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디바, 엄정화 & 보아

전여울

엄정화와 보아는 늘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은 영광스레 쌓인 지나간 페이지들을 품은 채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응시한다

보아가 입은 셔츠 형태의 롱 튤 드레스, 검정 타이, 메탈 벨트, 레오퍼드 프린트 시실리 백, 엄정화가 입은 싱글브레스트 테크니컬 저지 털링턴 재킷, 검정 팬츠와 타이, 셔츠, 레오퍼드 프린트 시실리 백은 KIM Dolce & Gabbana 제품.

카메라 앞에 엄정화와 보아가 섰고, 스튜디오에 있던 좌중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고로 ‘디바’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지난해 티빙의 리얼리티 예능 <서울체크인>에서 두 사람이 한 화면에 나란히 선 적은 있지만 이처럼 화보로 함께하긴 처음이다. <더블유>와 두 사람의 만남이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1980~2000년대 아카이브에서 디바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펼친 돌체앤가바나의 2023 S/S 컬렉션 ‘KIM Dolce & Gabbana’에 어울리는 얼굴로 두 사람 이외의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1993년 정규 1집 <Sorrowful Secret>으로 데뷔한 그 순간부터 21세기형이었던 엄정화, 어떤 의미에서 K팝을 둘러싼 외양과 실재를 정립한 보아. 두 명의 디바와 함께한 자리에서 우리는 우선 그들의 디바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엄정화가 입은 젤라토 프린트 ‘Chio, Kim’ 티셔츠, 미니 시실리 백, 슈즈, 보아가 입은 파스타 프린트 C‘ hio, Kim’ 티셔츠, 슈즈, 미니 시실리 백은 KIM Dolce & Gabbana 제품.

“한국에서 솔로 여가수로 활동하며 나이를 먹다 보면 스스로 자문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이게 끝인가?’ 나는 여전히 노래하고 춤도 출 수 있지만 사람들이 입맛대로 정해놓은 ‘시기’란 게 있잖아요. 나는 이게 너무 좋으니까 더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을 때, 막연한 슬픔과 불안이 찾아와요. 제가 2008년 <D.I.S.C.O>를 발매하고 이듬해 마돈나가 <Celebration>을 발표했어요. 그 당시 그녀의 ‘Hung Up’ 첫 무대를 보는데 왜 그랬는지 엄청나게 눈물이 났어요. 지금도 그 감정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러움, 기쁨···. 당시 저는 마흔을 앞두고 ‘이게 끝인가?’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돈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던 거죠. 그녀가 보란 듯 무대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걸 보면서 크게 위로받은 기억이 있어요.”

엄정화가 마돈나에게 빚지고 있다면, 보아의 세계에선 마이클 잭슨이 디바인 그녀 자신을 있게 한 존재다. “항상 들었어요. 마이클 잭슨 때문에 자넷 잭슨을 들었고, 잭슨파이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거든요. 일본엔 음악 관련 DVD가 많았는데, 한국에선 구하지 못할 마이클 잭슨의 다큐멘터리를 구해 본 기억이 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이클 잭슨에 대한 인상은 여전해요. 그는 ‘멋지다’, ‘좋다’로 표현하기보다 ‘그저 장르다’라고 바라보는 것이 맞다는 것. 지금 우리가 추는 춤에 그의 무브에서 영향받지 않은 동작이 단 하나라도 존재할까요? 그야말로 한 세기에 한 번 출현할 피조물인 셈이죠.”

엄정화가 입은 싱글브레스트 테크니컬 저지 털링턴 재킷, 검정 팬츠와 타이, 셔츠, 시실리 백은 모두 KIM Dolce & Gabbana 제품.

보아가 입은 셔츠 디테일 롱 튤 드레스, 검정 오간자 톱, 디스트로이드 진, 십자가 목걸이와 시실리 백은 KIM X Dolce & Gabbana 제품.

29곡, 총 100분. <더블유>와의 화보 촬영을 진행한 시점에 보아는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 ‘THE BoA: Musicality’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팬데믹으로 3년이나 미뤄진 콘서트에서 보아는 총 29곡을 소화하고 100분 동안 무대를 누볐다. “이번에 29곡이나 불렀는데도 이런 말이 나오는 거 있죠. ‘왜 이 노래는 안 해줘!’(웃음)” 긴 터널을 통과해 맞이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주년을 기념하는 순간이었지만, 보아는 한 달 넘게 떨어지지 않은 감기로 최악의 컨디션 난조를 경험하고 있었다. 물론 보아의 그런 상태를 눈치챈 관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는 항상 말하거든요. 당장 내일 은퇴해도 아무 미련 없다고. 그 정도로 저의 10대, 20대, 30대는 무대의 순간들로 빼곡해요. 그런데 이번처럼 최악의 몸 상태로 공연하긴 처음인 것 같아요. 저음에선 목소리가 떨려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또 고음은 가능하고. 감기가 낫지 않은 채로 콘서트 날짜가 다가올 때의 긴장과 압박감이란···.” 보아가 말의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엄정화는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 스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이런 걸 보면서 느끼는 거예요. 콘서트장에 있던 그 누가 보아의 상태를 짐작했겠어요. 안 봐도 알아요. 무대는 완벽했을 거예요. 뭐랄까, 보아는 그냥 이렇게 태어난 사람 같아요. 사실 아주 아기 때부터 보아를 봤거든요. 너(보아) 기억해? 대기실에 고양이들 데리고 다니던 때. 그때나 지금이나 보아를 보면 경이로워요. 저렇게 작고 어린 친구가 무대만 서면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니까. 한 마디로 ‘본 투 비 보아’죠.” 엄정화의 말에 보아는 말했다. “언니는 ‘본 투 비 퀸’이잖아!(웃음)”

보아가 말한 ‘퀸’이란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퀸이라는 수식은 노력해 쟁취 가능한 것이 아닌 그저 ‘주어지는’ 것이란 생각이든다. 특히 엄정화를 보고 있을 때 그렇다. 1998년 ‘초대’ MV에서 천카이거 영화를 연상케 하는 몽환적 때깔 속 모든 것에 심드렁하지만 관능만은 잃지 않은 채로 부채를 흔들 때, 2006년 MKMF 시상식에서 온몸의 실루엣을 드러내는 보디슈트를 입고 드래그퀸들과 함께 ‘Come 2 Me’ 무대를 펼쳤을 때마다 그녀야말로 퀸이란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사실 스스로 만족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거 했으니까 됐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이건 일부러 되는 것 같진 않고, 그럴 수밖에 없이 내가 예민해서인 듯도 해요. 사실 사라지는 건 너무 쉽잖아요. 그런데 멈추지 않고 계속해 달려온 건, 인기를 떠나 비록 찰나뿐일지라도 무대에서 만족감을 맛보고 싶어서인 것 같거든요. 그런 순간에 나를 가져다놓고 싶은 열망인 거죠.”

사람들은 2017년 엄정화가 ‘Ending Credit’에서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둘 퇴장하고”라 부를 때 그녀가 가수로서 작별을 우회해 말하는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엄정화는 말한다. “가수를 비롯한 셀럽의 삶은 결국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지?’에 따라 수명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전 아직도 이 일을 너무나 사랑하거든요. 저, 앨범 준비하고 있어요. 재작년 말부터 작업하고 있는데 언제 나오게 될진 몰라요. 그런데 분명 세상에 또 하나의 앨범이 나올 예정이에요.” 어쩌면 엄정화의 지난날은 예고편에 불과 할 뿐, 그녀의 본편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라인스톤 장식 코르셋 톱, 오버올 라인스톤 장식 하이웨이스트 팬티, 검정 가운, 슈즈, 십자가 네크리스, 페이턴트 소재의 시실리 백은 KIM Dolce & Gabbana 제품

검정 오간자 톱, 디스트로이드 진, 십자가 목걸이와 시실리 백은 KIM Dolce & Gabbana 제품.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은 <더블유> 화보에 이어 5월 방영 예정인 tvN <댄스가수 유랑단>을 통해서도 전해질 예정이다. 둘을 비롯해 김완선, 이효리, 화사까지 국내 음악계에 여성 뮤지션으로서 저마다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은 전국을 유랑하며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고, 사람들의 일상 속 BGM이었던 그녀들의 노래를 부를 참이다.

“저희도 사실 프로그램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겠어요. 서로의 노래를 바꿔 불러보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 그때마다 보아의 노래가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에요(웃음). 보아는 보아라서, 제가 단지 흉내 내는 수준이 되는 건 아닐까 싶거든요.” 엄정화의 말을 듣던 보아가 말했다. “후후, 다들 제 노래를 피하더군요(웃음).”

어쩌면 돌체앤가바나가 2023 S/S 컬렉션을 통해 과거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이유는 곧 과거를 기리고 그 동력으로 내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엄정화는 그녀가 이번 화보 촬영에서 입은, 1991년 ‘Le Pin Up’ 컬렉션 당시 나오미 캠벨이 착용한 크리스털 자수 뷔스티에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메이크업을 지우고 헤어피스를 떼며 생각했거든요. ‘내가 언제까지 이런 화보를 찍을 수 있을까?’ 오늘 함께한 모든 시간은 저에게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와요. 만일 2010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모든 것을 멈췄다면, 오늘 같은 순간은 결코 없었겠죠. 사라지지 않고 그동안 잘 해왔다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도 느껴졌고요. 제 나이에도 아직까지 무대를 할 수 있고, 앞으로 무대를 할 거란 사실이 좋아요. 너무너무. 이렇게까지 내가 열정적일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해서, 아직도 전 무대에 서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엄정화에 이어 보아가 말했다.

“사실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이에요. 무언가를 해내고 나면 ‘잘했다’, ‘수고했다’ 생각할 겨를 없이 넥스트 스텝을 생각하니까요. 그에 따라 한시도 안주할 틈이 없지만, 그 동력은 무언가를 오래 지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죠.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유일하게 바라는 게 있어요. ‘내가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는 이 일이 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것.” 그런 보아에게 엄정화는 말한다. “그런데 보아야, 있잖아. 안 질려. 언니는 아직까지 안 질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패션 에디터
김신
포토그래퍼
박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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