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개인전 <Whoseum of Who?>를 통해 서울에 상륙한 만화 곰 캐릭터 ‘Who’.
때는 2021년, 팬데믹이 한창이었다. 세상은 다시 조립할 수 없는 퍼즐처럼 복잡하게 변해가는 한편, 만화처럼 자꾸만 납작해져만 가는 듯도 했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만화 같은 세상이기에, 예술가 사이먼 후지와라는 만화 곰 캐릭터 ‘Who’를 만들기로 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국적도, 인종도, 성별도 없는 만화 캐릭터 ‘Who’는 만화 같은 요지경을 횡단하며 끝없이 ‘후니버스’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마침내 개인전 <Whoseum of Who?>를 통해 서울에 상륙한 ‘Who’. 그리하여 ‘Who’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세상에 갑작스레 크랙이 생겨났다.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자 어제만 해도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 빵을 구웠다. 예술가 사이먼 후지와라(Simon Fujiwara)도 별수 없었다. 작업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후지와라는 팬데믹이 그에게 안겨준 것이 ‘콜라주된 삶’ 그 자체였다고 회상한다. 록다운은 불시에 개인의 삶을 조각 냈으니 그가 팬데믹이란 렌즈로 바라본 세상은 마치 어지러이 부유하는 파편들로 다가왔던 것이다. 지난 15년 가까이 미술계에서 활약했지만 후지와라의 존재를 한 차원 뜨겁게 만들어준 만화 캐릭터 연작 ‘Who the Bær’도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탄생했다. 연작 ‘Who the Bær’는 ‘Who’라는 이름의 2D 곰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묘할 정도로 긴 혀, 황금빛 심장, 새하얀 털을 가진 ‘Who’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인종도, 성별도, 국적도 없다. 정체성이 없는 것이 곧 ‘Who’의 정체성이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도리어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Who’는 2021년 밀라노 프라다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Who the Bær> 이후 로테르담의 쿤스트인스티튜드 멜리, 베를린의 에스더쉬퍼 등을 거치며 회화, 영상, 설치, 조각, 아동 도서 등 다양한 매체와 모습으로 소개됐다.
후지와라에 따르면 ‘Who the Bær’ 연작은 일종의 “점점 더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다다적 반응”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팬데믹은 인종, 젠더, 기후 등 우리를 둘러싼 기존 구조에 얽힌 다양한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증폭시켰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후지와라도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만의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자 세상은 어느덧 ‘한 편의 만화’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록다운 기간 동안 우리가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유일한 링크는 스마트폰의 스크린이었던 만큼, 소셜미디어 등이 유행하며 ‘이미지’ 전능의 시대가 열렸다. 이미지의 마법 혹은 저주는 진정한 의미를 지우고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납작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세계에서는 기후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그레타 툰베리조차 ‘양갈래 머리의 소녀’란 이미지로 기억될 뿐이다. 마치 만화로 그린 모습처럼 말이다. 후지와라는 이렇듯 세상은 점점 복잡하게 변해가지만, 동시에 단순함을 향해 퇴행하는 아이러니를 보며 만화 캐릭터 ‘Who’를 그려갔다. 이는 모순에 모순으로 대응하는 그만의 방법이자 “나 스스로가 만화 캐릭터로 변하지 않기 위해 직접 만화 캐릭터를 만든 것”이었던 셈이다.
2차원 이미지인 ‘Who’는 이미지의 세계를 자유로이 횡단한다. 더욱이 온갖 정체성이 콜라주된 캐릭터기에 끊임없이 다른 정체성을 수행하며 어디에든 누구로든 존재한다. 다만 ‘Who’는 가장 지배적이고 주류적이며 이분법적인 이미지에 끌린다. 그 자신이 만화 캐릭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상의 다른 만화적 이미지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그간 작품 속에서 ‘Who’는 할리우드 영화 <나 홀로 집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주인공이 되었고,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스페이스엑스의 CEO 일론 머스크 등으로 변신했다. 나아가 갤러리현대에서 5월 21일까지 개최하는 개인전 <Whoseum of Who?>에선 피카소부터 마티스, 바스키아, 데이미언 허스트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의 걸작으로 통하는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유쾌한 만화 캐릭터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Who’가 던지는 질문은 제법 묵직하다. ‘Who’는 정체성을 전혀 갖지 않음으로써 이미지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성’이란 무엇인지의 문제를 우회해 묻기 때문이다. 지극히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지극히 만화적인 대답인 작품인 ‘Who the Bær’, 이에 대해 후지와라는 말한다. “‘Who’는 진정성이 있다고 여기는 게 그저 진정성이 있어 보이려고 따르는 일련의 시각적, 행위적 코드일 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가면을 벗겨 깊은 진실을 드러내는 대신 가면 아래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는 가면 그 자체만 존재할 뿐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W Korea> 사실 오늘 좀 의외였습니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했는데 당신이 ‘최대한 진지해 보이지 않게 찍어달라’고 거듭 당부했죠. 그런데 당신의 과거 사진을 찾아보면….
Simon Fujiwara 그렇게 진지해 보일 수 없죠?(웃음)
하하, 네.
제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들이라 그래요. 누구나 어릴 땐 사람들이 나를 대하기 어려워했으면 하잖아요. 어리다는 이유로 모두가 나를 무시하니까요.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저도 어느덧 40대가 됐어요. 이제는 모두가 저를 너무 어려워하고요. 그 사실이 좀 씁쓸한 것 같아요.
일주일 전 입국했다 들었어요. 이번 한국 여행을 추억할 기념품은 좀 챙겼나요?
직접 산 건 거의 없지만 대신 선물을 많이 받았어요. 꽤 쓸 만한 보습 크림도 받았고요. 우연찮게도 컬렉터 중 의사가 많았어요. 어떤 분은 자기 병원에서 미용 시술을 받고 가라고도 권했고요. 그 제안은 3~4년 뒤 세월이 좀 더 흘렀을 때 다시 생각해볼 참입니다(웃음).
마침내 ‘Who’가 서울에 상륙했습니다. 이전까진 밀라노, 로테르담, 베를린, 도쿄를 유랑했죠. 지금 ‘Who’는 어떤 기분일까요?
마치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지 않을까요? 지금 지내는 숙소가 광화문 근처예요.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풍경이 유독 눈에 띄더라고요. 도시 전체가 놀이터이자 테마파크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며칠 전엔 광화문 광장에서 부산 엑스포 유치 기원 행사도 열리더라고요. 그 덕에 수많은 캐릭터가 거리를 물들였고요. 그런데 ‘Who’도 만화 캐릭터잖아요. ‘Who’에게 서울만큼 완벽한 도시는 없을 거예요.
‘Who the Bær’는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에 탄생했죠? 언젠가 당신은 팬데믹을 통과하며 ‘콜라주된 삶’을 경험했다 말한 적 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다수의 ‘Who the Bær’ 작품 역시 콜라주로 완성됐습니다.
어제까진 분명 거리를 자유롭게 거닐었는데 바로 다음 날 집에 갇혀 더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됐잖아요. 갑자기 삶에 파열이 생겨난 거죠. 심지어 우리의 얼굴조차 콜라주였고요. 마스크에 절반쯤 가려진 채로 지내야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팬데믹과 비슷하게 세상에 큰 어려움이 닥친 시기, 즉 두 차례의 세계대전 당시에 작업한 작가들을 살펴보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한나 호크와 마사 로슬러를 접했는데, 그들이 트라우마적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콜라주 기법을 활용했음을 알게 됐죠. 트라우마는 자신의 삶에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 것이자 몸과 마음이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사건이잖아요. 콜라주는 그런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상당히 좋은 방법으로 보였어요. 콜라주에선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같은 이미지 안에 존재하지만, 그들이 결합될 필요 없이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코로나19야말로 콜라주된 삶의 경험 그 자체였기에 콜라주 기법을 택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죠.
기법적으로 콜라주를 택했다면 재료적으로 ‘목탄’을 사용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작품을 구상했을 당시 주요하게 몰두한 생각이 있었어요. ‘지구가 묵시록적인 멸망의 시기에 접어들면 어떤 예술가가 남게 될까? 그래서 박물관과 미술관이 없어진다면 어떤 예술을 해야 할까?’ 연쇄적으로 상상하다 보니, 결국 아포칼립스 세상에는 불에 타버린 나무만이 거리에 나뒹굴 거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불탄 나무, 그러니까 목탄을 주워 예술을 만들 수 있겠죠. 어찌 보면 목탄 역시 굉장히 트라우마적인 재료라 할 수 있어요.
종종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문장이나 구절로부터 새로운 작업을 구상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Who the Bær’의 출발점이 된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만화로서의 세상’. 지난 10년을 돌이키면 어느덧 세상이 ‘하이퍼 자본주의’, ‘하이퍼 마케팅’, ‘하이퍼 브랜
딩’의 시대로 접어든 것만 같아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이 아이콘, 브랜드, 로고, 이미지, 실루엣으로만 존재하게 된 듯하죠. 단편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광고 문구처럼 말하는 사람을 쉽게 발견하게 되잖아요. 정치인들도 스트롱맨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마치 만화 캐릭터처럼 변하고 있고요. 패션 하우스도 예외는 없죠. 구찌, 프라다, 루이 비통 할 것 없이 모두가 점점 로고를 크게 키워 상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도 아는 거예요. 세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파악하기 불가능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아이콘과 같은 단순함을 추구한다는 것을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납작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요. 너무나 만화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이곳에 만화 캐릭터인 ‘Who’가 들어와 산다 한들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계가 되었죠. 어쩐지 이런 상황이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왜 하필 ‘Who’는 곰 캐릭터여야 했는지 갸우뚱해집니다. 세상엔 ‘곰돌이 푸’나 ‘패딩턴 베어’처럼 이미 수많은 곰 캐릭터가 존재하잖아요.
‘Who’가 굉장히 아이코닉하길 바랐어요. ‘Who’는 정체성이 없는 존재기 때문에 ‘오리지널’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죠. 당신 말처럼 세상에 이미 너무나 많은 곰 캐릭터가 존재하는데,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Who’는 곰이어야만 한 것도 있어요. 마치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활용하듯 ‘Who’도 곰돌이 캐릭터들의 IP를 이용하는 거죠. 일종의 전략이에요. 사람들이 ‘Who’를 봤을 때 즉각적으로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Who’는 엄청나게 긴 혀를 가졌습니다. 이는 벌집에서 꿀을 뽑아 먹기 위해 가늘고 긴 혀를 가진 말레이시아의 멸종 위기종 ‘태양곰’을 참조했다죠. 이 외에도 ‘Who’라는 캐릭터를 디자인하기 위해 참조한 것이 있나요? 개인적으론 파란색과 노란색의 조화를 보며 만화 <도라에몽>이 떠오르기도 했거든요.
오, <도라에몽>은 어린 시절 제가 가장 좋아한 만화였어요. 그런데 ‘Who’를 <도라에몽>과 연결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는 듯해요. 대신 고전적인 곰 캐릭터들과 오랜 시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온 디즈니의 모든 캐릭터를 리서치하긴 했어요. 그런데 ‘Who’를 구상할 땐 디자인이 없는 디자인을 바란 것 같아요.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법적인 애로사항이 컸죠. 예로부터 프랜차이즈 곰 캐릭터들은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여왔기 때문에 각 기업에서 본인들의 캐릭터를 보호하려고 백방으로 애쓰고 있었거든요. 약간의 유사성이 있어도 대기업에서 충분히 절 고소할 수 있기 때문에 변호사를 고용해 ‘Who’를 작업해야만 했습니다(웃음). 법률, 경제, 예술 분야를 총집합해 ‘Who’를 만들었기에 ‘Who’는 아주 21세기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지 않나요?(웃음) 사실 ‘Who’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모든 과정에는 항상 법적 조율의 과제가 놓여 있어요. 세상은 생각처럼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죠. 어쩌면 ‘Who’는 이 세계의 법률적 제약을 드러내는 캐릭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온갖 정체성이 콜라주된 ‘Who’는 어디에든 누구로든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정체성 정치’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Who’를 보며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는데요. 당신 역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Who’를 작업하며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 ‘Who’를 작업했을 땐 엄청난 희열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새로운 예술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이후 약 1년 동안 거의 실의에 빠져 지낸 것 같아요. ‘Who’는 엄청난 에너지를 주기도 하지만, 세상을 황폐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측면도 있거든요. ‘Who’라는 존재가 바라보는 세계는 결국 기호밖에 없는, ‘진짜’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죠. 바로 이런 지점으로 인해 여러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를 괴롭혔던 것 같아요. 정말 ‘Who’가 바라보는 것처럼 이 세상에 이미지만 남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진짜 세계는 무엇인가?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출발한 자전적 설치 및 영상 ‘The Museum of Incest’, 안네 프랑크의 집을 실제 크기로 재현한 ‘Hope House’,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자 상반신 노출 사진의 유출로 타블로이드 신문의 희생자가 된 조앤 샐리를 다룬 ‘Joanne’까지 과거엔 주로 실존 인물을 참조해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Who’는 완전히 허구의 존재인 만큼 이번 ‘Who the Bær’를 작업할 때 어떤 차별점이 있었을 듯해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안네 프랑크도, 조앤 샐리도 마치 하나의 만화 캐릭터로 전락해버린 인물로 여겨져요. 우선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 범죄의 희생자이기 전에 아름다운 천재 소녀였죠. 그런데 공포 정치 하의 희망을 상징하는 마스코트가 되면서 그녀와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은신했던 집이 관광 상품으로 둔갑해버렸잖아요. 이제는 매해 수만 명의 방문객이 그 은신의 장소를 열어젖히려고 합니다. 조앤도 마찬가지예요. 세계에 의해 파괴된 자신의 존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사회는 그녀를 한낱 스캔들 주인공으로 치부할 뿐이죠. 둘 모두 만화처럼 단순화되었다는 측면에서 ‘Who’와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어요. 결국엔 과거 작업이나 지금 작업이나 모두 세계가 ‘이미지’를 통해 우리를 압박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5년 가까이 당신은 작품을 통해 ‘정체성’을 말했습니다. 일본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배경, 성적 지향까지 당신의 삶을 작업에 적극 반영해왔죠. 또 ‘Who the Bær’ 역시 정체성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이고요. 이렇듯 정체성이 당신의 주요 화두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의 부모 아래 태어났고, 게이이며, 미술가지만 건축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축복이자 저주인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땐 백인만 사는 영국인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곳에서 저는 유일하게 일본계였고, 게이였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어요. 그러면서 ‘나만 이방인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게 됐죠. ‘저들은 어떻게 행동하지?’, ‘이성애자 남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4인 구성의 정상 가족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 모든 게 그런 식의 관찰이었는데, 어찌 보면 인류학자 같은 활동을 한 거죠.
유년기 인류학자 아닌 인류학자로서 관찰한 것을 작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자연스러운 결과였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세계가 점차 변화하면서 가족, 인종, 국적, 성적 지향 등 우리가 어떤 틀에 가둬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실은 전부 ‘구축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잖아요. ‘Who’에서 정체성은 일종의 ‘디자인’으로 존재하는데, 실제 세계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면 어떤 존재다, 라고 우리는 쉽게 여기잖아요. 게다가 온라인이 발달하면서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뭔가인 ‘척하는 존재’로서 존재하게 됐고요. 그런 점에서 ‘Who’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비추는 일종의 거울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 <Whoseum of Who?>에서 ‘Who’는 피카소, 마티스, 바스키아 등의 서양 근현대 미술사에서 걸작으로 통하는 작품 속으로 뛰어듭니다. 어떤 기준에서 재해석할 작품을 선정하게 됐나요?
개인적으로 미술사에서 18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시기가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와요. 바로 이 시기에 오늘날 브랜딩, 마케팅 시대가 끊임없이 참조하는 미의 기준이 발생했으니까요. 마티스나 피카소는 그 당시 이미지의 전형을 깨고 새로운 20세기적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잖아요. 그런 노력이 오늘날 ‘Who’가 살아가는 이미지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고요. 그런 점에서 두 사람 역시 너무나 유명해졌기 때문에 만화 캐릭터 같은 존재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죠. 만약 만화 <심슨 가족>의 주인공들이 어느 에피소드에서 미술관에 간다고 상상 해보세요. 아마도 분명 마티스나 피카소의 작품이 등장하겠죠. 이번 전시에선 이렇듯 이미 아이콘이 되어 유명하다는 사실 외에 작품에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고 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한 지를 실험하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이번 전시장엔 바스키아의 작품을 패스티시(Pastiche·혼성 모방)한 작품이 여럿 있습니다. 이들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바스키아는 살아생전 마치 미술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흑인 작가인 양 취급받았고 본인이 역설적으로 그 지위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Who’라는 캐릭터가 바스키아와 같은 전략을 취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작품들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거죠.
영화 <마블> 시리즈는 여러 세계관의 캐릭터를 한데 불러오며 신드롬적 인기를 얻었잖아요. 언젠가 ‘Who’의 세계인 ‘후니버스’에도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마도요?(웃음)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보는 중입니다. 아직 뚜렷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요. 새로운 캐릭터는 아니지만 ‘Who the Bær’ 연작을 개념적으로 확장해서 ‘후티크’라는 팝업스토어를 이번에 오픈해요. 전시장 바로 옆에 공간을 마련했어요. 티셔츠, 모자, 가방, 머그잔 같은 아트 상품을 판매할 계획이죠. 그러니 지금 당장 가서 구매해보세요. 오늘만 특가로 모십니다. 무려 0%의 할인율로!(웃음)
하하.
소위 ‘굿즈’라 부르는 아트 상품에 의구심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모네의 그림이 박힌 머그잔에 열광하곤 하잖아요. 저희 할머니의 과자통에도 모네가 찍혀 있을 정도니까요(웃음). 사람들은 대체 왜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운 예술품을 작게 만들어 대량 생산하는 걸까, 의문이 들어요. 그 과정에서 작품을 경험하는 즐거움이 축소되는 것만 같은데도요. 오늘날 모네의 작품은 가방이나 컵에 작게 축소된 채 박제됐지만, 실은 모네는 우리 시대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엄청나게 복잡한 작가였어요. ‘수련’을 통해 물이란, 자연이란, 반사란, 현실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거든요. 그리고 작가 자신이 느낀 시선을 관람자들이 구체적으로 겪을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저는 모네를 인류 최초의 ‘VR 작가’라고 생각해요.
굿즈를 의심하지만 굿즈 스토어인 ‘후티크’를 차린 것은 그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후티크’를 통해 판매하는 제품은 실은 작품 자체만큼이나 중요해요. ‘Who’가 단순히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지닐 수도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서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그리고 ‘후티크’가 일종의 아카이브로 남겨지길 원했어요. 만약 ‘후티크’를 20~30년 동안 지속한다면 수백 가지 오브제가 세상에 나올 테고 미래의 관객들은 그걸 보면서 ‘2023년의 인류는 이런 짓을 했구나’ 인지할 거고요.
개인적으로 이번에 전시장을 나오며 한 가지 질문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성을 추구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당신이라면 왠지 여기에 답변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저도 당신과 함께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분명히 ‘Who’는 멜랑콜리함을 자아내는 부분이 있는 듯해요. ‘믿을 게 없어지는 이 와중에 대체 뭘 믿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우리를 놓이게 하니까요. 그런데 실은 우리 모두에겐 무언가 믿을 게 필요하죠. 그러니 진정성, 정체성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인 만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를 가지고 좀 더 즐기고 놀아보는 것이 우리가 할 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예술이 예술 밖의 세상에 무엇을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우리는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러나 예술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예술은 곧 ‘상자’를 만드는 일이고, 바로 그 상자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무한한 자유를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자유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것 이죠.
최근 당신을 놀라게 했던 뉴스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작가로서 스스로 직접 발견하거나 알게 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무던하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편입니다. 뉴스에서 코로나19 백신이 사실은 음모라고 말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반응하죠. 뉴스를 보고 슬퍼하고 흥미를 갖기도 하지만 실은 뉴스엔 조작된 내용이 너무나 많잖아요. 그리고 뉴스가 전하는 모든 소식에 반응하고 느낀다면 어느 순간 사이코패스로 변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고요(웃음). 저는 뉴스보다도 철학에서, 또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작가로서 무엇을 회의하나요?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회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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