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기 직전,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크리스토퍼

전여울

덴마크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크리스토퍼(Christopher)를 제15회 서울재즈페스티벌의 백스테이지 현장에서 만났다. 무대의 막이 오르기 직전이었고 그곳엔 뮤지션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막이 열리길 기다리는 크리스토퍼가 있었다.

체크 패턴의 셔츠는 페라가모 제품, 넥타이는 에디터 소장품.

지난 5월 27일,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서울재즈페스티벌의 이튿날 마지막 공연을 장식할 뮤지션 크리스토퍼의 하루는 일찍 시작됐다. 오전 9시, 여름 초엽이지만 때아닌 비 소식으로 차가워진 공기 속 사운드 체크 리허설은 시작됐고, 1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에야 그는 비로소 가뿐한 미소를 띤 채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리허설 직후 <더블유>와 화보 촬영을 앞둔 그는 대기실을 메운 촬영 스태프 한 명 한 명에게 경쾌한 하이파이브를 건네며 인사를 나눴다. “빨리 관객들의 에너지를 느끼고 싶네요. 리허설 나쁘지 않았거든요.” 그가 잔뜩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크리스토퍼의 한국 공연은 이번으로 여섯 번째다. 2017년 서울재즈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두 차례의 단독 콘서트를 포함해 쉴 틈 없이 한국을 찾은 그는 방문 때마다 서울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내며 한국에서의 여정을 즐겼다. 예년 같았으면 이번 역시 공연을 마친 후 한국식 바비큐에 ‘소맥’을 곁들이며 공연의 여흥을 달랬을 테지만, 올해만큼은 공연 직후 바삐 출국해야만 하는 일정이 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밴드 동료, 크루들과 다 같이 한식당에서 뒤풀이하는 게 늘 한국 공연의 하이라이트였거든요. 올해는 타투 숍에 들러 문신을 새길 생각까지 했어요.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에 문신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나흘 뒤 제가 첫 주연으로 참여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뷰티풀 라이프>가 전 세계 공개돼요. 영화 프로모션으로 바삐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라 너무 아쉽네요.”

자카드 소재 재킷과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크리스토퍼의 말처럼 지금 그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2012년 데뷔 앨범 <Colours>를 시작으로 총 5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며 뮤지션의 길을 차근히 밟아온 그는 최근 배우로 데뷔,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그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뷰티풀 라이프>는 지난해 영화 <토스카나>를 연출해 주목 받은 메디 아바즈 감독의 작품으로, 이번 작품에서 그는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청년 어부 ‘엘리엇’을 연기한다. “3년 전 메디 아바즈 감독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들려줬는데,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10초가 채 걸리지 않았어요. 극 중 뮤지션이라는 배역이 특히 와닿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연기에 도전하고 싶었거든요. 지금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에 적기라는 생각이 스쳤어요. 지난 4월 28일엔 자작곡이자 영화의 사운드트랙인 ‘Hope This Song Is For You’를 선공개했는데, 싱글이 발매되던 날 마침 둘째 딸이 태어나기도 했죠. 요즘은 정말이지 마법 같은 우연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듯해요.”

남다른 재능을 가졌지만 불행한 과거 탓에 이를 숨기고 살던 어부 ‘엘리엇’은 어느 날 유명 음악 프로듀서의 눈에 띄며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는다. 영화 <뷰티풀 라이프>의 이야기는 어쩐지 크리스토퍼 본인의 삶과 묘하게 기시감을 공유한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바투에 위치한, 녹음으로 우거진 도시 프레데릭스베르에서 나고 자란 크리스토퍼는 어린 시절부터 뮤지션을 꿈꿨다. 음악과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가  열두 살을 지나던 때다. 우연히 듣게 된 존 메이어의 음악은 소년의 세상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고 크리스토퍼는 유튜브를 통해 기타로 존 메이어의 모든 노래를 연주하는 방법을 익혔다.

“존 메이어가 첫 번째 영감이었다면, 제이슨 므라즈를 통해 비로소 음악이야말로 제가 평생 하고 싶은 일임을 깨달았어요. 가장 아끼던 노래인 ‘I’m Yours’를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꼬박 2주간 지하 연습실에 틀어박혀 지냈을 정도니까요. 마침내 부모님에게 그 노래를 들려줬을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 그 자리에 몇몇 여자애들이 있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이후 고등학교 재학 시절, 기타 한 대를 멘 채 무작정 EMI의 코펜하겐 지부를 찾은 크리스토퍼는 경영진 앞에서 여러 곡을 즉흥으로 연주했고, 그 자리에서 음반 계약까지 성사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011년, 로빈의 ‘Call Your Girlfriend’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커버한 영상은 유튜브에서 곧장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2012년 마침내 그의 데뷔 앨범 <Colours>가 세상에 나왔다. 크리스토퍼는 이 앨범으로 그해 연말 열린 덴마크 뮤직 어워즈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송라이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진정성이에요. 음악은 소통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음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쉬워야 해요” 데뷔 앨범인 <Colours>부터 가장 최근인 2021년 발표한 5집 <My Blood>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토퍼는 줄곧 부담 없는 팝 사운드를 정조준해왔다. 라디오 친화적인 캐치한 멜로디, 따뜻하고 풍성한 질감의 알앤비 보컬, 익숙한 단어들로 구성한 쉬운 노랫말 등은 그의 디스코그래피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나아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는 ‘Monogamy’, 치명적인 상대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괴로움을 말하는 ‘Bad’ 등 대중의 입맛을 겨냥한 크리스토퍼표 러브송은 그를 단숨에 전 세계 음원 차트의 꼭대기로 데려갔다. “모든 노래는 제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요. 제가 직접 겪은 분위기와 느낌을 최대한 곡에 녹이죠. 특히 사랑 노래를 쓸 땐 아내가 뮤즈이자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해요. 그녀는 한 마디로 저만의 원더우먼이에요.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진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요. 여기에 정직함, 성실함까지 갖췄으니 저로선 너무 존경스러운 대상이죠. 그녀와 가족, 즉 훌륭한 팀이 된 덕분에 지금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고 저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흰색 셔츠는 구찌 제품, 액세서리는 아티스트 소장품.

지난해 크리스토퍼가 청하와 협업해 발표한 싱글 ‘When I Get Old’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훗날 나이가 들면 과거를 돌아보며 생각하겠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Oh When I get old / I’ll be looking back / Wishing it could last forever).” 크리스토퍼는 훗날 자신의 인생을 돌이켰을 때 영원히 박제되었으면 좋겠을 가장 찬란한 순간 중 하나로 지난해 8월 서울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진행한 단독 콘서트를 꼽으며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였죠. 공연장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의 팬들이 ‘이 순간만을 위해 기다려왔어(Waited for this moment)’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저를 반겼으니까요. 그 순간 느낀 감정은 아마 평생 간직할 것 같아요. 그때의 슬로건을 왼팔에 타투로 새기기도 했으니까요. 한국 관객과의 만남은 언제나 환상적인 경험으로 기억에 남아 있어요. 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스스로 ‘옳다’고 느껴야 움직이는 편이에요.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추구하기보단 자연스럽게 다가와야 일에 뛰어들죠. K팝도 저에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제 안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아요. 청하를 비롯한 K팝 뮤지션과 협업하고 관객들을 더욱 많이 알게 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졌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함께 합을 맞춰보고 싶은 K팝 뮤지션이 무지 많아요. 방탄소년단, 크러쉬, 블랙핑크,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잠깐, 너무 많나요?(웃음)”

지금 크리스토퍼의 앞으론 여러 여정이 펼쳐져 있다. 지난 3년 가까이 준비해온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은 머지않아 전 세계 팬들에게 닿을 참이고, 최근 발을 들인 연기의 세계는 그를 예기치 못한 또 다른 흥미로운 여정으로 이끌 것이다. 여기에 새 아이를 얻은 두 딸의 아빠로서의 삶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발을 딛고 있는 지금, 그는 자신이 꿈꾸는 앞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의 최종 목표는 확고해요. 제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 그게 사랑이든 기쁨, 분노, 슬픔이든 상관없어요. 정말 좋은 노래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좋은 느낌은 없잖아요. 제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든 무대에 설 때든 마이크 앞에 설 때마다 항상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노력해요. 저의 노래는 곧 저의 열정이고, 이를 수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순간이니까요.”

자카드 소재 재킷과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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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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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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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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