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의 빅나티가 떠나 보내는 것과 시작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해봤다.
어린 소년이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 빅나티는 첫사랑을 떠올리며 웃고 굶주렸다. 대책 없이 낭만적이었던 뮤지션은 이제 새 앨범에 소중한 것을 담아 떠나보내려 한다. 청춘의 눈앞에 한 챕터의 마무리와 함께 또 다른 출발점이 놓여 있다.
<W Korea> 빅나티의 새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술을 못 마시는데, 이상하게 술이 당겨요.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의 노랫말을 한 번 읊어봐줄래요?
빅나티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어린 날의 추억일 뿐 / 추억이라 믿었던 것들은 오래 썩는 기억일 뿐 / 기억이라 믿었던 것들은 지금 너와 나의 기쁨 / 깊은 곳에서 숨 쉬는 불행들의 연료일 뿐’. 긍정적인 한 줄과 부정적인 한 줄이 교차하는 식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이거예요. ‘시작이라 믿었던 것들은 끝의 예쁜 이름일 뿐 / 이름이라 믿었던 것들은 너의 작은 조각일 뿐 / 조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너의 전부 / 그 전부를 건넨 너를 사랑이라 믿었을 뿐’.
스물한 살 시인이네요. 시작과 끝, 조각과 전부…. 단어와 의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아빠의 성을 따르잖아요. 미국에서는 아예 여자가 남자의 성을 따르고요. 그게 결국엔 서로의 이름을 내어주는 일 같아요. 이름이라는 건 세상의 수많은 것 중 작은 조각일 수 있지만, 그 조각이 없으면 한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단어도 없어지죠. 조각이자 나의 전부를 내어줄 만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새살이라 믿었던 것들은 의미 없는 가죽일 뿐, 그 살가죽을 뚫고 온 너를 사랑이라 믿었을 뿐’이라는 대목도 있죠. 이런 노래는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 거예요?
살면서 사랑을 하고 아픔을 겪고, 또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도 있잖아요. 그걸 겪는 시기가 사람마다 다르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거 같아요. 저는 제 뮤즈 덕분에 그 경험을 해봤거든요. 첫사랑요. 실패한 첫사랑.
실패라고 결론 내렸어요?
아, 아니요. 하지만 어쨌든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쓴 노래가 많아요. 혼자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해봤겠어요? 문득 그게 제 음악 주제를 너무 한정 짓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 스텝으로 가야 하는데, 막히는 느낌. 또 그 친구한테 미안한 감정도 생겼고요. 아마 이번 앨범이 제 뮤즈를 떠올리면서 만든 마지막 앨범이 될 거예요. 내 10대 시절과 첫사랑을 음악으로 아름답게 보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뭔가를 포기하고 놓아주려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상상의 끝에서 이제 그치기로 한 거죠.
작년 여름에는 <낭만>이라는 앨범을 냈죠. 그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 ‘마침표,’였어요.
네. 제목은 마침표인데, 그 말 뒤에 쉼표를 찍어놨죠.
쉼표가 찍혔다는 건 끝을 보진 않았다는 의미인 셈이군요(웃음). 2월 28일에 낸 앨범 제목은 <호프리스 로맨틱(Hopeless Romantic)>이에요.
희망 없는 로맨틱. 영미권에서는 지나치게 낭만주의자인 사람을 두고 그 어절을 하나의 명사처럼 쓰더라고요. 그 표현을 접하고서 제 지난 앨범의 이야기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자꾸 들었어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달까? 다시 〈낭만>을 들어보니 음악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없는데, 당시 제 생각과 태도가 좀 후회스럽기도 했어요. 그 앨범에서는 제가 스토리라인을 짜놨거든요.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배신당하고, 화가 나다가 공허해지는 과정. 서사를 생각하면서 픽션을 추가하다 보니 작위성이 생겨버린 거죠. 그런 행위 자체가 낭만 없는 행동이었다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어요.
창작자에게 유독 소중한 대상이나 기억이 작업 아이템으로 자리 잡으면, 자꾸 자기 검열이 작동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 대상이 멀리서 잘 살고 있을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라면 더더욱 .
그 친구를 처음 만났던 초등학교에 졸업 이후에도 가끔 가보거든요.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운동장이 여전히 커 보였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감흥이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이런 거구나. 감정도 자꾸 끌어다 쓰면 언젠가는 무덤덤해질 수 있겠구나’ 했어요. 내가 창작하는 사람이면 내 감정을 창작물로 만들어내는 것까지 해야 경험이 더 가치 있게 남는 거 같기도 하고, 동시에 감정이 무뎌지는 게 두렵기도 하고, 복잡했죠. 자칫하면 그 친구한테 못할 짓을 하는 것뿐 아니라 내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니까.
팬들은 다 알고 있을 그 뮤즈 말이에요. 초등학생 때 만나 좋아하게 됐는데 이민 가버린 친구. 그 친구에 대한 마음은 갈증 비슷한 거예요?
저도 정체를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리움이기도 하고, 너무 만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좋아하는 걸 수도 있고요.
떨어져 살아도 뭔가가 이루어질 수는 있잖아요. 본격적인 액션을 취해봤나요?
친구 사이로 지내면서 연락은 종종 하고 있었어요. 자칫하면 친구 사이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꼭 사귀어야 하는 일일까 싶기도 하고, 뭐. 여튼 친구 관계도 소중해요.
첫사랑을 음악적으로 떠나보내는 과정은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좀 달랐겠어요.
앨범을 만들면서 운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일단 술 마신 후에 작업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던 제가 취한 상태에서 뭘 많이 했어요.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뭔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서사니 유기성이니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감정의 찌꺼기를 모아서 마지막으로 쏟아붓자는 마음이었죠. 그랬더니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유기적인 앨범이 완성됐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엄마가 중학생 아들에게 빈지노 앨범을 들려 주면서 빅나티의 음악이 시작됐죠. 엄마에게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을 처음 들려드렸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우리 엄마가 웬만하면 제 음악을 잘 인정해주지 않거든요(웃음). 엄마에게 인정받는 타율이 아주 낮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만든 노래 중에 제일 좋대요. ‘내가 이런 사람을 낳았다니’ 같은 말도 하셨고.
와. 그거 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최고 수준의 찬사 아닌가요 ?
네. 그래서 좋았어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 눈치 잘 안 보고 살죠? 그런데 엄마에겐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거 같다고 느꼈어요.
저도 눈치 안 보는 편이지만 우리 엄마는 더 안 봐요. 엄마는 안 보는 게 아니라 눈치 자체가 별로 없는 거 같아요(웃음). 엄마한테는 인정을 받고 싶다기보다, 제가 작업을 집에서 하기 때문에 노래를 만들면 들려줄 사람이 당장 엄마밖에 없어서 그래요.
빅나티에게 제1의 청자가 엄마인 셈이군요. 에디터한테 제1의 독자는 편집장이거든요. 첫 번째 문지기의 반응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작업자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죠. 무조건 좋은 소리만 듣는 게 좋은 일도 아니지만.
맞아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기준이 또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그런 엄마의 기준치를 통과한다면 ‘평타는 쳤다’ 느낌이 들죠.
몇 년 전 대원외고 2학년생일 때 <더블유>와 하이어뮤직 단체 화보 찍은 거 기억나요? 제가 그때 일단 대학에 들어간 후에 본격적으로 음악 하는 건 어떠냐고 꼰대 같은 소리를 했잖아요(웃음).
기억해요. 에디터님이 저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인터뷰 후에 ‘내 상태가 좀 심각해 보이나?’ 싶었거든요. 그때 제가 사춘기였어요(웃음). <쇼미더머니> 이후 개인 앨범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레이블 컴필레이션 앨범에 휩쓸리듯이 참여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뭔가 투정을 부리고 괜히 더 우울한 척하고 싶었나 봐요.
당시 고민된다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음악을 하는 것 자체에는 200%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말도 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음악을 하는 게 행복하다는 건 여전해요. 물론 그 이후 제가 충족하고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기준점이 점점 더 높
아졌죠. 저는 계획형 인간은 절대 아니지만 삶 전반적으로 굵직한 구상을 하는 건 좋아하거든요. ‘몇 살쯤 앨범 한 장 내고, 그러다가 몇 살쯤엔 차트인을 해보고, 어떤 무대에 서보고 싶다’ 이런 상상을 해봤죠. 그런데 제 예상보다 그 모든 시점이 너무 빨리 왔어요. 저에 대한 기대치를 스스로 높이는 게 건강한 원동력이 되는 한편, 그 기대치에 못 미치는 시점이 오면 내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이 그런 학생들만 모아놓은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았을 때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상황과 비슷한 건가요?
저는 제가 한 노력보다 더 보상받은 적은 있어도 그보다 작은 보상을 받은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첫 실패를
고1 때 겪었어요. 한 만큼 보상받지 못했다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껴봤어요. 내 노력이 배신당했다고 느끼거나 어떤 벽에 부딪치면 그걸 극복하는 능력은 아직 제게 없는 듯해요.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좋아하나요?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싫어하는 거죠. 그 둘은 좀 달라요. 캔디 크러쉬를 온종일 매달려서 했는데, 어떤 단계에 이르러서도 못 깨면 저는 그 게임을 폰에서 지워 버려요.
작년에 힙합플레이야 인터뷰에서 ‘내 정체성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나는, 내 음악은 힙합과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죠. 래퍼 슈퍼비가 같은 플랫폼 인터뷰에서 ‘랩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래퍼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나는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삶과 생활로 랩을 하고 있는 거였다’라고 말한 얼마 후 일이었어요. ‘힙합은 곧 삶’이라는 화두에 반응 할 필요를 느꼈나요?
제 경우를 두고 힙합이라고 부르는 건 힙합 팬들이 납득할 수 없을 것 같
았어요. 제 입으로 직접 얘기를 꺼내야 힙합 신을 저해하는 일을 안 만들 거라고 봤어요. 대중 가수로 산 지 이제 1년 정도예요. 10센치 형이 피처링한 ‘정이라고 하자’를 발표하고 나서부터 저를 그렇게 불러준 분들이 많았고, 예능과 연말 음악 시상식에도 나가게 됐죠. 신기하고 재밌어요. 제 활동에 있어서 ‘힙합’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도 덜 느끼게 됐고요. 그런데 이게 연애와 비슷한 거 같아요. 헤어진 직후에는 그 결정이 정답 같기도 하고 후련할 수 있어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생각나는 거죠. 보고 싶고, 나도 모르게 그 대상을 찾게 되고.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내 음악은 힙합과 거리가 있다고 한 발언에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그 인터뷰에서는 그때의 제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뱉었어요. ‘내가 하는 건 힙합이 아니다’, 또 ‘장르에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라는 스탠스는 여전합니다. 다만 그런 발언을 하고 나니까 오히려 저에게 힙합에 뜨거운 니즈가 있다는 걸 더욱 확실히 확인하게 됐어요. 그때와 달라지거나 덧붙이고 싶은 거 하나만 말하자면, 제가 힙합이라는 장르와 신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다는 점이에요. 가요를 내놓고 있으면서 동시에 힙합 루키들과 음악을 계속 찾는 저를 봤죠. 힙합 팬으로서의 그 니즈를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까 모색하는 중이에요.
스물한 살 뮤지션이 처한 상황치고는 꽤 무거운 모색 같네요?
최근 가요 시상식 때 제가 다른 신인 아티스트와 같이 무대를 했거든요. 그걸 보고 낯선 아티스트가 누군지 관심 갖는 관객이 생겼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통해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대중 가수로서 내가 가진 작은 영향력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제가 추진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인가 봐요. 가까이서 지켜본 (박)재범 형의 영향도 받았을 거예요.
첫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으로 음악을 했듯, 어느 날 엄마가 빈지노의 음악을 들려주지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도 자주 해봤겠죠.
그럼요. 엄마와도 그런 대화를 해봤고, 저 혼자서도 많이 상상했어요. 내가 아주 나이 들어서, 음악 하게 된 걸 후회한다면? 몰래 택시를 타고 일산 <쇼미더머니> 녹화장으로 가던 길에 그 택시 기사님이 나를 설득해서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언젠가 낼 앨범에는 음악을 만나지 못한 서동현이 사는 평행 세계가 있다는 가정으로, 그 세계에 사는 나에게 하는 이야기를 담아보면 어떨까 해요.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상 누구나 해 볼 수 있잖아요.
이번 앨범 타이틀곡인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을 좀 나이가 들어 다시 들어봤을 때, ‘스물 한 살에 왜 그렇게 오글거리는 음악을 썼을까’ 후회할 수도 있을까요?
오글거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음악 자체에 대해선 후회할 일이 없을 거예요. 저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거든요. 미숙한 음악일지언정 ‘그때의 나는 이랬구나’ 하고 회상하는 매개체가 되어주겠죠. 한 시절의 저를 기록한 거니까요.
- 포토그래퍼
- 강혜원
- 스타일리스트
- 강수민
- 헤어, 메이크업
- 한주희
- 어시스턴트
- 김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