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4 – 유신애

전여울

엄격한 회화 장르 안에 박제한 ‘구원의 환상’

현대사회의 여러 징후를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해 표현해온 유신애가 기존의 작품 세계를 확장해 동시대 현상의 한조 각인 ‘Post Truth’에서 출발, 중세의 제단 조각 및 페인팅을 매개로 한 신작을 선보인다.

재킷과 팬츠는 제이쿠, 슈즈는 조이앤피스, 이어커프는 코스 제품. 목걸이와 귀고리, 반지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2015년 스위스 크레틀로브 갤러리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 <Delivery near Me>, 2016년 쿤스트하우스 랑엔탈에서의 개인전 <What a Silencer Sounds Like> 등을 통해 유럽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유신애가 국내 관객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계기는 2020년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열린 전시 <페트리코어>였다. 건조한 땅이 비에 젖어 나는 독특한 흙내를 뜻하는 ‘페트리코어(Petrichor)’를 제목으로 사용한 전시에서 작가는 2017~2018년부터 국제 무대에서 선보여온 두 전시 프로젝트 ‘페트리코어’와 ‘길트 트립’을 통해 개인에게 작용하는 사회적 압력과 이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했다.

당시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강박적으로 입증하려는 심리적 현상을 비주류 문화의 하나이자 자동차 음향 시스템을 불법 개조해 유리창을 깨부수는 문화인 ‘윈도 플렉스(Window Flex)’에 빗댄 비디오 설치 작품 ‘Petrichor’(2019) 등으로 작가는 동시대 자본 사회의 음울한 가장자리를 들추고, 그 그림자에서 간신히 숨 쉬고 있는 개인을 조명했다. 비디오, 사운드, 페인팅, 조각 등 광범위한 매체로 구성한 작품은 비록 단번에 읽히진 않아도 비디오 게임, 언더그라운드 음악, 대중문화 등에서 참조하고 길어온 전시작들로 가득한 풍경은 관객에게 어딘지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사뭇 생경한 경험을 안겨줬다.

2022년 BB&M 단체전 <콜드 피치>에서 선보인 ‘Membership’(2022). MEMBERSHIP, 2022, ACRYLIC ON CANVAS, 162.2×130.3CM.

실린더와 함께하는 올해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서 유신애는 ‘Post Truth’라는 제목의 전시를 선보인다. ‘Post Truth’는 ‘탈(脫)진실’로 직역할 수 있으나, 본래는 여론이나 공공의 의사결정이 객관적 사실에 의해 형성되기보다 대중의 감정적 반응으로 형성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소셜미디어가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의 출처로 부상하고, 기득권층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는 가운데 ‘Post Truth’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 미국의 대통령 선거 등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설명할 때 주석처럼 등장하곤 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를 관전하는 개인으로서, 자신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을 따르려는 사회 기조가 도대체 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전시의 시작점이 됐어요. 사실 저는 ‘워크’(Woke·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 전반을 잘 알고, 이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나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이 아니에요. 하지만 신-자본이 요구하는 도덕적 규범과 강렬 속의 무기력한 한 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상태를 조금이나마 덜 악화시키기 위해서 나와 내 작업을 끊임없이 검열하고 있는 자신과 마주할 때가 있어요.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능동적 개체로살기 위해 무언가를 바꾸려고 부단히 애를 쓰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회의 명령 구조 속에서 나를 대신해 책무를 지어줄 ‘도래하지 않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순종 상태의 수동적 주체를 떠올리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전시를 통해서는 이 ‘구원의 환상’을 갖고 스스로 박해하고 박해받는 시대를 반영한 ‘세속적이고 고요한 난잡함’을 엄격한 회화의 장르로 박제해보고 싶었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적어도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가 자유로운 작업을 만들어가며 즐거운 모험을 하는 것 같아서 이 여정 자체가 저에겐 큰 의미로 다가와요.”

2020년 스튜디오 콘크리트 <페트리코어>에서 전시한 ‘Untitled #3 (Petrichor)’(2020). UNTITLED #3 (PETRICHOR), 2020, ACRYLIC AND WATERCOLOR ON PAPER 27.5×42CM.

유신애의 말처럼 그간 영상, 설치를 중심으로 전시를 진행해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적 매체인 ‘회화’가 중심이 된다. “오늘날은 스크린이 주로 현실을 재현하고 통제하잖아요. ‘스크린이라는 검은 사각의 틀을 뛰쳐나온 이미지는 오히려 온전한 판타지가 가능한 캔버스 위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모습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번엔 회화 장르에 한번 몰두해보기로 했어요.”

한편 이번 전시작들은 중세의 제단 조각 및 페인팅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를 연상시키는 작품 등 유신애의 ‘제단화를 가장한 오늘의 이미지’들은 전시장에서 펼쳐질 참이다. “오늘날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각자가 믿는 이념이나 공상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잖아요.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믿음을 거세한 채로 살아가기 십상이지만, 저는 작품을 통해 이런 상황들 안에서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태도, 개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일종의 ‘극복의 모습’을 기록하고 그것을 기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가질 수 없는 것을 염원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정교한 진실의 모습보다 ‘미디어 히피즘’과 같은 관습에 대한 불신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시점에서 제 작업은 반대로 고루하고 딱딱해 보이는 종교 또는 관습이 반영된 미학적 형태로 발현된 것 같아요.”

비디오 설치 작품 ‘Petrichor’(2020). PETRICHOR, 2020, (STUDIO CONCRETE) VIDEO INSTALLATION, 161×440×80CM, SINGLE-CHANNEL VIDEO, HD (16:9), STEREO, 8’00’’.

유신애는 인터뷰에서 프리즈 서울을 ‘음미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큰 기획의 틀에서 장기간 준비하는 전시라기보다는 예리한 순발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작품을 최적의 모습으로 선보이는 ‘페어’인 만큼, 이곳에서 펼칠 전시는 갤러리, 작가, 관객들이 ‘프리즈 서울’이라는 무대 안에서 미학적으로 맛있는 재료와 태도를 함께 버무려서 선보이고 이를 모두가 함께 음미하는 자리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유신애의 말처럼 ‘Post Truth’란 타이틀을 내건 이번 전시를 통해 지금 그가 가장 몰두해 탐구하는 진실 그 이상의 판타지, 재편된 평면들을 제대로 맛볼 차례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최영모
스타일리스트
현국선
헤어
신도영, 채현석
메이크업
맹하영, 채현석
어시스턴트
윤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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