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고 익살스럽고 연약한 것을 경유한 욕망의 이야기들
박론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들끓는 욕망의 조각들을 채집해 회화, 텍스타일, 퍼포먼스, 세라믹 등 다양한 매체로 풀어낸다. 익숙한 듯 기발한 스토리텔링으로 그가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가 ‘포커스 아시아’ 섹션의 화이트노이즈 부스에서 펼쳐진다.
서울 한남동 먹자골목 어귀에 자리한 박론디의 작업실은 언뜻 취향 독특한 주인이 운영하는 앤티크 소품점처럼도 보였다. 미러볼 조명, 빈티지 카메라, 옥색 반지, 조악한 캐릭터 디자인의 열쇠고리, 숙취의 흔적이 엿보이는 빈 와인병 따위가 한데 나뒹구는 풍경. 이전까지 플릭플락 시계, 구디핀 등 갖가지 물건을 회화, 텍스타일, 퍼포먼스, 세라믹 등을 아우르는 작업에 표상처럼 등장시키곤 했던 박론디의 작품 세계를 떠올렸을 때, 작업실을 차지하고 있는 휘황찬란한 물건들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2021년 화이트노이즈에서 개최한 개인전 <And I need you more than I want you>, 2022년 하이트컬렉션 단체전 <끝에서 두 번째 세계>, 올해 아트선재센터 단체전 <즐겁게! 기쁘게!> 등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린 박론디는 군데군데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의 캔버스를 앞에 둔 채 말했다.
“올해 화이트노이즈와 함께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 참여하는데 사실 저에겐 굉장히 부담스럽고 과분한 자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게다가 오랜 시간 손잡아온 화이트노이즈와 이제까지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는 여정이 될 테고요. 그래서 겁내지 않으려고요.”
“저는 스스로를 시각 제작자(Visual Crafter)라 여겨요. 작가나 아티스트 같은 호칭보다 조금 더 세밀하게 제가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정의하고 싶어요. 보이는 것, 직접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의도 태와 마음을 담은 명칭이라 할 수 있죠.”
여덟 살을 맞이한 생일날 선망의 대상이던 이모에게 플릭플락 시계를 선물로 받으며 새로운 욕망의 세계가 열린 순간에서 착안한 ‘이모가 분 바르고 짧은 단발에 입술을 까맣게 칠하고 선물이라고 시계를 건네주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 그것처럼 맘에 쏙 드는 물건은 처음이었어’(2021), 가장 깊고 어두운 소망을 은밀하게 고백하는 장소로서 노래방에 주목한 퍼포먼스 ‘가끔 코인노래방에서 그녀는 가장 깊고 어두운 소망의 노래를 부른다’ 등에 이르기까지. 그간 다양한 매체를 동원해온 박론디의 작품 세계에서 무언가를 손에 넣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주제는 웬만해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였다.
“요즘 시대에 욕망이라는 단어나 정서는 완전히 ‘보통화’되어서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염됐다고 생각해요. 한편 사회와 관계 맺을 때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은 늘 대립하거나 상충하고 스러지기 일쑤고요. 이미 표본같이 정립된 욕망의 정서를 어떻게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늘 관심이 있어요.”
초자본주의 사회에서 때론 스스로를 눈멀게 만들고 자주 금기시되는 욕망을 둘러싼 흔적을 예리하게 들여다보는 그지만, 부드러운 색감과 여린 붓놀림으로 완성한 화폭에선 작가가 추구해 온 특유의 귀여움, 익살스러움, 연약함의 미학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문제 해결이 필요한 순간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힘’에 대한 환상을 품었던 것 같아요. 혁명이나 전복 같은, 극단적이고 드라마틱한 ‘힘’을 떠올리고 기대하죠. 하지만 이런 종류의 힘은 위계를 만들고 권위를 생산해요. 그래서 지난날을 돌이키면 오히려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를 번복하는 모습마저 보여왔죠. 이와 반대로 저는 귀여움, 익살스러움, 연약함의 세 가지 정서가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귀여움은 익숙함과 즉각적인 환심을, 익살스러움은 문제에 관한 심리적 허들을 낮추는 역할을, 연약함은 공명을 통해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내포하죠. 그래서 이 세 가지 정서를 중요한 도구로 생각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어떻게 섞을지 고민해온 것 같아요.”
이번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에서 박론디는 신작 구아슈 작업, 세라믹 작업, 페어 현장에서의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키워드를 ‘존재’, ‘번아웃’ 등으로 잡았어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불안감은 연료처럼 쓰이는 감정이잖아요. 마치 무한 루프하는 비디오처럼 불안감은 끊임없이 재상산되죠. 또 우리와 자본주의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존재만으로 괜찮은 순간은 삭제되고요. 이러한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관객과 나눌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자본주의 속 개인의 역사와 세상의 관계를 탐험하고 이를 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는 박론디의 작업은 조만간 프리즈 서울 현장을 빛나게 밝힐 참이다. “요즘엔 실수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좀 더 너그러운 태도로 작업에 생기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중인 것 같아요.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태도는 언젠가 제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에 한계를 짓고 표현 방식에 퇴화를 불러올 것 같거든요. 너무 뾰족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 해요. 이번 전시를 무사히 마친 후에는 새로운 작업에 돌입할 예정이에요. 재작년 이맘때부터 할아버지의 죽음, 쉼 등을 떠올리며 소파를 만들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들었거든요. 무엇보다 만드는 데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포토그래퍼
- 최영모
- 스타일리스트
- 현국선
- 헤어
- 신도영, 채현석
- 어시스턴트
- 윤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