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3 – 정수정

전여울

정수정의 그림에선 고요히 또는 강렬히 진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상상을 기반으로 판타지적 장면을 만들어내며 그곳에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정수정이 최근 들어 회화적 소재로 발전시키고 있는 버섯 등의 균류, 그것들이 가진 힘, 나아가 ‘그리기’라는 동적인 행위에 대해 말했다.

원피스는 한킴, 부츠는 앤아더스토리즈 제품.

“나는 상상하는 것들을 장면으로 만들고 그림으로 옮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생명력과 생명력이 가득한 자연 속에서 함께 영위하는 삶과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장면을 만든다.” 어느 해 회화 작가 정수정은 작가 노트에 이런 말을 적었다. 2020년 OCI 미술관 개인전 <빌런들의 별>을 통해 짓궂은 빌런들의 야단법석, 좌충우돌, 뒤죽박죽의 가상세계를 대형 캔버스에 담아내고, 2021년 SeMA 창고 개인전 <falconry>에서 매사냥꾼과 매를 주제로 사람과 동물 사이 소유와 권력의 구조를 탐색하며, 2021년 에이라운지 개인전 <봄 봄 파우더>로 생명이 싹트는 계절인 봄(Spring)과 시각적 행위의 봄(Seeing)의 교차점을 모색한 정수정은 지금 국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회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작가 노트에 적힌 말에서 알 수 있듯, 정수정의 작품 세계에서 강한 에너지로 진동하는 ‘생명력’은 줄곧 그가 펼치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샤워를 끝내고 기분이 좋은 여성이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을 담은 ‘봄 봄 샤워’(2021) BOM BOM SHOWER, 2021, PASTEL ON PANEL(FRAMED). 36.5×25.5CM.

“늘 내적, 외적으로 드러나는 생명력에 관심이 많았어요. 생명력은 느리게 피어오르기도, 폭발적으로 과격하게 분출되기도 하죠. 생명력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의 찰나처럼 생명력이 진동하는 풍경을 볼 때면 ‘저 장면을 갖고 싶다’,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곤 하죠.”

거센 유속으로 쏟아지는 인공 시냇물에서 출발한 약 7m 높이의 대형 걸개그림 ‘교미’(2019),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물방울 안에서 역동적으로 점프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여성을 형상화한 ‘오아시스’(2022) 등 그간 초상화와 풍경화, 실제와 가상 등을 넘나들며 다각도로 생명력을 표현해온 정수정은 올해 에이라운지와 함께하는 프리즈 서울 ‘포커스 섹션’에서 버섯, 곰팡이 등 균류가 가진 힘에 주목한 신작을 선보인다. “버섯은 고전부터 현대까지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였죠. 버섯은 시각적으로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경계 안에 있는 생명체란 느낌도 들어요. 흔히 영지버섯은 몸에 좋다고 알려졌는데, 그에 반해 독버섯은 소량의 섭취만으로 치명적인 죽음을 불러올 수 있잖아요. 또 균류이기 때문에 굉장히 미세한 포자를 퍼트려 생식하고 거의 무한 번식하죠.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들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아가 이들이 아주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말 그대로 ‘스멀스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 저에게 어떤 용기를 주는 듯도 하고요.”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억압된 나를 풀어놓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캔버스 앞에 서는 모양이에요.”

정수정만의 판타지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 ‘Tronie#6 Purple wind’(2021)  TRONIE#6 PURPLE WIND, 2021, OIL ON CANVAS, 72×91CM.

정수정의 말처럼 서울 성북구에 자리한 그녀의 작업실에는 복잡한 학명의 버섯 사진이 벽에 도배지처럼 붙어 있다. 영화, 뮤직비디오, 검색엔진 등에서 수집한 갖가지 레퍼런스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초원이나 숲에 버섯이 둥글게 줄지어 돋아난 ‘페어리 링(Fairy Ring)’을 포착한 이미지. “처음 페어리 링을 접했을 때 마치 버섯들이 강강수월래를 하듯 떼 지어 손잡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어요. 착실하고 분명하게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고 있는 느낌이었죠. 그간 인간의 관점에선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고만 바라봤지만, 어쩌면 이렇듯 작은 생명체들이 세상의 주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캔버스라는 사각 프레임 안에 페어리 링의 둥근 형태를 가져오면 대단히 부드럽고 유연한 이미지가 탄생하지 않을까 상상하며 작업 중이에요.”

한편 갑작스러운 고래의 떼죽음, 이유 없이 불타오른 신체, 빅풋의 발자국처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상 기반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정수정의 작업에서 주요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더블유>와의 촬영 당일, 작업실 한 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스케일의 회화 신작에서 역시 정수정 특유의 화법이 진하게 묻어났다. 새파란 수중을 배경으로 교복 입은 소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 버섯, 불가사리, 정체 모를 생명체들이 한데 섞여 자유롭고 경쾌하게 유영하는 기묘한 상상의 세계관을 그린 작품에 대해 정수정은 말했다.

2020년 OCI 미술관 개인전 <빌런들의 별>에서 전시한 ‘Our starman’(2020). OUR STARMAN, 2020, OIL AND OIL PASTEL ON CANVAS, 193.9×259.1CM.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짊어지잖아요. 특히 삼십대 여성으로서 여성의 출산 과정을 볼 때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나 생각하게 돼요. 저는 기껏해야 나 자신과 내 작업, 반려동물만 책임지고 사는데 말이에요. 살면서 사회적 지위나 위치가 바뀌면서 오는 변화들에 대해 ‘그럼에도 용기내서 해볼테야’란 태도로 맞서고 싶었어요.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에 가능한 한 시원스럽게, 한계를 짓지않고 작업해보자는 마음이 이 작품의 시작이었죠.”

바다를 빼닮은 짙고 푸른 색감, 빠른 속도가 느껴지는 붓 자국, 두텁게 쌓아 올린 유화물감의 광택과 끈적임, 운동성이 느껴지는 작품 속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등 그의 신작에선 통쾌한 ‘보는 맛’도 느껴진다. 삶이 주는 무게 앞에서 용감해지자는 작가의 메시지는 경쾌하고 다채로운 회화적 기법과 만나 그 울림이 더욱 증폭되는 듯만 하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붓의 탄력이 주는 쾌감이 있어요. 그 격정적이면서 흥분되는 감정을 파도 타듯 느끼며 머릿속에서 증폭되는 이야기를 빠르게 그려가는 거죠. 저는 페인팅, 그리기야말로 동적인 분야라고 생각해요. 끝없는 직관과 찰나의 선택들로 장면이 만들어지니까요.”

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2 – 박론디

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1 – 우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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