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빙>의 방영을 앞두고 있는 한효주와의 대화
한효주는 어느 계절 자신에게나 세상에게나 솔직해지기로 했다. 잠시의 숨 고르기 시간. 이를 마친 그녀는 드라마 <무빙>의 방영을 앞두고 있다. 작품에서 그녀는 한층 날쌘 몸놀림의, 비밀스러운 요원이자 엄마를 연기한다 .
<W Korea>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철인3종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고요.
한효주 어휴, 정말 출전해볼까 했는데 소문이 너무 나서 안 나갈까 생각 중입니다(웃음).
최근까지 영화 <독전 2>를 촬영하며 운동에 푹 빠졌다 들었어요.
최근이라기보다 2019년 미국 진출작이자 영화 <본> 시리즈의 스핀오프 드라마 <트레드스톤>을 촬영하면서 운동에 취미를 붙였어요. 20대엔 운동과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거든요. 그저 빼빼 마른 몸이었어요. 그러다 <트레드스톤>을 준비하면서 운동을 좀 심하게 했는데 그때부터 몸이 커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건강해지는 걸 느끼면서 운동에 푹 빠져든 것 같아요.
작년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을 통해 검술, 수중, 와이어 액션까지 섭렵했으니, 이젠 명실상부 액션 배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웃음).
멜로 해야죠, 이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웃음).
요즘 프리다이빙에도 빠지셨다죠. 누군가는 심해를 유영하는 프리다이빙을 두고 ‘나를 줄곧 따라다니던 그림자가 유일하게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참 흥미로운 스포츠예요. 물에 들어가기 전 준비 호흡이 필요하고, 그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최종 호흡을 했다가, 깊게 수심을 탈 땐 숨을 멈추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회복 호흡이란 걸 해요. 결국 모든 건 ‘호흡’이에요. 온전히 내 호흡과 내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순간의 연속인 셈이에요. 평소 스트레스가 쌓였거나 잡념이 많다가도 물에 들어가는 순간 딱 스위치오프가 되면서 나 자신과 커넥팅되는게 느껴져요.
오롯한 집중이라, 한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꽤 힘들겠네요.
정말요. 또 재미있는 게, 혼자서는 물에 못 들어가요. 물 위에서 내 움직임을 봐주는 버디가 꼭 있어야 해요. 물속에서 혼자 유영하고 있을지언정 누군가가 곁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거죠. 되게 재미있어요. 인생 같아요.
요즘 한효주의 테마는 ‘취미와 휴식’일까요?
그렇죠. 디즈니+〈무빙>, <지배종>, 영화 <독전 2>를 재작년부터 쉴 새 없이 찍었는데 올 초에야 촬영이 종료됐어요. 앞으로 당분간은 촬영 계획이 없고요. 요즘처럼 계획 없이 쉬어보긴 처음이에요. 정말로, 데뷔이래 처음.
작년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인기상을 수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죠. “사실은 개근상을 받아야 하는 것 같다.” 그 얘기를 듣고 필모그래피를 살피니 정말 빈틈이 없더라고요.
말 그대로 눈 감았다 뜨니 서른일곱이더군요(웃음). ‘정신 안 차리면 금방 마흔이겠는데?’ 생각하니까 그동안 일만 하느라 못 해본 것들을 좀 해보면서 살아야겠다 싶더라고요. 프리다이빙이며 필름 카메라, 집 꾸미기 등등. 시간이 좀 아까운 것 같아요.
한 고령의 배우가 한 이야기가 떠올라요. 배우는 일할 때가 아닌, 일하지 않을 때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 요즘 의식적으로 여가 시간을 빼곡히 채우는 중일까요?
그런 편이에요. 과거엔 사실 시간도 시간인데 쉽게 무언가에 푹 빠질 만큼 좋아지는 게 없었어요. 오로지 연기에만 몰두하다 보니까요. 모든 에너지를 일에만 쏟아야 하니 다른 데 관심을 둘 심적 여유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 당시엔 이런 고민도 했어요. ‘나는 왜 이렇게 뭐가 안 좋아지지?’ 나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며 지낸 거죠. 또 너그럽지 못했고, 칭찬에도 박했고.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했던 것 같아요.
사실 자기를 채찍질하는 스타일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마 <찬란한 유산>, <동이>로 큰 성공을 거뒀잖아요. 그런데 그것에 안주하지 못했나 보군요.
늘 제가 부족하다고 느껴졌어요. 내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고. 어렸으니까요. 지금 돌이키면 그때 당시 조금도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요. 그런데 항상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이 저에게 주어졌던 것 같아요. 일단 <동이>를 찍을 때만 해도 스물네 살에 불과했으니까요.
그 작품 60부작 아니었나요?
맞아요(웃음).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스물네 살밖에 안 된 애가 60부작을 맡고, 게다가 <동이>에서 ‘동이’로 나왔잖아요. 항상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큰 게 주어지니까 그걸 어떻게든 해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면서 산 느낌이에요.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는 것보다는 늘 더 노력하고 더 애쓰며 산 느낌이랄까.
그런데 최근에도 치열한 작품을 연달아 촬영했습니다. 초능력 소재의 드라마 <무빙>부터 마약 밀매 조직의 실체를 쫓는 영화 <독전 2>, SF 스릴러 장르의 <지배종>까지. 최근 2년도 <동이> 때 못지않게 치열했을 듯하네요.
2020년 크랭크인한 <해적: 도깨비 깃발>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이후 <해피니스>, 〈무빙>, <독전 2>, <지배종>까지 다섯 작품을 논스톱으로 쭉 찍었으니까요. <해적: 도깨비 깃발>은 미국 드라마 <트레드스톤>을 마치고 한국에 복귀해 찍은 첫 작품인데 그때 동료애를 참 많이 느꼈어요. 팬데믹 시기였고 남자 배우들밖에 없는 현장인데도 그들과 진짜 끈끈한 우정을 쌓았거든요. 그때 새삼 ‘아, 현장은 참 즐거운 거구나’라고 느꼈어요. 물론 다섯 작품을 연달아 찍다 보니 체력적으로 지친 감은 있죠. 잘 리커버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요즘엔 숨 고르기를 하는 중인 것 같아요. <무빙>만 해도 20부작이었잖아요. 완성까지 자그마치 3년이나 걸렸는데 요즘 시대엔 보기 드문, 긴 호흡의 작품이죠.
8월 9일 공개되는 <무빙>은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죠. 강풀의 인기 웹툰이 원작인 데다 국내에선 보기 드문 초능력 소재의 작품이잖아요. 처음 작품이 왔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사실 강풀 작가님, 드라마 제작진과 만나는 첫 미팅 자리에서 거절 의사를 전하려 했어요. 제가 잘 소화해내지 못할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미팅차 만난 자리에서 강풀 작가님이 원작 만화를 제게 건네며 말씀하시더라고요. “효주 씨는 할 수 있습니 다.” 그걸 듣고 속으로 생각했죠. ‘제, 제가요?’(웃음)
하하. 극 중 초인적 오감을 지닌 국정원 엘리트 요원이자 고3 아들을 둔 ‘이미현’으로 등장합니다. 엄마 역할은 처음인가요?
아니죠. 동이도 엄마였어요. 전 이미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되었습니다(웃음). 그런데 <동이>에서의 아들 연잉군은 고작 열 살이었지만 <무빙>에선 고3을 둔 40대를 맡았잖아요. 처음엔 진짜 깜깜하더라고요. 밥을 먹어도 체하고, 잠도 안 오고(웃음). 스스로 엄청나게 주문을 걸었어요. ‘나는 이 아이의 엄마다.’ 촬영 전에 아들 역할을 맡은 친구와 함께 밥도 먹고 연락도 자주 하면서 친해지려고 했어요. 처음엔 누나라 부르려 하길래 말했죠. “절대 안 된다. 앞으로 계속 엄마라 불러라.”(웃음)
각본에 참여한 강풀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편 당신이 이해한 <무빙>은 어떤 작품인가요?
작가님이 잘 말씀하신 것 같아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가장 먼저 느낀 게 ‘휴머니즘’이었어요. 사실 근래 만들어진 많은 작품은 굉장히 장르적이잖아요. 자극적인 요소가 많고 전개도 무척 스피디해요. 그런데 저는 강풀 작가님이 그리는 특유의 투박한 정서, 인간애가 오히려 더 끌리더라고요. 글이 작가님과 참 닮았어요.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잘 만들어지면 어떨까’ 머릿속에 그렸던 것 같아요.
<무빙>이 당신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남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촬영 기간이 길었던 만큼 정이 많이 들었어요. 촬영팀이며 분장팀, 미술팀 모두 최고로 잘하는 팀이어서 현장에서의 합은 더할 나위 없었고요. 박인제 감독님과도 많이 친해졌죠. 원래 작품 한 편 같이했다고 스스럼없이 ‘감독님 술 한잔해요’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강 감독님은 워낙 곰돌이 푸같이 푸근하신 분이어서(웃음). 남편 역할로 함께한 (조)인성 오빠와는 20대 때 CF 작업만 하다 작품으로 만나긴 이번이 처음인데, 같이 호흡을 맞추며 오빠가 이렇게 세심한 사람이었나 느낀 순간이 무척 많았어요.
<해적: 도깨비 깃발>에 이어 <무빙>에서도 결국 ‘사람’을 얻었네요.
인연을 중시하는 편이에요. 모든 사람과 연을 이어갈 순 없지만 누군가가 나와 이어져 있는 시간 안에서는 상대를 진심을 다해 대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가식을 진짜 싫어하거든요. 싫은 게 있으면 곧이곧대로 티가 나는 스타일이에요. 빈말도 잘 못하고요. 그래서 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겐 그렇게까지 나이스하지 못한데 한번 연을 이어가야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편이에요.
최근 들어 필모그래피에 새로운 궤적이 생기고 있다는 인상이 스칩니다. 2019년 <트레드스톤>으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고, 2021년 하스미 에이이치로 연출의 첩보 액션 영화〈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국형 아포칼립스라 불린 드라마 <해피니스>에 출연했고요. 이후 액션이 강조된 작품 <해적: 도깨비 깃발>, <독전 2> 등에 참여했죠. 근래 이 같은 작품들에 유독 손이 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20대에 멜로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늘 다른 장르에 대한 열망이 제 안에 자리한 것 같아요. 그러던 중 <트레드스톤>이란 작품을 만났는데, 당시 배역을 따내려고 몇 번이고 거듭 오디션을 봤거든요. 그때 내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했다는 성취감을 아주 크게 맛본 듯해요.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죠. 그 작품으로 처음 액션 연기에 도전하게 됐는데, 낯선 해외에서 오전엔 스턴트 훈련에 매진하고 오후엔 짐에 가서 근력을 키우는 식으로 하루를 거의 운동선수처럼 보냈어요. 그러다 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요. 건강한 상태에서 고르게 되는 작품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그렇게 리더십 있는 해적단 단주 역할의 <해적: 도깨비 깃발>을 골랐고 〈해피니스>만 해도 조금도 제가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 캐릭터였어요. 이런 식으로 30대가 돼서는 솔직해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작품 선택에 있어서나, 표현에 있어서 한층 솔직해진 거죠.
<트레드스톤>은 한 마디로 당신이 돌파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네요.
네. 작품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를 살린 작품이에요. 연기하는 즐거움, 현장의 즐거움, 사람 사귀는 것의 즐거움을 다시 일깨워준 작품이었어요.
<무빙>에는 부모의 초능력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유전된다는 설정이 있죠. 훗날 자녀가 생긴다면 그가 물려받았으면 싶은 자신의 일면은 무엇인가요?
미모?(웃음)
하하. 반대도 있을까요? 이것만큼은 안 닮았으면 싶은 것.
제 안에는 어쩔 수 없는 우울이 있거든요. 사실 이게 싫거나 고치고 싶진 않아요. 그런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좀 더 예민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지금처럼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가끔 버거울 때가 있긴 해요. 그치만 어느 정도 내 삶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그림자 같은 거니까, 같이 가는 친구 같은 거니까, 저는 그 우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자식이 생긴다면 그 우울만큼은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 없이 긍정적이고 좋은 쪽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죠.
올해 가장 깊게 몰두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요즘엔 오히려 제게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으려 해요.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에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고, 즐길 수 있는 걸 최대한 즐기자. 단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남들은 잘 모르는, 한효주에 얽힌 비밀 하나를 알려주세요.
저는 생각보다 굉장히 투명한 사람이에요. 관객들이 이렇게 저렇게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저를 만나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진짜로 이런 사람이에요?” 정작 저는 한 번도 ‘이런 사람 아니에요’ 말한 적이 없는데도요. 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투명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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