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치오 카텔란, 코미디언 될 생각이 없는 코미디언

권은경

현대미술계의 가장 논쟁적인 작가, 사기꾼, 광대, 풍자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언제나 그 전형적인 수식어 이상의 파격과 흥미로움을 선보였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We>를 위해 한국에 온 그를 만났다. 위대한 코미디언이 그렇듯 카텔란은 희극과 비극, 농담과 냉소를 한 몸에 체득한 인간처럼 보였다.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리움미술관 전시장이었다. 총 세 개 층에 걸친 공간에서 효율적인 동선으로 작가를 촬영하기 위해, 그리고 사진가와 머릿속에 그린 모습을 그에게 빠른 속도로 제안하기 위해, 촬영팀은 몇 시간 전부터 시뮬레이션을 거쳤다. “<더블유>가 원하는 느낌이 뭐예요? 이런 거 맞아요?” 처음 몇 컷을 찍은 후 그가 모니터 화면을 보며 물었다. 인물을 담는 화보 촬영장에서는 종종 예기치 못한 순간에 스파크가 튀면서부터 모든 게 즉흥적으로 굴러간다. 카메라 앞에서 다소 어색해하고 긴장하던 그는, 그가 한 번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했을때 우리가 호응하자 그때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코미디언처럼 활발히 움직였다.

그에게 다시 전성기를 가져다준 작품 ‘코미디언’에서 바나나를 벽에 붙일 때 썼던 그런 회색 덕테이프로, 우리는 그의 몸을 칭칭 싸매 카메라 앞에 세울 작정이었다. 과거 카텔란을 담당한 갤러리스트가 덕테이프로 벽에 포박당한 채 걸려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작품 앞에서 말이다. 1999년에 발표한 그 ‘무제’ 작품은 반 농담으로 카텔란의 ‘갤러리스트 학대 3부작’ 중 하나로 불린다.

마시모 드 카를로라는 아트 딜러는 갤러리의 하얀 벽에 다른 무엇도 아닌 그를 매달아 전시하겠다는 카텔란의 발상을 받아들였다. 사업을 위해서는 작가의 뜻을 따라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와 작품을 좌지우지하는 갤러리스트가 주도권을 잃은 채 다소 기괴한 방식으로 전시된 모습. 벽에 매달린 남자는 지친 나머지 전시 오프닝이 끝나기도 전에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날의 퍼포먼스는 사진 기록으로 남아 지금껏 이렇게 미술관을 유랑한다. 갤러리스트가 고행을 겪는 것으로 전시를 시작한 그 퍼포먼스에 맨 처음 붙은 제목은 ‘완벽한 하루’.

“이걸 머리에 둘러볼까요?” 덕테이프를 예술적으로 두르고 싶었는지 카텔란은 거울이 있는 저 구석으로 사라져서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재킷이 톰 브라운이거든요. 이걸 뒤집어 입어볼까요? 안쪽 디자인이 복잡하고 재밌어요. 아, 그런데 너무 마르지엘라 의상처럼 보이나?” 군살 없이 가늘고 긴 1960년생 남자는 잰걸음으로 움직이며 그렇게 30분 동안 자기 할 일을 다 했다.

잡지를 만드는 사람답게 사진 모니터링도 하고(“이 표정 좋네요!”), 알아서 재빨리 재킷을 갈아입고 오기도 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서 난데없이 에디터를 끌어들여 같이 취할 포즈를 구상하다가, 내가 얼버무리자 잘 좀 해보라는 듯이 ‘티키타카!’라고 호통도 치고. 준비해간 회색 바나나를 건넬 즈음에는 잠깐이나마 카텔란의 얼굴에서 ‘모델로서 이 사람들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표정이 스치는 듯했다. 덕테이프를 휘두르며 시위대의 승리자처럼 유쾌하게 촬영하는 카텔란의 뒤로, 탈진해가는 어느 갤러리스트가 보였다.

<W Korea> 바나나 좋아하세요? 바나나가 말을 한다면, 걔는 뭐라고 자기 소개를 할까요?

사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도 않고 전혀 먹지도 않아요. 바나나는 냉장 보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됐고요. 걔는 내가 모르는 어떤 언어로 말하지 싶은데.

2011년 구겐하임에서의 회고전과 은퇴 이후 약 10년은 당신에게 어떤 시간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가장 궁금한 건 컴백작인 2016년의 ‘아메리카(America)’나 2019년의 ‘코미디언(Comedian)’이 성공했을 때에 관한 점이에요. ‘아싸! 또 통했다’ 하는 기분이었나요?

별거와 이혼은 다르잖아요. 별거는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하는 기간이고, 후자는 영영 끝이 나는 거예요. 내가 미술과 헤어졌던 건 별거예요.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처음에는 다시 돌아올 일이 없을 줄 알았지. 그런데 결국엔, 이혼은 아니더라구. 꽤 오랫동안 잡지 <토일렛페이퍼> 작업에만 매진했어요. 그저 그런 여러 아이디어를 폐기하면서. 아마도 예술에 거리를 두고 산 덕분에 이후 ‘아메리카’와 ‘코미디언’을 구상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해요. 그 결과들에 만족합니다. ‘아메리카’나 ‘코미디언’이 성공을 거둔 건 작업 그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사이에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겠죠. 이제는 ‘삼위일체’를 완성할 준비가 거의 끝났달까.

어떤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실현되기까지, 의미 있는 작업을 위해 중요한 것들은 뭘까요?

떠오르는대로 말하면 이래요. 충실함, 규율,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거창한 말은 피하기, 희망을 줄 것, 겁내지 않을 것, 기대치는 낮게 유지하기. 무엇보다, 최정상에 오르는 걸 목표로 삼지 말기. 미술은 속도 겨루기가 아니라 마라톤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코미디언은 누구입니까?

코미디언이 되려고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언.

리움미술관에서 1월 31일부터 7월 16일까지 열리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전시, <We>는 오픈하자마자 흥행 중이다. 조금은 놀랍다. 한국에서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작가인가? 카텔란은 2011년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치른 후 은퇴를 선언하고 잠시 미술계를 떠나 있었던 자다. 회고전 때는 그가 작업한 거의 모든 작품을 모아 미술관의 거대한 원형 홀에 매다는 설치를 했다. 회고전 제목은 <Maurizio Cattelan: All>. 작품들을 매단 것은 자살 혹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선언 같았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카텔란은 자그마한 피노키오 인형이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연출한 ‘아빠, 아빠(Daddy, Daddy)’를 선보였다. 거짓말쟁이 피노키오는 그의 ‘미니 미’이며 페르소나다. 깜찍한 피노키오가 수면 아래 코를 박은 채 엎어져 있는 모습으로, 그는 자신이 한계에 닥쳤다는 걸 암시했다. 재밌게도 카텔란이 데뷔 초인 1989년에 한 전시 제목은 영어로 하면 ‘Be Back Soon’. 갤러리가 잠시 문을 닫은 것처럼, ‘곧 돌아옴’이라고 쓰인 알림 표지를 걸어둔 게 작품 전시였다. 2016년에 나온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도 <Be Right Back>이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스타 작가가 된 그는 가끔 인터뷰에서 ‘침입자 콤플렉스’에 시달린다는 고백을 한다. 언제 미술계에서 내쫓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는 누가 쫓아내기 전에 먼저 퇴장할 준비가 돼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은퇴한 작가는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다. 2016년, 카텔란은 번쩍거리는 황금 변기와 함께 문자 그대로 화려하게 귀환했다. 뒤샹의 ‘샘’에 반향하는 작업인 작품명 ‘아메리카’는 18K 골드로 만든 조각이다. 실제 구겐하임 미술관 화장실에 설치되었다. 굉장히 사치스러운 제품을 일반 대중이 향유하도록 공개하고, 누구든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황금 변기를 구경하거나 정말 거기서 변을 보려는 사람들이 매일 긴 줄을 섰다. 모두를 위해 기회가 존재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일깨우는 장면처럼.

지금, 카텔란의 국내 첫 개인전을 보려는 관객이 평일 낮에도 줄을 짓는 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바나나’의 힘이 클 것이다. 2019년 말, 아트바젤 마이애미의 갤러리 페로탕 부스에 설치된 ‘코미디언’은 흰 벽에 회색 덕테이프로 고정한 바나나 한 개다. 그것을 어느 행위 예술가가 배가 고프다고 떼어 먹은 것, 그저 신선한 새 바나나로 교체된 것, 이 희한한 소식에 매일 인파가 몰려들자 갤러리에서 결국 작품을 내려버린 것, 작품이 12만 달러에 팔린 것 등 굉장한 바이럴과 논란 속에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존재감은 대중적으로도 생생해졌다.

현대미술계의 문제적 작가라는 수식어에는 잠시 먼지가 쌓였다가 그즈음을 계기로 조금의 먼지마저 탈탈 털어냈다. ‘그런 게 현대미술인가? 바나나가 1억원 넘게 팔리다니, 예술이란 대체 뭔가?’ 밈으로 무섭게 확산된 바나나 열풍의 한 축이 논란으로 일렁일 때, 나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매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살면서 현대미술을 그런 식으로 입에 올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건 데미언 허스트도, 제프 쿤스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카텔란은 늘 그렇게 ‘상황’을 만든다. 누군가 배고프다며 바나나를 떼는 단 몇 초의 순간적인 행위가 영상과 사진에 고스란히 담긴 걸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하다. 그 일이 벌어진 직후, 마이애미의 환경미화원들이 1억원대 바나나를 패러디하며 불평등 문제에 대해 시위했다는 기사가 작게 났다. 시위는, 사회 문제는 카텔란의 관심사 중 하나다. 사회와 정치, 삶과 죽음, 권위, 불안, 사랑, 나와 가족… 카텔란의 시선이 향하는 주제들은 늘 풍자와 익살의 해석을 거쳐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비주얼로, 혹은 퍼포먼스로 전시장 안팎에 나타났다. 바나나에서부터 시위에 이르는 그 모든 ‘쇼’가 그랬듯이, 그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반응한다. 카텔란이 때로는 신화화되는 미술 작품의 가치와 그 가치를 만들어내는 존재에 질문을 던지듯이 갤러리스트를 벽에 붙여둔 건 1999년이다. 아트바젤 마이애미에 나타나 ‘작품’이라고 말하는 바나나는 그 덕테이프 작업 20주년을 기념하는 듯했다.

1.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 등장한 ‘코미디언’은 그의 15년 만의 아트페어 출품작이다. 바나나를 벽에 그냥 붙여놓은 것 같지만, 정확하고 상세한 설치 매뉴얼이 있다고.

<W Korea> 당신은 지난 20년 동안 130명 이상의 아티스트를 인터뷰한 인터뷰어이기도 하죠. 모든 인터뷰를 각 잡지에 실린 레이아웃 그대로 보여주는 단행본 <Index>가 올해 나왔고요.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Maurizio Cattelan 내가 그들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것!

당신이 버질 아블로에게 한 질문을 그대로 해볼게요. ‘누군가 다른 출처로부터 차용한 이미지가 당신이 던지려는 메시지에 따라 완전히 변형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기 위해 어떤 이미지를 편집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심지어 미술계에서조차 그렇다. 채널에 맞춘 그런 식의 작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그게 중요한 문제이긴 한 걸까?’ ‘당신은 다른 출처에서 가져온 이미지나 소재를 활용하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나?’

버질은 뒤샹처럼 자유자재로 역할과 형태를 바꾸는 사람(Shifter)이었어요. 사물의 의미나 옷 입는 방식처럼, 주어진 의미나 용도에 변화를 가할 줄 알았죠. 대부분의 인간은 느끼고, 듣고, 봅니다. 자기 경험을 재구성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예요. 역사를 살펴보면, 모방은 지금 이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식이 퍼져 나가게 만드는 수단이었어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필경사들은 당시의 지식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고, 문화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책을 베껴 썼죠. 그보다 일찍이 로마인들은 그리스 조각상을 똑같이 본떴고. 오늘날 기념품 가게에서 수많은 명화 복제품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다시 말해, 모방은 인간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개념입니다. 모방이란 지식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2. ‘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1997)는 늘 뒷모습을 보인 채 설치된다. 다가가 보면, 소년의 양손은 못에 박힌 것처럼 연필로 책상에 고정된 상태다. 답답하고 적응하기 어려웠다던 작가의 유년기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카텔란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작업에 ‘찰리’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작품명에 유독 ‘무제(Untitled)’가 많은 이유는 뭔가요? 비슷한 작업을 조금씩 변형해 선보일 때마다 제목을 바꿔 붙이기도 하시죠. 리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비둘기 작업의 제목은 ‘유령(Ghosts)’인데, 다른 때는 비둘기들이 ‘관광객(Tourists)’, ‘어린이(Kids)’라는 제목으로 나타나는 식으로요. 공간이나 당신의 심상에 따라 새롭게 반영되나요?

‘무제’라는 제목을 보면 내가 나 스스로한테 욕을 하는 기분이 들어요. 끝내지 못한 숙제 같달까. 하지만 ‘무제’보다 더 나은 제목을 못 찾겠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내 작업의 대부분을 부숴버릴 수 있다면 새롭게 편집하고, 남는게 별로 없을 때까지 매일, 점점 더 가혹하게 몰아붙일 겁니다. 제목 없는 작품은 정말 싫지만 나쁜 제목은 더 싫어요. 그리고 전시에 따라 제목이 바뀌는 건 질문에서 짚은 대로예요. 전시 공간이 종종 제목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거든요.

당신의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10대 때 당신은 어떤 아이였나요? 주로 어떤 감정이 지배적이었죠?

솔직해질게요. 제 어린 시절이 평탄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유별난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보다 먼저 태어났거나 이후에 태어나 나와 마찬가지 상황으로 고통을 겪었을 많은 이들과 그 경험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그 시절 알게 된 것은 내겐 규칙 따위를 존중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집안의 규율을 따르지도 않았고, 나이가 들고 나선 체계와 규칙을 따르는 게 어려웠죠. 직업 체계, 종교 체계, 예술 체계, 시장 체계를 비롯해 인간이 살면서 따르게 되는 온갖 체계들 말이에요. 그런 체계들에 따르는 부담감을 없애버리려고 항상 애를 쓰죠.

당신이 느끼는 불안함과 혼란감, 공포에 대해 묘사해주시겠어요? 최대한 성실하게.

나는 말로는 표현을 다 못하는 편인데, 특히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 말할 때는 더 그렇습니다. 이미지를 더 잘 다루는 사람이니까,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포함해 어떤 작품이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감정에 가까운지 소개하는 거로 대신하죠.

불안: ‘Charlie Don’t Surf’. 어린 시절의 괴로움을 생각하면 공황장애 올 것 같음.
혼란: ‘We’. 정체성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니까.
두려움: ‘L.O.V.E.’.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남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 나만 남들을 보고 싶다.

3. 카텔란을 꼭 닮은 두 남자가 장례를 치르는 듯한 모습인 ‘우리2’(010). 한 쌍의 창백하고 서늘한 존재는 개인과 사회, 질서와 무질서를 오가는 예술가의 분열적인 자화상 같다.

‘현실이 내가 만든 예술보다 더 자극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어낸 가짜 노숙자 말고, 길을 걸으며 현실의 노숙자를 만나보셔야 한다. 나는 항상 일상적 현실의 조각들, 현실의 부스러기들을 차용해 작업한다. 내 작업이 도발적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건 현실이 극도로 도발적이며 우리가 평소 거기에 반응하지 않을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쩌면 더는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무감각해진 것이다.’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와의 인터뷰에서 카텔란이 한 말이다.

미디어를 통해 반복 송출되는 참사 현장이 떠오르는 ‘모두’(2007).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조각들은 기념비에 자주 쓰이는 카라라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다. 익명의 죽음에 대한 기념비이기도 하겠다.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 혹시 천벌을 받은 걸까? ‘아홉 번째 시간’(1999)은 특정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공고한 권력을 향한 카텔란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카텔란의 작업은 뒤샹의 변기, 앤디 워홀의 바나나, 로버트 인디애나의 팝아트 조각처럼 기존의 것을 교묘히 차용하는 식이 많은데, 그 레퍼런스 창고는 미술사뿐 아니라 익숙한 대중적 요소부터 현실 문제까지 아우른다.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보여주는 ‘아홉 번째 시간(La Nona Ora)’이나 공손히 무릎 꿇은 채 회개 중인 히틀러의 얼굴을 한 ‘그(Him)’는 큰 논란을 부른 작품이다. ‘내겐 규칙 따위를 존중할 능력이 없다’는 그의 고백처럼, 카텔란은 모든 종류의 권위와 체계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딱히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선동하기 위한 의도란 없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다만 그가 제시하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공고한 권력과 우상 숭배를 파괴하려는, 혹은 역사의 유령처럼 도처에 존재하는 21세기 버전 히틀러들을 상기시키려는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카텔란이 소위 ‘어그로’를 끌 만한 비주얼로 도발적인 작업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작가 생활 초기부터 드러났다. 1991년 작 ‘체세나 47 – 남부 수출업자 축구단 12’라는 작업에서, 그는 아프리카 출신의 불법 이주 노동자를 고용해 축구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선수가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을 제작해, 그 축구팀과 이탈리아계 백인으로 구성된 또 다른 팀이 테이블 축구 게임을 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흑인 이주 노동자와 이탈리아 백인이 한데 어울려 게임하는 모습. 카텔란은 그렇게 미술 프로젝트에서 베네통의 광고 이미지처럼 각인되는 풍경을 연출했다.

예술은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관객과 대화할때만 성공적이라고 여기는 그는 이제 디지털을 통한 바이럴이 일상화된 시대의 덕을 보고 있기도 하다. 2018년 구찌의 후원 아래 상해 유즈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 <The Artist Is Present>를 앞두고 그와 인터뷰했을 때, 카텔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옛날 사람이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냥 지켜본다. 하나의 명료한 개념으로 추려낼 수 있는 대상은 예술적으로 죽은 목숨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예술에는 단도직입적이고 유일무이한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도가 있다면 이미 해결된 문제이고,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만약 전시에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경우, 그건 단순한 광고일 것이다.’

4.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뜻하는 표현, ‘방 안의 코끼리’. 다인종으로 구성된 미국 내 사회적 갈등이 KKK가 떠오르는 복장과 코끼리만으로 표현된다. 작품명은 ‘사랑이 두렵지 않다’(2000).

<W Korea> 꽤 예전부터 당신은 아티스트와는 좀 다른 역할도 수행해왔습니다. 전시 큐레이터와 매거진 발행인이자 에디터로 작업하는 삶은 또 어떻게 다른가요? 특히 잡지 사업처럼 뭔가를
운영하려면 자본의 논리를 따라야 할 때가 있을 텐데요.

Maurizio Cattelan 이 역할과 저 역할에 차이를 둔 적은 없어요. 그 일들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니까요. 나는 항상 전시와 잡지 프로젝트를 하면서 개인 작업과 팀 작업을 번갈아 진행하려했고, 그것들이 서로 아주 다른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다 한 분야에서 일한 덕분에 성취감을 느끼는 특권을 얻었죠. 아티스트라는 타이틀만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기에 부족했어요. <토일렛페이퍼>로 하는 비즈니스는 자본주의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에요. 규모가 크지 않지만,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합니다. 잡지 일은 재미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쓰는 시간을 정당화할 수 없어요. 애초에 내 역할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Disturber) 거니까. 나는 항상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말을 내뱉곤 하죠.

2009년에 미국 <더블유> 매거진의 아트 이슈를 위해 화보와 필름 작업을 하신 적 있죠.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고, 그중 피켓을 든 모델도 있었던. 어떻게 하면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작업자로 끌어들일 수 있나요? 진지하게 궁금합니다.

당시 미국 <더블유> 매거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데니스 프리드먼이 연락했어요. 사진가 피에르파올로와 나더러 린다 에반젤리스타를 데리고 패션 화보를 찍어달라고 했죠. 몇 주 동안 화보 작업을 진행했어요. 데니스가 결과물에 아주 만족했고, 무엇보다 우리도 그랬어요. 다시 한 번 그런 작업을 했으면!

당신이 누군가의 매니저나 프로모터가 된다면 누구를 택하겠어요? 그를 위해 어떤 기획과 전략을 펼쳐보면 좋을까요? 당신을 두고 ‘천재 작가인가, 천재적인 셀프 프로모터인가?’라고 하는 어느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고 질문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내가 매니저나 프로모터가 되는 데 관심이 있는지를 잘 모르겠군요. 나는 위대한 건축가, 그러니까 유토피아를 품고 있는 사람과 친구를 맺고 싶어요. 하지만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 정말 끔찍할 것 같아요. 20세기 초 건축가들은 당시 생산된 자재들을 활용해서 특별한 건축물을 만들었고, 그러면서 그 자재들은 대량 생산품으로 변했죠. 그런 과정이 흥미로워요. 역사적인 인물이라면 매니저는 필요 없을 겁니다. 카리스마와 직관은 전략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카리스마와 직관은 작업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이나 다름없어요.

평소 폰으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앱은 뭐예요?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남기는 왓츠앱 음성 메시지.

젊은 예술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인생이란 당신이 직접 저질러야만 하는 실수를 모두 그러모은 것이다’.

5. 카텔란이 밀라노 시에 기증한 이 거대 조각품은 증권거래소 앞에 설치되었다. 높은 좌대 위에 선 고대 조각 스타일의 ‘L.O.V.E.’(2010)는 안티 파시즘의 뜻을 담고 있다. 손가락이 유실된 조각 유물들을 본뜬 것이지만, 가운뎃손가락만은 남은 채.

2018년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논의하면서 당신이 큐레이팅한 전시 <The Artist is Present>를 앞두고 당신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때도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해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게 바뀔 수 있다고 했죠. 여전히 우리가 왜 사람인지, 사람이면 사회에서 무슨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할 말이 많나요?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가장 중요한 책임은 늘 서로를 돌보고, 편견과 선입견을 다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인간뿐 아니라 우리가 거의 파괴하다시피 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와 존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리움미술관 입구와 전시장 입구에 ‘동훈’과 ‘준호’를 비치해둔 <We> 전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당신이 성공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또 뭘까요?

원칙은 없어요. 이건 결과나 최종 점수를 결코 알 수 없는 게임 같은 겁니다. 중요한 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어떤 결과를 내는지, 자신이 한 일이 주변 사람을 위해 변화를 일으켰는지 입니다.

‘작품을 파는 것’과 ‘뉴욕 포스트지 1면에 나오는 것’, 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면 당신은 매체 1면을 택하겠다는 사람이죠. 미디어 활용하길 좋아하면서 프레스 프리뷰 같은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뭐예요? 리움미술관 전시 오프닝 날에도 낮에는 어디 숨어 있다가 VIP 프리뷰가 있는 밤에는 등장했다면서요?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건 내가 아주 어려워하는 일 중 하나예요. 하지만 한계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카텔란의 뒤편에 보이는 ‘무제’(1999) 속 남자는 카텔란을 담당했던 갤러리스트다. 카텔란은 작가와 전시를 움직이는 존재인 ‘보이지 않는 손’을 이런 식으로 관객 앞에 노출시켰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에서는 카텔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두(All)’, ‘우리(‘We)’, ‘아홉 번째 시간(La Nona Ora)’, ‘코미디언(Comedian)’ 외 총 38점의 조각, 설치, 벽화 등을 만날 수 있다. 베이징에서 규모 있는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그의 미술 커리어를 한자리에 통틀어 매달았던 2011년 회고전 다음으로는 최대 규모의 전시다.

전시장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학교라는 사회에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외로운 소년의 뒷모습(‘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 분열적인 작가의 자화상처럼 카텔란을 닮은 두 창백한 남성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우리’), 북미권 미술계에서 작가가 이방인으로 느꼈을 배타적 감정을 KKK가 연상되는 복면과 코끼리 조각으로 표현한 모습(‘사랑이 두렵지 않다’) 등등. 도시 곳곳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노숙자들은 미술관 입구와 로비에 자리 잡았고(‘동훈’과 ‘준호’), 시체들을 묘사했을 대리석 조각들(‘모두’)은 참사의 기억을 건드리며 붉은 바닥에 누워 있다.

시각적 농담에 능한 카텔란의 작업 세계에는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시체닦이 아르바이트를 비롯해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던 그의 경험들이 근간으로 깔려 있다. 그는 이제 ‘코미디언’으로 회자되는 듯하지만, 모두 아는 것처럼 희극과 비극은 한 쌍이다. 어떻게든 생을 모색하며, 결국 ‘가진 자들의 시장’으로 통하는 미술계에서 여태까지 살아남은 자는 묻는다. 우리가 왜 우리인지,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HYEA W.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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