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밀라노는 도시 전체가 고밀도로 응축된 동시대 산업디자인의 결정체가 된다. 기발하고, 혁신적이며, 아름답고, 매혹적인 디자인 전시의 최전방을 분주하게 따라잡은, 올해 4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열린 밀라노 디자인 위크 리포트.
매년 가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출장을 앞두고는 흥분보다는 비장한 마음이 앞선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연례 디자인 행사로 대규모 가구박람회인 ‘살로네 델 모빌레’를 필두로 밀라노 전역에서 1000여 개(올해 ‘푸오리살로네’ 웹사이트 상 공식 집계로 950개)에 달하는 장외 전시가 한꺼번에 개최되니, 앞서 체력을 비축하고 매일 섭취할 비타민과 영양제를 챙겨 고밀도의 한 주를 보낼 채비를 마쳐야 하는 탓이다. 그간 팬데믹으로 인한 취소와 축소 개최에 이어 지난해에도 여전히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4월이 아닌 6월에 열렸으니, 온전한 4월의 밀라노 디자인 위크 귀환은 올해야 완성된 셈이다. 이를 입증하듯 지난해에는 결석(?)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 하늘길도 열려 전 세계에서 30만 명이 훌쩍 넘는 기록적인 수의 관람객이 이 도시를 찾았다.
모든 전시를 관람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초반에 몰려 있는 프레스 프리뷰조차도 다 따라잡을 수 없다. 때문에 어떤 전시를 언제, 어떤 동선으로 찾아야 가장 효율적일지 마치 전쟁 작전을 짜듯 스케줄을 짜는 일도 비장함을 더한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일정표를 클리어하려면 잠시 앉아 밀라네제 네그로니 한 잔 기울이는 것도 사치일 정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비장함만 벗어나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멋지며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크리에이티비티의 축제를 누비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니, 디자인 위크가 막을 내릴 무렵엔 ‘올해도 오길 잘했다’는 보람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건 그 며칠 동안의 기록이다.
위대한 유산부터 실험적 디자인까지
본격적인 디자인 위크가 시작되기 전 주말 일요일. 밀라노 디자인 신의 터줏대감이자 대모로 불리는 두 여성, 로사나 오를란디(Rossana Orlandi)와 니나 야사르(Nina Yashar)의 디자인 갤러리 전시 오프닝이 있었다. 패션계에서 일하다 2000년대 초반 자신의 이름을 건 ‘로갤러리’를 오픈한 로사나는 재능 있는 신예 디자이너들을 발탁해 자신의 갤러리에서 재량을 펼치며 작품을 판매하도록 인큐베이팅해왔다. 안뜰이 멋진 그녀의 갤러리엔 올해도 젊은 디자이너들을 포함해 세계 곳곳의 가구 및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모여들었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오버사이즈 화이트 프레임 선글라스를 낀 로사나 여사를 현장에서 만나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며 그녀가 요즘 어떤 아트 퍼니처 작가를 눈여겨보는지, 그녀의 갤러리에 어떤 브랜드를 유치했는지 이야기 나누는 일은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오프닝 테이프를 끊는 의식과도 같다. 한편 1979년 ‘닐루파 갤러리’를 설립한 니나 야사르 또한 상류층 주거공간을 위한 빈티지 가구와 동시대 아트 퍼니처를 큐레이팅해 선보인다. 올해는 창고 스타일의 대형 공간인 닐루파 디폿에서 디자인 듀오 ‘오브젝트 오브 커먼 인터레스트 (OoCI)’가 액화된 레진을 소재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신비로운 가구 컬렉션 ‘Poikilos’를 소개하는 전시를 진행했다.
두 노련한 갤러리 전시 다음 차례로 해를 거듭할수록 놓쳐서는 안 될 스폿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Alcova)로 향했다. 올해 세 번째 에디션을 선보이는 알코바는 참신한 전시 장소가 매년 화제인데, 지난해 오래 된 군병원에 이어 올해는 그보다 더 거칠고 충격적인 옛 도축장 부지를 선택했다. 유명 디자인 큐레이터 발렌티나 치우피(Valentina Ciuffi)와 조셉 그리마(Joseph Grima)는 메이저 브랜드가 가져올 수 없는 콘셉트 아래 네덜란드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 오상민 같은 개인 디자이너부터 덴마크 같은 국가관까지 100개 팀이 넘는 전시를 유치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황폐하게 버려진 폐허가 동시대 가장 참신하고도 열정적인 디자인 신으로 채워지며 수많은 관람객들로 넘쳐나는 광경은 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던 에너지와 감흥을 안겼다. 이처럼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일반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던 밀라노의 일부를 엿 볼 기회이기도 하다.
알코바와 더불어 올해 가장 화제를 모은 장소는 덴마크의 가구 브랜드 구비(Gubi)의 ‘수영장’이었다. 구비는 공공 야외 수영장인 바니 미스테리오시 (Bagni Misteriosi)를 통째로 빌려 ‘보고 떠나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즐길 수 있는 일련의 공간을 마련해 풀사이드에 구비의 아웃도어 가구를 전시하고, 빌라 내부에서는 덴마크 디자인 듀오 감프라테시(GamFratesi)가 디자인한 베스트셀러 의자 ‘딱정벌레’의 10주년을 기념해 10명의 디자이너가 이를 재해석한 전시를 펼치면서 수많은 전시를 따라 잡기 바쁜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았다.
매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전시라면 디모레(Dimore)를 빼놓을 수 없다. 노스캐롤라이나 태생의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 브릿 모런(Britt Moran)과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으로 카펠리니에서 예술감독을 맡았던 디자이너 에밀리아노 살치(Emiliano Salci)가 결성한 디모레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올해 디자인 위크에서 이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2개의 설치로 20주년을 기념했다. 비아 솔페리노 거리에 자리한 유명 아파트에선 <No Sense>, 그리고 지난해 밀라노 중앙역 근처에 새롭게 문을 연 디모레센트랄레에 선 <Silence> 전시를 선보인 것. 이 중 ‘Via Solferino 11’,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찾는 이들에겐 고유명사처럼 인식되는 이들의 아파트먼트 스타일 갤러리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부터 바깥 거리까지, 이들이 사운드 디자인까지 세심하게 연출한, 드라마틱하고 꿈결 같은 풍경을 직접 경험하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줄을 이어 긴 시간 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Silence>에서는 벽에 구멍을 뚫어 관람객이 마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트를 바라보는 감독이 된 듯한 느낌을 주는 연출로 큰 주목을 받았다. 관능적인 가구와 빈티지 오브제, 그리고 음악의 어우러짐을 통해 드라마틱한 고전주의로의 회귀를 표현했다.
거장들의 전시도 빛났다. ‘빛의 시인’이라고 불린 독일 조명 디자인 거장, 잉고 마우러(Ingo Maurer) 스튜디오는 지난 2019년 그가 타계한 후에도 위대한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디자인 위크에서는 밀라노 성벽의 일부였던 포르타 누오바에 야외 설치물을 선보였다. 바닥에는 30m 길이의 형광 카펫을 설치했으며, 5m 높이의 반짝이는 반사체 조각들이 움직이며 반짝이는 풍경은 수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탈리아의 가구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 카시나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조 폰티(Gio Ponti),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게리트 리트벨트 (Gerrit Rietveld) 등 모던 디자인을 이끈 위대한 건축가들의 가구 컬렉션 ‘iMaestri’의 50주년을 맞아 아카이브를 공개하기도 했다. 강렬하고도 극적인 전시 시노그래피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이들의 선구적 디자인을 풀어내고 실험하며 연구하고자 하는 열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패션 하우스의 철학을 잇는 홈 컬렉션 각축전
패션 하우스들은 자신들의 홈 컬렉션 전시를 위해 해를 거듭할수록 대규모로, 그리고 가장 근사한 방식으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점령하고 있다. 올해 또한 아르마니의 ‘A’부터 제냐의 ‘Z’까지 ‘그야말로 A to Z가 다 모였다’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패션 하우스의 전시가 두드러졌다.
1934년생으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인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철학과 스타일을 홈 컬렉션으로 확장한 아르마니 카사는 올해 전시를 위해 본사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17세기 궁전 저택 팔라초 오르시니(Palazzo Orsini)를 대중에 최초로 공개했다. 유려한 분수가 샘솟는 비밀스러운 정원에 새로운 아웃도어 가구 컬렉션이 설치되고, 18세기 팔라초 내부의 프레스코 룸에서는 아르마니 특유의 정제미와 화려함 사이에서 빛의 감각으로 디자인된 소품과 가구 컬렉션이 공개되었다. 한편 펜디 카사는 2018년 출시한 페퀸 스트라이프 패턴을 세련되고 경쾌하게 재해석한 모듈식 시스템 가구 컬렉션과 하우스의 무한한 영감의 원천인 도시 로마에 대한 찬사를 담은 홈 컬렉션 소품 등을 대거 선보였다.
루이 비통과 에르메스는 오래전부터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주축이 되어온 만큼 올해도 규모와 화제 면에서 최고의 전시를 선보였다. 루이 비통은 세르벨로니 궁전으로 화려하게 컴백해 기존 오브제 노마드 컬렉션과 더불어 미러볼 장식으로 마무리한 캄파냐 형제의 스페셜 에디션 두 점, 호주 출신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마크 뉴슨(Marc Newson)이 루이 비통 트렁크를 재해석해 우아함을 더한 ‘호기심의 트렁크(Cabinet of Curiosities)’ 등을 공개했다. 언제나 전시 구성에 대한 기대감을 고취시켜온 에르메스는 올해 불 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건축적 시노그래피를 공개했다. 격자와 선의 상호 작용을 통해 뛰어난 재료를 바탕으로 장인의 손길에서 태어나는 디자인의 본질에 집중하고자 한 의도다.
홈 컬렉션이 아니더라도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패션 하우스의 철학과 가치를 보여준 전시도 많았다. 공예의 가치를 되새겨온 로에베는 올해 전시의 주인공으로 ‘의자’를 선택했다. 포일에서 시어링에 이르기까지 예상치 못한 기발한 재료와 색상으로 다시 탄생한 의자들은 팔라초 이심바르디 안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각각의 의자는 세계 곳곳의 공예가가 손으로 직접 작업했으며, 가운데의 버섯 모양 오브제는 조나단 앤더슨이 디자인한 것으로 곧 있을 남성 컬렉션에도 응용될 예정이라고.
또한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와 함께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에 위치한 부티크를 마치 원시 동굴처럼 변모시킨 보테가 베네타의 전시는 입장하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만큼 큰 인기와 화제를 모았다. 컬렉션 패션쇼 세트를 작업한 것으로 시작된 이들의 협업은 입체적으로 암각화된 패브릭 동굴 안에 구석기 시대의 메아리가 울리는 듯한 그라피티로 장식한 이번 전시에서 절정을 맞은 듯 보인다. 동굴의 끝에는? 당연히 보테가의 가방이 숨겨진 보물처럼 자리했다.
- 에디터
- 전여울
- 글
- 강보라
- 사진
- COURTESY OF INGO MAURER STUDIO, CASSINA, BOTTEGA VENETA, LOUIS VUITTON, FENDI, ALCOVA, DIMORE, GU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