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라퍼 초능력자로 분한 한지민을 만났다

전여울

드라마 <힙하게>에서 오지라퍼 초능력자로 변신한 한지민과의 인터뷰

8월 방영하는 드라마 <힙하게>에서 한지민은 그 이름도 독특한 ‘봉예분’을 연기한다. 봉예분은 범죄 없기로 소문난 어느 농촌 마을에 살며 마을 사람들에게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데, 그 모습이 맑고 희기만 하다. 그런 봉예분은 어딘가 한지민과 나란히 겹쳐 보인다. 곁의 사람에게 개운한 기운을 주는 사람, 봉예분을 연기하는 것에 정답인 배우, 한지민은 그런 사람이다.

금색과 검은색 조합의 원 숄더 드레스는 가브리엘라 허스트 제품.

<W Korea> 8월 방영을 앞둔 JTBC <힙하게>의 촬영이 지난 2월 끝났죠. 요즘은 모처럼 휴식을 만끽하는 중일까요?

한지민 그렇죠.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 작품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여행이라. 친한 친구가 일본에 살아서 최근 일본도 다녀왔고요. 5월엔 소속사 식구들과 베트남 다낭으로 워크숍도 떠났어요.

공항 사진 덕에 워크숍이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를 모았죠.

너무 웃기지 않았어요? 나름 해외 워크숍인데 그 누구도 꾸미지 않고 와서(웃음). 저는 다행히 큰 사람들 뒤에 잘 숨어 있었습니다.

이번 워크숍에서 의외의 발견인 동료 배우는 누구였나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진첩을 보니 이상하게 (이)희준 오빠 사진이 유독 많더라고요. 왜 그런 사람 있죠. 뭘 하지 않는데도 희한하게 웃기는 사람. 희준 오빠가 그래요. 영화 <미쓰백>을 같이했을 땐 정작 오빠의 진짜 매력을 잘 몰랐거든요. 그땐 제가 맡은 ‘백상아’ 캐릭터가 워낙 어렵기도 했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작품이어서. 자꾸 저랑 같은 내향적 성향의 INFP라고 주장하는데,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데요?(웃음)

최근 ‘영옥’과 ‘영희’의 재회가 이뤄지기도 했죠? SNS를 보니 지난해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쌍둥이 자매로 호흡을 맞춘 배우이자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의 전시회장을 방문했더라고요.

은혜랑은 평소에도 자주 만나요. 극 중 영희(정은혜)가 영옥이(한지민)한테 사진을 엄청 보내잖아요. 실제 은혜도 그런 성격이에요. 갑자기 셀카를 30장씩이나 보낸다거나(웃음). 그럴 때면 전 “예쁘게 하고 어디 가~”라고 답하죠. 은혜 부모님과도 자주 만나서 이젠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이에요. 이번에 방문한 전시 <聯:연을 잇-다>는 은혜를 포함해서 장애인 예술단 22명이 참여한 단체전이거든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제가 어린 나이에 장애를 가진 쌍둥이 언니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동생 역할을 맡았는데, 그 후로 어느 자리에 가든 감사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요. 이번 전시장에서도 한 특수학교 교사님이 제 손을 꼭 잡더니 그 드라마로 장애인을 향한 시선이 몰라보게 개선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전 한 게 없다고 하는데도 늘 친절히 반겨주세요. 그런 순간마다 작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어떤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전시명이 <聯:연을 잇-다>인데, 과거 함께한 배우나 연출진과 다음 작품으로 재회하며 인연이 이어진 경우가 유독 많죠? <우리들의 블루스>도 2011년 JTBC <빠담빠담> 이후 노희경 작가와 10여 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고요.

노희경 선생님과는 인연이 깊죠. 선생님은 저를 오래 보셨잖아요. 장애를 가진 영희 캐릭터와 호흡하려면 사실 많은 배려가 필요한데, 선생님이 제게 그러셨거든요. “네가 꼭 연기해줬으면 좋겠어.” 저는 그 말이 오히려 감사했어요. 저는 행복도 사람한테서 느끼고 외로움도 사람 때문에 느끼거든요. 단 하루 일 때문에 만났을지언정 그게 보통 인연은 아니잖아요.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사람 없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 너무 소중해요. 인연만큼 중요한 것도 없죠.

평소 ‘미담 부자’로 불리는 비결이 드디어 밝혀졌군요(웃음).

하하. 제가 갈등 상황을 피하는 편이고, 살면서 적을 만들 일이 많았던 것 같진 않아요.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예전엔 아예 거절도 못하고 늘 나이스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요즘엔 확실히 좀 냉정해졌어요. 특히 일할 땐 좋은 결과물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해요.

비즈 장식 드레스는 셀프 포트레이트 제품.

검은색 오버사이즈 아우터, 은색 비즈 장식 셋업은 돌체앤가바나 제품. 검은색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힙하게>를 연출한 김석윤 감독과는 이번으로 세 번째죠? 2011년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2019년 JTBC <눈이 부시게>를 함께했어요. 이젠 척하면 척이겠네요.

너무너무요. 네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도 함께하고 싶은 감독님이에요.

2019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배우 김혜자가 <눈이 부시게>로 대상을 수상하며 이런 소감을 남겼죠. “이 작품을 연출한 김석윤 님,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선 어떤 연출자인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어요.

김혜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김석윤 씨는 엉덩이가 가벼워.” 현장에서 항상 뛰어다니세요. 배우며 스태프며 할 것 없이 다 챙기시고요. 감독님을 볼 때마다 ‘이런 사람이 감독을 하는구나’ 느껴요. 안테나가 한 100개는 있는 분 같아요. 저의 배우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도 은인 같은 분이죠.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통해서 저라는 배우에게 처음으로 굉장히 색다른 캐릭터를 입혀준 감독님이니까요. 스태프 한 명, 한 명을 애정으로 대하시는데 일에 있어선 철두철미하고 또 무서울 땐 정말 무서워요. 한없이 착한 게 좋은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감독님 덕분에 깨닫게 되기도 했죠.

김석윤 감독은 유쾌한 만화적 연출로 유명한데, 이번 <힙하게> 역시 코믹 수사 활극 장르예요. 우선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범죄 없는 청정 농촌 마을, 오지랖 넓은 수의사 ‘봉예분’이 사는데 그는 동물과 사람의 엉덩이를 만지면 그 대상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녔죠.

2019년 <눈이 부시게> 촬영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님이 <힙하게>의 밑그림에 대해 아주 어렴풋이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허당끼 있는 수의사가 주인공인 작품인데, 어때?” 그 말만 들었을 땐 이렇게 말했죠. “네, 네, 네. 너무 좋은데요?” 그러고선 언젠가 딱 1회분의 대본을 건네주셨는데 대본만 봤을 땐 진짜 많이 두려웠어요. 너무 허무맹랑하잖아요! 엉덩이를 만지면 과거가 보이는 초능력이라니(웃음). 몇 해 전 감독님이 저에게 지나가는 말로 “언제 우리 로코 한번 찍어야지” 하셨는데, <힙하게>는 로코는커녕 ‘코코코’만 있는 작품인 거죠(웃음). 감독님 전작이 JTBC <나의 해방일지>여서 사람들이 <힙하게>도 코미디이되 블랙코미디 장르일 거라 짐작하겠지만, 아닙니다(웃음).

하하, 우선 예고편에서부터 짙은 코미디 향기가 나긴 했습니다.

저도 최근 스틸컷을 봤는데 이렇게 못생기게 나와도 되나 싶었어요 (웃음). 온전히 감독님을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우스갯소리로 “이 작품을 왜 선택하신 거예요?”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이번 작품에 도전해야 하는 신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전 감사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신선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계기였고, 저도 미처 모른 저의 얼굴을 <힙하게>를 통해 알게 됐거든요.

작품을 선택할 땐 그 당시의 마음이 반영되기 마련이죠. <힙하게>는 어떤 끌림이 있는 작품이었나요?

사실 예전까지는 작품을 선택하기에 앞서 엄청난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김석윤 감독님과 <눈이 부시게>를 함께하면서 현장 안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된 뒤부터는 어떤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작품의 흥행 여부를 떠나 무엇이든 일단 도전해보자.’ <힙하게>도 1번은 제가 행복하려고 선택한 작품이에요. 사실 마음이 힘든 시기에 들어간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현장에서 너무 큰 힐링을 얻었어요. 저를 일으켜준 작품이죠. 그래서 언제 감독님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감독님 은퇴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연출하셔서 제가 김혜자 선생님 연배가 됐을 때 또 같이 작품 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말씀하셨죠. “난 그때 죽고 없다.”(웃음)

하하, 현장 분위기도 더없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네, 현장 나가기 싫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던 것 같아요. 언제는 연출부랑 다 같이 오징어게임도 했고요. 감독님이 직접 경품도 준비해 오셨어요. 또 회식 날엔 느닷없이 여자 팔씨름 대회를 하자고 하시질 않나(웃음). 크리스마스 땐 세트에 트리 장식도 하고. ‘이게 팀이구나’ 싶은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검은색 롱 드레스는 디젤, 은색 오브제는 큐밀리너리 제품

한없이 맑고 순수한 ‘봉예분’이란 캐릭터 이전에, 2018년 영화 <미쓰백>에서는 완전히 상반된 결의 ‘백상아’를 연기했죠.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미쓰백>을 통해 한지민이란 배우에게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듯했거든요. 극 중 어린 나이에 전과자가 되며 질곡 많은 삶을 산 ‘백상아’를 맡았는데, 제39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었죠.

사실 <미쓰백>은 뭔가 대단히 결심하고 도전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영화에서 다룬 아동 학대는 제가 평소에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한 사안이거든요. 끊임없이 우리가 살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던 차에 ‘백상아’란 캐릭터가 제게 온 거예요.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잘 풀어낼까보다 ‘이건 만들어져야 해’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촬영에 돌입하니 수많은 산을 마주해야 했죠. 우선 저예산 영화다 보니 개봉하기까지 아주 위태위태한 길을 걸어야 했고요. ‘백상아’란 인물도 이전까진 제가 보여드린 적 없는 모습이라 사람들이 으레 저에게 품고 있는 이미지와 ‘백상아’ 사이의 간극을 잘 좁혀가야 했어요. 계속해서 제 안의 틀을 깨야 해서 나 자신에게 화도 많이 내며 촬영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저란 사람이 참 많이 변했어요. 예전엔 소심하고 사소한 것에도 고민했다면 좀 대범해졌달까요.

오롯이 스스로 돌파해야만 했던 작품이네요.

그렇죠. 그 당시 실제 지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너 옛날과는 다르다. 성격 많이 바뀌었다.” 제가 담담하고 쿨해졌대요. 그런데 저는 그게 되게 좋았어요. <미쓰백> 다음 작품이 tvN〈아는 와이프>였는데 회사에서는 ‘유부녀 캐릭터인데 괜찮겠어?’ 하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속에선 ‘뭐 어때요?’라는 마음이 있었고, 결국 작품에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여했어요. 어떤 용기가 생긴 거죠.

계속해서 새롭게 발견되고 싶은 갈증이 있나요?

배우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예전에 <조선 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제안받았을 때 김석윤 감독님께 드린 첫 질문이 이거였거든요. “이 역할을 왜 저에게 제안해주셨어요?” 저는 되게 놀랐거든요. 극 중 ‘한객주’는 많은 분들이 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은 색깔의 캐릭터였으니까요. 과거 한창 활동했을 당시엔 여자 캐릭터들이 열에 아홉은 ‘캔디형’이었어요. 남자 주인공과 만나 티격태격 다투다가 어떤 갈등을 겪으며 친해지고, 후반부에 접어들면 1, 2부 때 있던 여자 캐릭터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갑자기 유순해지는 흐름. 물론 시대마다 작품마다 유행이 있기 마련이지만 한정적인 역할을 소화하면서 ‘어, 이거 해본 연기 같은데?’라고 느끼는 저 자신이 별로더라고요. 너무 큰 갈증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너무 반가웠고, 자유로운 영혼의 밴드 보컬 ‘유소정’으로 나온 영화 <플랜 맨〉이 좋았어요. 또 MBC <봄밤>의 ‘이정인’ 캐릭터도 좋았고요. 이정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나 남자 앞에서 한결같은 인물이거든요.

<미쓰백> 이후 <아는 와이프>, <눈이 부시게>등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에 잇따라 출연했고, 최근 들어선 티빙 <욘더>, 영화 <조제>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에 이름을 올렸죠. 이런 작품들이 당신에게 연이어 온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며칠 전 한 감독님을 만날 일이 있었어요. 제안해주신 캐릭터가 저의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어느 지점에서
제가 떠올랐는지 물었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냥 지민 씨가 걸어온 길이 생각났어요.” 제가 배우라는 일을 하면서 종종 부수적인 활동을 할 기회가 주어지잖아요. 베리어프리 영화의 홍보대사를 하거나 모금 활동을 일으키는 식으로 사회적 목소리를 낸 걸 감독님이 떠올린 거였어요. 저는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한 활동이 아닌데, 그런 모습을 보고 저를 판단하는 지점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런데 여전히 잘 모르겠는 경우가 더 많아요. 어떤 이유로 나에게 작품과 캐릭터가 오게 됐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검은색 시스루 드레스와 벨트는 돌체앤가바나 제품

흰색 헤드피스는 솔트워터 제품.

돌이켜봤을 때, 한지민을 가장 변화하게 만든 지난 작품 속 대사는 무엇이었나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하신 대사예요. 저는 과거에 대한 후회가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 같아요.

곧 방영하는 <힙하게> 속 ‘봉예분’은 누군가의 엉덩이를 만지면 그 사람의 과거가 보이는 특별한 능력이 있죠. 내가 가지지 못해 타인에게서 뺏고 싶은 기질, 능력이 있나요?

저는요, 되게 쿨하고 싶어요. INFP이고 싶지 않거든요(웃음). 자기가 원할 때 전원을 딱 끄는 사람들 있잖아요. 제일 부러워요. 쉽게 상처받지 않고,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도 어릴 때보다는 좀 나아지긴 했어요. 예전엔 뭐 하나 틀어지거나 바뀌는 것에 대한 불안이 엄청나게 컸거든요.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있어요. 대중에 알려진 사람으로서 대중의 관심도는 늘 한결같기가 쉽지 않잖아요. 한결같지 않을 거라는 그 사실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스스로 어떤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아… 그런데 진짜 단순한 사람들은 이런 준비도 안 하겠죠(웃음).

그렇죠…(웃음).

오늘을 살아가세요, 현재를 사세요, 지민아(웃음). 아직도 잘 못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전 나이를 먹을수록 저 자신이 좋았어요. 20대의 저보다 30대의 제가 좋고, 30대의 저보 다 40대인 지금이 더 좋아요. 그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것 같아요.

검은색 컷아웃 드레스는 브라이덜공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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