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지역의 강자,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가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미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표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메리 웨더포드
서울과 현대미술이 가장 뜨겁게 조우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작년 한국에 론칭한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2023년 9월 6일부터 9일까지 열리기에 앞서 분위기는 일찍부터 달아올랐다. 첫 번째 페어를 경험한 국내외의 모두가 그 활기찬 에너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120여 개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다. 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늘어난 숫자로, 갤러리들의 활동지는 지역별로 다양하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향력을 가진 메가 갤러리들의 경우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걸쳐 지점이 분포되어 있지만, 결국 한 갤러리의 태도와 성향은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더블유>는 미국 동부에서 출발한 두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와 페이스갤러리, 서부에서 출발한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 런던에서 출발한 화이트 큐브와 리슨갤러리를 비롯해 멕시코시티를 뿌리로 거점을 넓힌 쿠리만주토, 자카르타의 영 갤러리인 ROH, 그리고 한국의 중견 갤러리인 갤러리현대와 영 갤러리인 휘슬까지 두루 조명했다. 이 밀도 있는 프리뷰는 광활한 아트페어장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끄는 <더블유>식 가이드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이 탁월한 갤러리들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신의 현재가 조금씩 보인다는 점이다. 갤러리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서울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Mary Weatherford 메리 웨더포드
LA 지역의 강자,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는 예전부터 아트페어에서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왔다.
올해 서울에서 처음 만나게 될 주인공은 미국 현대 추상미술의 대표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메리 웨더포드다. 날씨, 빛, 바람, 감정 등등 자연과 일상에서 각인된 작가의 기억이 캔버스 위에서 짙고 깊게 소용돌이친다.
“한때 일본 작가 카즈오 시라가와 구타이 운동에 매혹되었어요.
그 또한 저처럼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서 발로 작업했죠.
저는 정말 많은 예술가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거장 화가 이우환도 있어요.
그가 이끈 모노파의 다른 화가들 작품에도 끌려요.”-메리 웨더포드
세계 유수의 갤러리들이 서울 지점을 적극적으로 오픈해온 지난 3년간, 미국 갤러리들은 뉴욕과 LA를 오가며 그들의 또 다른 보금자리를 확장했다. 특히 LA는 뉴욕 땅에 비하면 더 넓은 공간을 운영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과 함께, 다양한 젊은 작가를 발굴할 기회는 물론 새로운 컬렉터들의 급증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시장이다. 그런 만큼 동시대 미국 미술 시장에 있어 서부 지역 갤러리를 빼놓기란 불가능하다. 작년에 이어 다시 프리즈 서울을 찾는 데이비드 코단스키(David Kordansky) 갤러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서부 갤러리 중 하나다. 2003년 차이나 타운에 오픈한 이후, 올해 20주년을 맞은 갤러리는 지금 미드시티 지역에 단층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전시 공간과 열대 식물이 무성한 아름다운 정원을 운영하고 있다. 2022년에는 뉴욕 첼시에 추가 지점을 오픈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지역 작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의도와 니즈를 관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입지를 다져온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는 아트페어에서도 주로 소속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솔로 부스를 선보여왔다. 갤러리들이 페어에서 여러 소속 작가의 작품을 조금씩 선보이기보다 과감하게 한 작가의 솔로 부스를 내세우는 방식은 최근 늘어나는 추세다. 코단스키는 일찌감치 그 흐름을 주도한 셈이다.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도 LA 출신의 화가, 메리 웨더포드 솔로 부스로 찾아온다. 이 자리를 작가의 한국 첫 개인전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할 수 있지만, 메리 웨더포드는 미국 현대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1940년대 미국을 거점으로 발전한 추상표현주의는 워낙 남성 작가들의 무대였다. 최근 들어서야 여성 작가를 재조명하며, 후세대의 새로운 추상미술 발전 방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그 중심에 바로 웨더포드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스타일은 거대한 추상화와 네온 튜브로 구성된 ‘네온 페인팅’이다. 1963년생인 작가는 30년이 넘는 긴 여정 동안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해왔고, 50세에 들어서야 성공 궤도에 올랐다. 2020년 뉴욕에 있는 탕 티칭 뮤지엄에서 열린 <Canyon–Daisy–Eden>은 작가의 오랜 커리어를 심도 있게 다룬 회고전이었다.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작품들은 내·외부 공간, 머나먼 성운, 산호초를 참조해 작업한 것들이에요.” 주변 환경과 자연 요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웨더 포드는 곧 한국에 공개할 작품 10점에 대해 이렇게 운을 뗐다. 출품작은 모두 올해 완성한 최신작들이다.
자연을 향한 그 관심은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을까? 작가가 태어난 캘리포니아주 오하이는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천국’으로 불린다. 그만큼 예술가들이 밀집한 곳이다. 말리부와 샌타바버라 사이에 숨은 듯 자리 잡은 작은 산속 마을에서, 웨더포드의 삶은 자연히 ‘자연’ 속에 녹아들었다. 엄마와 매듭 짜기 놀이를 즐기거나 미술관을 방문해 공간 자체를 경험하길 좋아하던 소녀는 1980년 가을, 17살 때 처음으로 뉴욕에 가봤다. 웨더포드는 그때의 생생한 기억을 <더블유>에 들려주었다. “샌디에이고에서 비행기를 탔고, 삼촌은 JFK 공항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마도 도착 다음 날이었을 텐데, 삼촌이 저를 MoMA에서 열리는 피카소 회고전에 데려갔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그게 저에게 큰 인상을 남겼어요.” 웨더포드는 오직 ‘예술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해 15년을 보냈다. 개념주의 예술가 셰리 레빈의 작품 세계를 영감 삼아, 예술사의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펼친 시기였다. ‘뉴욕은 보물이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곳에서 얻은 보물 같은 예술적 경험과 실험적 태도를 안고 1999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본인의 작품 세계에 몰두한다.
웨더포드에게 가장 중요한 매체는 단연 회화다. “전 추상화에 깊이 빠져 있어요. 추상 작업은 제가 경험한 것들을 번역하는 일과 유사하죠. 저는 작품에 날씨, 빛, 바람, 감정 등 자연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해요.” 자연을 향한 심오한 열망과 연구가 없었다면, 어떠한 이야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삶에서 스쳐 간 장소와 공간을 주제 삼고, 또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라기보다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일기이자 자화상이다. 담쟁이덩굴을 표현한 ‘Vines’ 시리즈(2004~2008), 피스모 해변의 빛을 표현한 ‘Caves’ 시리즈(2006~2014) 등이 경험과 감각, 기억에서 비롯되었듯, 웨더포드의 삶은 맨해튼과 LA의 거리 이름, 특정 공간과 시간, 그때 그 순간 느낀 감정, 주변 소음, 냄새, 빛의 온도를 충실히 기록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어느 순간의 감각들이 다음 날까지 온전히 남아 있을 수는 없겠지만, 작가는 다양한 재료와 색상, 제목을 통해 특정 순간의 인상을 진솔한 풍경으로 남긴다.
웨더포드는 전통적인 회화의 바깥 영역에 있는 재료들을 수용하면서 회화의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1991년부터는 ‘스테인 페인팅’에 집중했죠. 그러면서 유성 페인트가 아닌 수성 페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들판의 꽃들을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작업해 얼룩진 화면을 만들기도 했는데, 실크스크린은 워낙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에요. 그래서 투명 무광 매체를 활용하는 ‘제록스 전사 기법’을 만들어냈답니다. 덕분에 꽃과 같은 실제 오브제들을 그림에 붙일 수 있었죠. 불가사리를 붙여 불가사리가 가득한 하늘을 표현하거나 작품 표면에 스펀지를 붙이기도 했어요.” 이러한 오브제 활용은 회화의 평면 세계를 넘어 조각적 특성을 과감하게 드러낸 중요한 지점이다. 나아가 작가를 대표하는 스타일이 된 ‘네온 튜브’ 활용은 메리 웨더포드만의 회화 세계를 확고하게 인정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네온 페인팅은 2012년 캘리포니아 베이커스 필드 거리를 따라 운전하던 중 그곳을 비추는 조명 간판에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웨더포드는 색상의 반투명 효과와 풍부한 그러데이션을 가능케 하는 플래시 비닐 페인트로 풍경 추상을 그리고, 그 위를 과감하게 가로지르는 네온을 붙인다. 네온은 회화의 일부분으로서 드로잉 선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그 주변을 밝혀주면서 음률과 같은 제스처로 존재한다. 네온 빛이 작품 표면에 미묘한 질감과 공간감을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작가는 네온에 연결된 전원 코드를 일부러 노출해 회화와는 또 다른 조각적 면모를 강조한다.
물론, 웨더포드의 모든 작품에 네온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작가는 페인팅을 먼저 완성한 후 네온 튜브를 더할지 여부를 결정하는데,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그 네온 유무에 따른 인상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의 신작은 녹색을 테마로 시작했는데, 작업하는 과정에서 녹색이 주황색으로 바뀌었어요. 또 우주 공간과 지하 암석층의 환상적인 조합을 보여주는 핑크 페인팅 작업도 했죠.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10점 중에는 네온 불빛이 있는 그림과 없는 그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다양한 영역을 선보일 수 있어 매우 기뻐요.” 어떤 그림에서는 웨더포드가 창조한 녹색의 깊이감 속에 빛의 발산이 더해지는 반면, 또 다른 그림에서는 다양한 색상이 서로를 흡수하며 드라마틱하게 일렁거린다.
흥미로운 것은 강렬하게 화폭을 오가는 붓 터치와 달리, 작업을 준비하는 웨더포드의 태도는 아주 조심스럽고 엄격하다는 점이다. 그녀의 스튜디오는 1940년대에 작은 할아버지가 지은 나사 공장을 개조한 곳이다. 그리피스 공원과 샌가브리엘 산맥이 보이는 곳으로, 자연의 빛이 그대로 스며드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저는 혼자 있는 상태로 그림을 그려야 해요. 제 공간인 스튜디오에서조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집중하기가 힘들답니다. 종일 혼자 있어도 작품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요. 오전 10시쯤 도착해 오후 3시까지 붓질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때도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시작 시각을 앞당기려고 애썼지만, 절대 이룰 수가 없었어요···.” 드디어 작업에 착수한 이 화가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웨더포드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작업한다. 화가가 작업에 들어간다는 건 신체를 쓴다는 뜻임은 물론, 캔버스와 감정적으로 대면한다는 의미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몇 시간이 그저 흘러가도록 고뇌에 빠지는 예술가. “저는 한때 수년 동안 일본 작가 카즈오 시라가와 구타이 운동(1950년대 아시아에서 시작된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에 매혹되었어요. 시라가의 작품을 참 좋아합니다. 그 또한 저처럼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서 발로 작업했죠. 정말 많은 예술가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거장 화가 이우환도 있어요. 그가 이끈 모노파의 다른 화가들 작품에도 끌려요.”
메리 웨더포드는 한국에서의 반응이 어떨지 무척 궁금하고 설렌다고 말하면서, <더블유> 독자들에게 특별한 요청도 남겼다. 이건 위트와 절박함 사이 그 어디쯤의 메시지일까? “얼마 전 작품에 사용하기 위해 페디큐어용으로 만들어진 라텍스 장갑을 샀는데, 그 미국 제조사가 없어졌어요. 혹시라도 이런 장갑을 구할 수 있다면, 꼭 알려주세요! 그릴 때 발을 이용한 시라가 작가도 그런 장갑을 사용했을지 몰라요.”
- 에디터
- 권은경
- 글
- 유두현(아트 어드바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