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박제된 어느 해 여행의 기억들. 포토그래퍼 8인이 8개 도시에서 채집한 여행의 조각들을 보내왔다.
중국 운남성
중국 남서부에 자리한 광활한 땅, 운남성. 그곳에서 친구들과 두 달간 머물며 운남성 주변 소수민족 마을을 탐방했다. 그러던 중 카메라에 담은 어떤 풍경은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레스
인도 함피
인도 남부 내륙에 위치한 마을, 함피. 퉁가바드라라는 큰 강을 중심으로 힌두 왕조의 유적과 바위산, 배낭여행객과 마을의 현지인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어느 날인가, 하루 만원 정도 하는 허름한 여행자 숙소에 머무르다 근처 다이빙 포인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았다. 수영에 열중하는 이스라엘 여행객들과 뒤섞여 절벽 위에서 다이빙하던 함피의 아이들. 마지막 이틀은 오토바이 한 대를 빌려 여행자들의 발길이 드문 강 위쪽 유적과 바위산 지역까지 달리기도 했다. 함피에 다다르기 전 머문 도시에서 사진 작업을 모두 끝내고 마음 편히 이곳에 당도한지라, 카메라를 손에 쥘 때 잘 찍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시작한 이후 여행엔 항상 일 혹은 작업이라는 목적이 있었는데, 함피에서 보낸 나날은 가장 순수하게 여행 그 자체가 목적인 여정이 아니었나 싶다. –하태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떠나야 할 이유만 가득하고 주머니는 가벼운 여행자를 받아줄 여행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다 건너 머나먼 이국, 태양이 내리쬐는 스페인이었다.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찾아오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인생의 어떠한 분기점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지쳐버린 당시의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화살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이 길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도무지 종착지에 다다를 것 같지 않은 예감에 지치기 일쑤지만, 쉬었다 간다 한들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걸 금세 깨닫는다. 그리고 애초에 경쟁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하고 고요한 자연이 지루해질 즈음이면 운 좋게도 세계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축제 ‘산 페르민’을 만나기도 한다. 행운이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전해주는 에너지를 받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고적한 길을 그저 묵묵히 걸었다.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사진가는 매번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직업이다. 그렇기에 항상 최고의 작업물을 위해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매일 걷는 길과 같은 ‘항상성’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매일을 잘 걸어가다 보면 간혹 행운처럼 만나게 되는 축제와 같은 일을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장기평
모로코 마라케시
2019년 여름이었다. 런던에서 유학하던 시절,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마라케시의 풍경에 끌려 3박 4일 짧게 여행을 떠났다. 나흘간의 여행 중 마라케시 중심에 위치한 자마엘프나 광장에서 조금은 불편한 광경을 목도하기도 했다. 광장 테라스에 앉아 여유로이 커피를 즐기는 프랑스 관광객과 그들에게 구걸하는 모로코 상인들. 모로코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다. 지금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모로코엔 여전히 언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프랑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면서 마주한 풍경들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3박 4일의 짧은 여행은 어느새 그 광장에 있던 모로코 상인을 카메라로 담는 여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떠난 마라케시 여행은 오로지 자마엘프나라는 광장에서만 이루어졌다. 나는 그 광장에서 상인들과 만나고, 웃고, 떠들고, 싸우고, 많이 먹으며 한 달을 보냈다. 노랗고 빨간, 파랗고 검은 외벽의 모로코식 건물 사이로 그들이 웃고 우는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박배
자메이카 포트 안토니오
바다 얘기만 나오면 몹시 지루했던 술자리일지언정 눈이 번쩍 뜨인다. 고운 모래 대신 감자 같은 돌멩이들이 쓸려 나가는 소리가 흡사 뼈가 부서지는 소리 같던 니스를 시작으로, 애인과 함께 갔을 때도 혼자 걷고 싶을 정도였던 몬탁만큼 쓸쓸한 바다는 없다고 궁상을 늘어놓다가 슬며시 자메이카의 블루 라군 얘기를 꺼낸다.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뉴욕의 디제이들과 일주일가량 촬영을 마치고 곧장 포트 안토니오로 떠났다. 그곳은 옥빛이었다가 돌연 쪽빛으로 변하는 바다색이 특징. 그중에도 블루 라군은 포트 안토니오에서 11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산에서 흐르는 차가운 지하수와 카리브해의 따뜻한 바다가 만나 기묘한 물길이 만들어지는 특별한 곳이다. 마실 수 있을 것처럼 아주 맑다가도 깊은 수심 탓에 옥빛을 띠는 바다. 현지인의 뗏목을 타고 들어가면 영화 <아바타>에서나 볼 법한 돌을 쌓아 만든 요새 같은 자연 수영장이 펼쳐지는데, 바로 지하수가 마침내 바다로 흘러드는 곳이라 한다. 기척이라고는 새와 곤충의 울음소리밖에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나체가 되어 수영했다. 그날은 손에 카메라가 내내 들려 있었음에도 사진을 잘 찍지 않았다. 언젠가 그곳이 그리울 때 사진을 꺼내기보다 기억에서 꺼낼 수 있기를, 꺼내 볼 사진이 충분히 없어서 다시 방문하기를 바랐다. -이코베
이탈리아 카몰리
밀라노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기계처럼 사진을 찍던 시절, 더는 셔터를 누르고 싶지 않을 땐 이탈리아 제노바에 위치한 카몰리로 향하곤 했다. 돌이키면 그곳에선 늘 한 손에 맥주 한 병과 이탈리아식 샌드위치인 파니노를 쥔 채였다. 여름 이탈리아만의 바삭거리는 햇빛 아래, 까만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소 여물 먹듯 천천히 입을 우물거리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 시간들. 그러다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어질 때면 똑딱이 필름카메라를 들고 언덕을 오르거나 해변에 누운 채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셔터조차 누르기 싫어 찾은 곳이지만 땀과 모래가 잔뜩 묻은 손으로 이리저리 구도를 잡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땐 혼자 바보처럼 웃기도 했다. 그렇게 몇 장 사진을 찍고 나면 이내 마음이 평온해져 차가운 맥주와 새로운 맛의 파니노를 새로 사 모래사장에 누워 바다만 보다 온 기억이 있다. 해변이 조금 지겨워지면 근처 연못으로 옮겨 또 다른 느낌의 일광 아래 몸을 뉘었다. 따끔하고 끈적한 소금기를 충분히 느끼며 불편했던 마음을 씻어내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늘 다시 셔터를 누를 힘이 생겨났던 것 같다. -최영모
대한민국 제주
어느 해 훌쩍 제주로 떠났고 금능해수욕장에 발이 닿았다. 찰박거리는 파도, 포말이 부서지며 내는 소리, 멀리 보이던 이름 모를 섬 따위는 마치 사진처럼 고스란히 그날의 추억으로 남게 됐다. 유난히 보슬거리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금능에선 자꾸만 바닥을 바라보게 되기도 했다. 그때 본 오렌지색 그물, 아무렇게나 자란 식물, 투명한 해조류에 왜인지 자꾸만 카메라가 향했던 것 같다. -김신애
홍콩
얼마 전 며칠간의 휴가가 생겼다. 그간의 잠 못 이루는 치열하고 반복된 일상을 벗어나 잠시라도 낯선 곳에 뚝 떨어지고 싶었다. 평화로운 휴양지보다는 낯선 도심의 여행자가 되어 늘 그 자리에 있는 빌딩 건물 하나도 새롭게 느끼고, 세상의 모든 만물을 천천히 세세히 관찰하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한 여행지가 홍콩이다. 여름이 가까워진 홍콩은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기와 습도가 엄청나서 떠나온 걸 잠시 후회도 했지만, 밤낮으로 선사하는 아름다운 도심과 야경의 파노라마에 모든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빽빽이 솟은 고층 빌딩 숲을 보면 알 수 없는 컴퓨터 그래픽에 갇힌 것 같기도 하고, 빤짝이는 파노라마 야경 덕에 마치 내가 애니메이션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도 같았다. 홍콩에 사는 친구는 엄청난 트래픽이 가장 힘들다고 했지만,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도시는 모든 것이 판타지로 가득했다. 요즘 작업에서 AI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홍콩은 마치 AI가 만들어준 가상의 도시처럼 비현실적 풍경이었다. 도시에서 도시로 떠나왔으니 머리를 식힐 만한 여유나 평화로움은 없었지만, 더위를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내가 후끈한 열기를 이겨내고 떠나올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도시인 것 같다. -최나랑
- 에디터
- 전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