 파트너답게, 헤이워드의 답변은 단호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다. “지금으로선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서울에서 만난 작가들과 긴 시간을 두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앞으로 더 깊어질 거고요. 갤러리 역사가 60년에 가까운 만큼, 우리는 이 일을 정말로 진지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프리즈 서울은 서울의 아트 신을 어떤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는 걸까. 올해 프리즈 서울 참여 부스 선정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던 리슨 갤러리 시니어 디렉터에게, 오랜 방문 경험이 쌓인 한국은 그저 다양성 차원에서 추가된 새로운 도시 그 이상이다. “이제 미술의 역사는 어느 한 곳만 중심으로 삼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중심이 없다면, 모든 곳이 스스로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변화는 외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하죠.”
- 에디터
- 권은경
- 글
- 박재용(통번역가,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