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iginals Ⅲ. 아이코닉한 국내외 7인

권은경

‘The Originals’의 마지막 시리즈로 그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다져온 인물 7명을 소개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고유함이 두드러지는 존재란 소중하다. 남과 다르게 특별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꺼이 감수했다는 뜻이다. 재능이 탁월한 것은 물론이고 매력적인 시그너처 스타일을 확보했으며, 새로운 길을 가는 태도의 소유자들. 결국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서는 사람들. 여기 각자의 분야에서, 혹은 분야를 넘나들며 그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다져온 국내외 인물 열 명이 있다. 아이콘이 될 자격을 갖춘 이들은 그 이름 자체로 이미 브랜드가 됐거나 될 예정이다.

Christina Ricci
크리스티나 리치 | 배우

흰색 상의는 에르메스, 귀고리는 생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제품.

크리스티나 리치가 세상에 자신을 알린 건 아홉 살에 출연한 1991년 영화 <아담스 패밀리>를 통해서다. 극 중 사랑스럽게 땋은 양 갈래 머리가 무색하게 시종 음울한 표정으로 독설을 내뱉던 ‘웬즈데이’는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 명함과도 같은 배역이다. 이후 영화 <몬스터>, <페넬로피>, 드라마 <옐로우재킷> 등에 출연하며 30여 년 경력의 배우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녀가 지난해 11월 다시금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 드라마 <웬즈데이>로 돌아왔다. 넷플릭스 최초로 5주 연속 TV 전체 순위 1위를 기록한 <웬즈데이>에서 크리스티나 리치는 기숙사 사감 ‘매릴린 손힐’을 연기한다. 1998년 주연 영화 <슬리피 할로우> 이후 팀 버튼과의 재회이자, 2‘0세기 웬즈데이’ 크리스티나 리치와 ‘21세기 웬즈데이’ 제나 오르테가의 랑데부가 펼쳐졌다.

재킷과 셔츠, 팬츠, 넥타이, 신발은 모두 루이 비통, 귀고리는 생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이어커프는 알렉산더 맥퀸 제품.

여덟 살이었던 1990년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영화 <아담스 패밀리>의 ‘웬즈데이 아담스’, <아이스 스톰>의 ‘웬디 후드’, 드라마 <옐로우재킷>의 ‘미스티 퀴글리’ 등 수십 년에 걸쳐 어두운 내면을 가진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어떤 지점에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섰나?

크리스티나 리치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색깔을 지닌 배역에 도전 정신이 생기는 편이다. 쉽게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가 전무한, 완전히 새롭고 도전적인 배역에 끌린다.

2021년 스릴러 장르의 드라마 <옐로우재킷>에 출연하면서 커리어에 색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제74회 에미상 7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호평받은 작품인데, 극 중 축구팀 매니저 ‘미스티’를 연기하며 가장 신나고 설렌부분은 무엇이었나?

미스티는 내면 깊숙이 은밀하게 공격 성향을 지닌 인물인데, 한 번쯤 이러한 성향을 ‘정당한 분노’의 형태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꼭 소화해보고 싶은 캐릭터여서 대본을 접하곤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나는 키가 155cm로 작기 때문에 태어나 단 한번도 낯선 이에게 적대적으로 굴어본 적이 없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분노해서는 위험하다는 것을. 내가 ‘미스티’를 연기하지 않았더라도, 그저 드라마 시청자였더라도 금세 ‘미스티’에 몰입했을 것 같다.

<아담스 패밀리>의 ‘웬즈데이’도 어두운 느낌이 꽤 강한 캐릭터였다. 이 배역을 연기했을 때는 어땠나?

촬영장에서 그 누구도 밝게 웃으라거나 조금 더 열정을 담아 연기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인물을 연기한 셈인데, 그게 무척 재미있는 경험으로 기억에 남았다. 덕분에 가족 앞에서 자신을 감추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는 ‘웬즈데이’의 모습을 사랑해준 팬이 그토록 많았던 것 같다.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에 ‘매릴린 손힐’ 역으로 출연했다.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이자 팀 버튼이 감독을 맡아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출연 소감이 궁금하다.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팀 버튼은 무척 아름답고, 장대하고, 놀라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감독이니까. 그리고 그는 기존의 <아담스 패밀리>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답습하려 하지않았다. <웬즈데이>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었고 여러 면에서 어떤 기시감,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았다.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조언해준다면?

많은 것을 바꾸려 하기보다 타인과 다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할 것.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다이애나 브릴랜드, 니콜 키드먼, 틸다 스윈턴. 이 세 사람의 절충과 같은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한다. 나만의 스타일을 정확하게 묘사하긴 어렵지만, 명확히 추구하는 방향은 있다. 바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사람들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정서적 방패로서 옷을 활용하는 편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차갑고 무뚝뚝한 느낌의 스타일을 선호한다.

국적, 시대를 떠나 누구든 저녁 파티에 초대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초대장을 보낼 것인가?

틸타 스윈턴, 제레미 O. 해리스, 데이비드 린치.

<옐로우재킷>은 1990년대 특유의 향수가 짙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때의 추억에 젖어들곤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20대 무렵을 더 많이 생각한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러 일을 더 잘해내고 싶다. 요즘 어린 친구들을 볼 때면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20대는 늘 무언가 아쉽고, 다양한 문제와 충돌을 마주하고, 잘해보려 애쓰는 시간인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지금은 지금대로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고.

<옐로우재킷> 출연진으로 초대하고 싶은 또 다른 90년대 아이콘이 있다면?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러시아 인형처럼>의 나타샤 리온이 합류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정말 대단할 것 같지 않나? 그녀가 <옐로우재킷>에서 ‘나탈리’ 역을 맡은 줄리엣 루이스와 함께한 투샷을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포토그래퍼 | Max Farago
글 | Brooke Marine
스타일리스트 | WILLIAM GRAPER
헤어 | MARK HAMPTON FOR LEONOR GREYL HAIR CARE(@JULIAN WATSON AGENCY)
메이크업 | ALLAN AVENDANO FOR LANCÔME(@A-FRAME AGENCY)
포토 어시스턴트 | ANNABEL SNOXALL, ROSS FRASER
패션 어시스턴트 | NAOMI DETRE
메이크업 어시스턴트 | RUBY VO

250
이오공 | 프로듀서

‘달려라 하니’와 컬래버레이션한 트랙슈트는 JW 앤더슨, 슈즈는 구찌 제품.

2022년 프로듀서 250은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첫 솔로 앨범 <뽕>은 국내외 리스너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고 ‘Hype Boy’, ‘Attention’ 등 그가 작곡한 뉴진스의 데뷔 앨범 <New Jeans> 수록곡들은 음원 차트 꼭대기에서 떠나는 법이 없었다. 일찍이 이센스의 ‘비행’, 김심야의 ‘Interior’ 등 힙합 트랙을 프로듀싱하며 장르 팬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250은 그런 모두의 기대를배반하려는 듯 ‘순도 100%의 뽕짝 음반’ <뽕>을 발매했고, 이를 들은 이들은 그가 제시한 ‘현대적 뽕’의 세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보다 진지한 음악 디거(Digger)이자 지금 가장 뜨겁게 호명되는 프로듀서인 250을 서울의 어느 오래된 콜라텍에서 만났다.

체크 패턴 터틀넥 톱과 재킷은 모두 타미 힐피거 X 리처드 퀸 제품.

지난해 3월 첫 정규앨범 <뽕>을 발매했다. 이후 바삐 활동했는데, 그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오공 비로소 ‘내가 진짜 250이었구나’를 느끼게 된 것 같다. 사실 활동 초창기 본명과 발음이 유사해서 대충 지은 예명이었다. 누군가에게 불릴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뽕>을 발매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어딜 가나 ‘250씨’라 불리게 되니까 ‘아, 내가 250이 됐구나’ 싶더라. 처음엔 ‘250씨’란 말만 들어서 흠칫 놀랐는데 이제는 어딜 가면 자신 있게말한다. “안녕하세요, 250입니다.”(웃음)

일찍이 힙합 프로듀서로 알려진 탓에 당신이 ‘뽕 음반’을 낸다는 사실에 팬들은 뒤통수 맞은 기분도 들었을 것 같다. 앨범 <뽕>의 시작은 무엇이었나?

처음 회사에서 ‘뽕짝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대번에 ‘알겠다’고 했다. 두 번 묻지 않았다. 무엇이 뽕인지, 왜 뽕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신 ‘뽕’이라는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여러 감상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뽕은 온갖 부정적인 것에 붙일 수 있는 단어다. 촌스러운 무언가를 볼 때 ‘뽕끼 있다’고 하고 마약을 ‘히로뽕’이라고 부르듯이. ‘좋은 의미가 일절 없는 말인데 왜 음악 용어일까, 이걸 찾자’가 <뽕> 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뽕을 ‘슬프면서도 흥겨운 음악’이라고 윤곽을 잡아간 것 같다.

앨범 발매에 앞서 유튜브 채널에 다큐멘터리 시리즈 <뽕을 찾아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다큐는 당신이 전국을 돌며 뽕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성인 콜라텍, 오일장, KBS <전국노래자랑> 예선장등을 전전했는데, 가장 큰 수확이 있던 곳은 어디였나?

우선 <전국노래자랑>을 보면 오프닝 시그널이 나오는 순간 방청객 중 그날의 신스틸러가 누구인지 드러나지않나. 대개 객석이 아닌 외진 곳에서 혼자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런 사람들이 좀 궁금했다. 어쨌든 그 사람들에겐 내재된 댄스 음악이란 게 있는 거니까. 합천 바캉스 대축제에서 목격한 풍경도 재미있었다. 애를 업은 아주머니가 계시고, 행사를 진행하려 비키니 입은 여자 댄서들이 춤을 추고 계시고, 흥을 띄우기 위해 누구는 물을 뿌리고 있고. 같은 자리에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사람들이 엉켜 있는 건 군대 이후로 거의 처음 본 것 같다. 놀라웠던 건 사람들이 아무 편견 없이 음악에 반응한다는 거였다. 신나는 음악이니까, 단지 신나게 춤을 추는 거다. 그때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촌스러운 음악과 트렌디한 음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구나, 뭐가 촌스럽고 뭐가 트렌디하고는 사실 누군가가 있다고 하니까 있는 거고 아무도 없다고 하면 그냥 사라지는 거구나 느낀 것 같다.

뽕은 한국에만 있는 음악 장르일까?

해외에도 뽕과 장르적으로 유사한 음악이 꽤 있다. 이탈리아 칸초네가 그렇다. 또 앨범을 작업하면서 프랑스 샹송도 많이 들었다. 샹송에도 특유의 구슬픈 감정이 담겨 있다. 대표적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만 해도 목소리를 엄청나게 떨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걸 들으면 어딘가 아픈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게 대번에 와닿는다. 1980년대 유행한 이탈로 디스코도 ‘쿵짝쿵짝’ 하는 악기의 베이스 패턴이 뽕과 거의 똑같다. 이탈로 디스코 하면 떠오르는 조르조 모로더의 음악을 들을 때 확실히 유사성이 체감된다.

그렇다면 뽕과 가장 극단에 있는 음악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찬송가? 일단 춤을 출 수가 없다(웃음). 그리고 찬송가는 내세에 대한 이야기다. 반면 뽕은 지극히 현세적인 노래다.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프로듀서에 대한 동경이 컸다. 특히 닥터 드레를 좋아했는데, 그가 1999년 발매한 2집 <2001>은 내가 학창 시절 들은 모든 음악 중 사운드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그래서 ‘<2001>의 드럼 사운드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운드고 그걸 갖고 싶다’는 마음이 계기였던 것 같다. 또 왠지 가수로서 무대에 서는 건 ‘내가 할 일’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내가 잘됐는데 오히려 아무도 나를 모를 때, 그런 순간을 더 즐기는 타입이다. 사람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안겨주는 셈이니까. 음악을 만드는 게 체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컴퓨터에 오디오 편집 프로그램 ‘사운드 포지’의 체험판을 깐 적이 있는데, 여러 툴을 사용해 오디오의 배치를 바꿔보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 짓은 누가 돈을 주지않아도 평생 할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유년기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면?

혼자 있는 시간이 유독 많았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고 중학생 시절엔 집과 학교가 멀어 통학하는 데 1시간이나 걸렸다. 그때 할 수 있는 게 음악을 듣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를 상상하는 습관을 들인 것 같다.영어를 잘 못했으니까 노래를 들으며 가사는 어떤 내용일까, 이걸 부르는 가수의 외모는 어떨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상상하곤 했는데 그런 것들이 지금 음악을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어떨 땐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옛날에 들었던 음악, 그때 기억, 경험에서 무언가를 빼오고 있구나.’ 늘 작업할 때면 ‘내가 뭘 좋아했더라?’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신이 고수하는 규칙은 무엇인가?

일단 내가 좋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 효율도 올라가고, 시작과 끝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일은 엉덩이를 진득이 붙이고 앉아 하는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려면 일단 내가 즐거워야 한다. 또 내가 언제 음악을 가장 잘 만드는가를 떠올려보면 ‘이건 아무도 안 들어도 상관없어’란 마음가짐으로 작업할 때다. 소위 ‘깡’이 있을 때 가장 창의적인 무언가가 나오는 것 같다. 내 음악의 첫 번째 리스너는 ‘나’이지 않나. 어찌 보면 그 누구보다 까다로운 관객이고, 가장 계란을 많이 던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선 ‘나’를 통과하는 과정이 필수다.

오리지낼리티를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프린스. 누구든 프린스의 노래가 나오면 ‘프린스 목소리네?’라고 알아챈다. 마이클 잭슨은 누군가가 그럴싸하게 따라 해 멋있게 모창할 수 있다. 그런데 프린스의 노래는 그 누구도 멋있게 모창할 수 없다. 우스꽝스러워진다. 프린스 빼고는.

스스로 오리지널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별로 ‘오리지널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보고 ‘오리지널하다’고 말하는 것의 전제는 ‘남들과 다르다’일 거다. 따지고 보면 기준이 철저히타인인 셈이다. 굳이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점수를 매길 필요가 있을까?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때, ‘나’란 어떤 인간인지를 알 때 오리지낼리티가 출발하는 것 같다. 결국 오리지낼리티는 시작도 완성도 ‘나’가 하는 거다.

지금 당신을 흥분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올해 3월 미국 텍사스에서 개최하는 음악 산업 축제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 무대에 설 예정이다. 나에 대한 백그라운드를 잘 모르는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건 또 다른 재미 같다. 작년 9월 독일 ‘리퍼반 페스티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장소가 아시아인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함부르크의 어느 마을이었다. 공연 당시 뽕짝을 틀었는데 페스티벌 관계자가 ‘이 동네 사람만들이 춤추는건 처음 본다’고 말할 정도로 분위기가 흥했다. 어떤 독일 할머니가 신이 나 춤을 추시는데 한국 할머니들의 모습과 똑같아서 ‘통하는 게 있구나’도 느꼈다. SXSW의 경우 더욱 개방적인 축제라 관객들이 뭐든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한창 무대 준비 중이다.

언젠가 공연하고 싶은 꿈의 무대가 있는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클럽을 빌려서 모두 다 같이 완전히 미쳐버리는 공연을 펼치는 것. 물론 그때도 뽕짝을 틀 거다.

포토그래퍼 | 장기평
피처 에디터 | 전여울
헤어 | 임안나
메이크업 | 최민석
어시스턴트 |김하은, 신지연

Pat Steir
팻 스테어 | 화가

의상 모두 본인 소장품.

1940년생인 현대 회화의 선구자 팻 스테어. 그녀가 자신을 대표하는 회화 연작 ‘폭포(Waterfall)의 실마리를 찾은 건 1980년대 떠난 세계 여행을 통해서다.낯선 이국의 장소에서 마주한 일본의 목판화, 중국의 산수화는 그녀에게 ‘과정이 곧 그림 자체가 되는 것’이라는 감각을 일깨웠고, 긴 여행을 마친 후 그녀는 작업실로 돌아와 물감을 캔버스에 붓고, 튀기고, 붓질해 ‘폭포’를 완성했다. 대형 화폭에 담아낸, 물감의 중력과 무게가 만들어낸 ‘폭포’는 때때로 풍경화가 아닌, 풍경 그 자체로 다가오며 보는 이를 깊은 명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1970년대 뉴욕 아트 신에 등장해 두각을 나타낸 몇 안 되는 여성 예술가, 획기적 페미니스트 잡지 <헤레시즈>의 창립자,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명상적 회화의 세계를 펼친 화가. 이 모든 것은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노장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기는 대형 캔버스 앞에 서는 팻 스테어를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1980년대 후반 물감을 캔버스에 붓고 흩뿌려 완성한 ‘폭포’는 당신의 대표적 회화 연작으로 꼽힌다. 이때를 기점으로 명상적 추상의 세계를 구현해왔는데, 이는 당신의 초기 작품과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나?

팻 스테어 개인적으로 작품의 시기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초기, 중기, 최근 작품의 도록을 한자리에 모아 나란히 봐도, 모든 그림은 그저 한 단계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느낀다. 특히 지난 30년간 만든 컨템퍼러리 작품은 ‘물감 스스로가 그려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품 속에서 ‘나’라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에 편안함이 느껴진다.

스스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림 그릴 때는 나를 배제한다. 정확히는 나의 의지를 걷어내는 것이다. 공간과 물감, 날씨에 모든 것을 맡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작품 크기라든지 어떤 색을 사용할지는 내가 정하니까. 하지만 말 그대로 ‘특정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언제나 지금껏 보지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그리고 싶다.

당신은 오래전부터 시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왔고 페미니스트 잡지 <헤레시즈(Heresies)>의 공동 창립자이자 에디터로도 활동했다. 지금도 일기를 꾸준히 쓰는가?

아니다. 예전엔 직접 본 것이나 생각한 것을 기록하곤 했는데, 휴대폰을 갖게 된 이후로는 지인들에게 문자로 보낸다. 덕분에 습관이 바뀌었다. 가끔 메모하긴 한다.

당신의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건가?

아니다. 예술 자체라기보다 색 혼합에 대해 메모한다. 하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은데, 학생 조교에게 메모를 부탁하기 때문이다. 그가 메모하는 방식이 내가 생각한 방식과 다르더라.

최근 아주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여러 점 선보였다. 2019년 워싱턴 D.C.에 위치한 ‘허시혼 미술관·조각정원’에서는 약 120m에 달하는 전시장 벽을 따라 총 30점의 대형 회화를 전시하는 개인전 <Pat Steir: ColorWheel>을 진행했고, 같은 해 필라델피아의 ‘반스 파운데이션’에서 2m 높이의 ‘폭포’ 연작을 공개했다. 최근엔 로마의 ‘가고시안’에서 갤러리를 집어삼킬 듯한 크기의 대규모 작품을 전시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나?

허시혼 미술관·조각정원의 프로젝트가 정말 흥미로웠다. 미술관이 원형 구조라 공간 자체가 독특한 데다 당시 ‘색’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전까진 주로 흑백을 이용한 작업을 펼쳤는데, 허시혼 미술관·조각정원에서는 원 위에 색의 스펙트럼을 나타낸 ‘색상환’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선보였다. 그 둥그런 공간에 색상환이란 주제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삼원색과 2차색(2가지 원색을 같은 비율로 섞으면 나오는 색) 3가지로 작업해 무척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당신에게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을 의미하나?

오리지낼리티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 즉 내 안의 본능과 생각, 열망을 따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고유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각자 고유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특별히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아이디어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2020년 영화감독 베로니카 곤잘레스 페냐가 3년에 걸쳐 완성한 다큐멘터리 <팻 스테어: 예술가(Pat Steir: Artist)>가 공개됐다. 촬영 과정은 어땠나?

베로니카와 그녀의 딸과는 이미 좋은 친구 사이였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동안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에 좋은 결과물이 탄생한 것 같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아기에게 이야기하듯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다큐멘터리에도 이런 태도로 임했다.

당신의 작품에 관해 받은 질문 중 참으로 독창적이지 못한 식상한 질문이 있다면?

‘작품이 왜 이렇게 크죠?’ 정말 수십 번은 들은 것 같다. 작품이 큰 이유는 창문 사이즈가 아니라 풍경에 맞춰 제작하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그림은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사 크기를 뛰어넘어 너비가 3.3m에 달하는 그림은 풍경 속으로 인도해주는 문 역할을 한다. 우리의 눈은 작품 전체를 감상하기 때문이다. 저 질문은 정말 매번 받고 있어서, 나 또한 늘 같은 대답을 한다. 그걸 보는 사람도 분명 짜증이 나지 않을까?

포토그래퍼 | Marisa Chafetz
글 | Kat Herriman ⠀
메이크업 | LINDA GRADIN FOR WESTMAN ATELIER(@L’ATELIER NYC)

Devon Ross & Earl Cave

데본 로스 & 얼 케이브 | 배우, 모델

얼과 데본이 입은 의상 모두 셀린느 제품. 얼이 쓴 선글라스는 본인 소장품.

데본 로스 & 얼 케이브 | 배우, 모델 광고 캠페인 촬영장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한 데본 로스와 얼 케이브는 모두 모델 출신 배우다. 이들에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셀러브리티 부모의 자녀라는 편견에 맞서 자신의 영역을 오롯이 구축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다는 점. 뮤지션 닉 케이브의 아들 얼 케이브는 숱한 오디션 현장을 전전한 끝에 2017년 드라마 <본 투 킬>로 데뷔했다. 기타리스트 크레이그 로스의 딸인 데본 로스는 구찌, 발렌티노의 런웨이에 서는가 하면 지난해 알리시아 비칸데르 주연 드라마 <이마 베프>를 통해 연기자로 변신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겁고 개성 강한 커플이 되었다.

데본의 경우 모델 업계 기준으로 본다면 170cm로 키
가 작은 편에 속하는데 구찌, 발렌티노와 같은 세계적패션 하우스의 런웨이에 서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데본 로스 모델 출신인 엄마 덕분에 어릴 적부터 엄마의 화보나 컴카드를 보며 자랐고 무척 멋지다고 생각했다. 14세 때였나, 처음으로 생로랑 패션쇼를 보러 갔는데 내가 이곳에서 워킹하지 못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내심 ‘두고 봐, 나도 해낼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모델 일을 시작하고 늘 키가 작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키가 작아도 활동 중인 모델은 많고 사람들이 말하는 ‘특별함’도 시간이 지나면 바래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몇 년 전부터는 구찌 쇼에 서고 있다. 장신의 모델들 사이에서 단신 모델로 함께 있는 건 쉽진 않지만, 좋은 동기와 힘을 얻었다.

2022년,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1996년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HBO 드라마 <이마 베프>에 출연하며 배우로 출발하게 된 소감은 어떤가? 극 중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상대역 ‘레지나’를 맡았다.

데본 로스 태어나서 한 번도 드라마 오디션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배역을 얻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사실 HBO 드라마라는 사실 외에 어떤 정보도 없이 오디션장에 갔다. 매니저 말로는 초현실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얼의 아버지인 닉 케이브는 전설적인 뮤지션이고, 어머니 수지 케이브는 패션 브랜드 ‘뱀파이어스 와이프’의 디자이너다. 하지만 당신은 부모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보다 배우라는 새 커리어를 선택했다.

얼 케이브 연기의 세계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막으로 둘러싸인 느낌이어서, 우선 학교에서 연극을 하며 부딪쳐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한 에이전시가 영화의 보조 출연자를 캐스팅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한 줄짜리 대사가 있는 역할을 얻었는데, 나중에 배역이 사라졌다. 내가 졸업한 직후 학교에서 영화 촬영이 진행되었다. 다시 돌아가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작은 배역의 오디션을 수도 없이 보러 다니다 2017년 드라마 <본 투 킬>에 출연하게 됐고, 그때부터 조금씩 커리어를 쌓았다. 같은 해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따위>에 출연했는데 사실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 그러다 그 이듬해 넷플릭스에 작품이 공개되면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 같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부모님이 뮤지션이라는 점이다. 얼의 아버지는 닉 케이브이고, 데본의 아버지 크레이그 로스 역시 래니 크라비츠와 오래 합을 맞춘 기타리스트다.

데본 로스 올해는 정말로 밴드를 시작해볼까 한다. 얼 케이브 평소 둘이서 신나게 즉흥 연주를 하곤 해서 무언가를 같이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연기를 하자고 얘기한 적은 없나?

얼 케이브 물론 있다. 같이 연기를 하는 것도 여러 꿈 중 하나다. 남매 역할을 맡아도 재밌을 것 같다.

10대 시절엔 어떤 스타일을 좋아했나?

데본 로스 교복 스타일의 옷을 자주 입곤 했다. 정작 내가 다닌 학교는 자유분방한 곳이라 교복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엄마와 같이 쇼핑 가서 화이트 칼라 셔츠나 미니 플래드 스커트, 오버 니삭스를 자주 산 기억이 있다. 지금도 교복 느낌이 나는 옷을 자주 입는데, 그 특유의 무드를 좋아한다. 다른 10대들처럼 그런지 룩도 좋아했다. 머리는 핑크색으로 물들이고, LA 멜로즈에 있는 편집숍에 가서 굽이 높은 클리퍼 신발이나 플래드 패턴 아이템, 10대가 살 법한 분방한 느낌의 물건을 쓸어모으곤 했다.

얼 케이브 좀 말하기 부끄럽지만, 슈퍼 스키니진을 좋아했고 심지어 이 바지들을 엉덩이까지 늘어뜨려 입는 스타일을 즐겼다. 선생님들이 “제발 바지 좀 올려 입으라” 하면 일단 제대로 입고 나중에 원상 복귀시켰다.

아버지 옷을 빌려 입기도 했나?

얼 케이브 아버지가 내 옷을 빌려 입었다. 옷장을 거의 공용으로 쓰다시피 했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데본 로스 롤링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내게 규칙을 깨도 괜찮다고 알려준 최초의 인물이다. 아니타 팔렌버그, 밥 딜런, 패티 스미스도 좋아한다. 그들의 1960년대~70년대 패션을 참고하는 편이다.

얼 케이브 이기 팝은 모든 면에서 영감을 주는 존재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어주는 사람이랄까. 절대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말이다. 지구에 존재할 최후의 사람이지 않을까?

포토그래퍼 | Hanna Moon
글 | Steph Eckardt
헤어 | LIAM RUSSELL FOR ORIBE
메이크업 | EMMA DAY FOR HOURGLASS COSMETICS(@THE WALL GROUP)

Grim Park

박그림 | 화가

연보라색 오버올과 안에 입은 톱은 라군 1992, 슈즈는 캠퍼 제품.

과거, 화가 박그림은 전통 불모(佛母)를 꿈꿨다. 불교미술 스승을 사사하며 묵묵히 불모의 길을 걸으리라 다짐한 그가 문득 소설의 한 장면처럼 마주한 것은 자신의 ‘내면’이었다. 작품의 기반은 불교미술이되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동시대란 시간성, 퀴어라는 정체성을 진솔하게 담아낸 박그림만의 현대 불화가펼쳐진 것도 이때가 기점이었다. 그래서 박그림의 그림은 익숙한 듯 낯설다. 동양화와 서양화, 주류와 비주류, 다수와 소수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그의 작품 세계에선 보란 듯이 허물어진다.대신 그 자리에서 ‘불균형의 균형’이란 새로운 감각이 피어오른다.

불교미술은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비주류 장르로 평가되곤 한다. 처음 불교미술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박그림 2006년 모 대학의 불교미술학과에 합격했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아쉽게 진학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는 끈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무렵 지금 작품 세계의 기반을 마련해준 불교미술 스승님을 만나게 됐다. 스승님은 여러모로 사회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그럼에도 제자인 내가 더 넓은 세상에 나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대학 입학을 준비하게 됐고 2012년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과에 진학했다. 그 당시만 해도 전통 불모(佛母)가 되겠다는 목표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기민정 작가의 수업을 들으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틀에 박힌 종교화가 아닌 나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 그 수업을 계기로 지금 펼치고 있는, 퀴어와 불교미술을 접목한 새로운 현대 불화를 펼칠 수 있게 됐다.

2018년 불일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화랑도(花郞徒)-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들>을 개최했다. 당시 SNS 속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게이 남성을 대상으로 비단을 사용하고 담채 기법을 활용한 ‘화랑도’ 연작 18점을 선 보였다. ‘화랑도’ 연작의 시작은 무엇이었나? 

처음 ‘화랑도’를 구상한 건 2015년 무렵이었다. 당시는 SNS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게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성장 과정 내내 ‘나’를 감추며 살아온 내게는 그게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기혐오를 가진 채 살아온 내가 반대로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퀴어 커뮤니티를 만난 게 어쩌면 ‘화랑도’의 시작이다. 작업 대상이 된 게이 모델은 실제 SNS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커뮤니티의 인기나 사회적 고정관념을 떠나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이들을 선정했고 18점을 완성했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작업에 옮기면서 오래 품었던 자기혐오에서 어느 정도 탈피할 수 있었다.

2023년 1월 8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룹전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에서는 ‘심호도’ 연작을 전시한다. 불교 선종화 ‘심우도’에서 착안한 ‘심호도’는 ‘화랑도’에서 확장한 연작으로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자아 정체성을 탐구한다. ‘심호도’ 연작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화랑도’ 연작을 진행하며 새로운 인연을 맺고, 동경하는 모델을 만나고, 관객을 만났다. 그런데 이 시간들을 겪으며 결국 모든 인간은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심호도’에서는 ‘화랑도’를 작업하는 동안 느낀 ‘평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동양과 서양, 퀴어와 헤테로 등 이분법적 고정관념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였달까?

당신의 그림에선 유독 ‘호랑이’가 자주 등장한다. 당신에게 ‘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사실 불교미술에서 주인공은 부처나 보살이다. 호랑이는 주로 주변을 맴도는 존재로 그려진다. 동시에 전통적 관점에서 호랑이는 영물로 추앙받으며 많은 사랑을 받는다. 주변인이기도, 주인공이기도 한 이런 양가적 부분이 나를 끌어당긴 것 같다. 쉽게 호랑이에 이입할 수 있었고 지금은 작품의 페르소나로 삼게 됐다. 호랑이가 등장하기 시작한 ‘심호도’ 연작부터 조금씩 작품에 작가인 ‘나’ 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게 나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작품 속 호랑이가 예상치 못하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불화라는 장르 안에서 어떻게 전통과 현대성의 균형을 꾀하는 편인가? 나의 작업은 오히려 ‘균형을 불규칙하게 만드는 것’에 가깝다. 작품의 기반은 불교미술이지만 동시대 인물이나 상황을 도상적으로 표현하고, 한국화 재료나 방식이 아닌 현대에 만들어진 것을 사용해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지우기도 한다. 또 불교미술이라는 장르에 퀴어, 서양의 종교나 신화, 동시대의 서사를 입힌다. 이런 걸 보면 오히려 ‘불균형의 균형’을 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의 작품 세계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너와 나는 같은 존재.’

오리지낼리티를 지녔다고 여기는 존재가 있다면?

한 명을 꼽기 어렵다. 불교에 ‘누구나 부처가 딜 수 있다’ 는 말이 있듯 우리 모두에겐 각자만의 고유한 오리지낼리티가 있다.

좌우명이 있나?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선 입으로 말하자.’ 어떤 소망이 생기면 꾸준히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편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지더라.

창의력의 돌파구가 된 순간이나 작업이 있나?

2020년 ‘벨 아미’ 작품이 생각난다. 그때 당시 표구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냥 작품에 과감하게 스크래치를 넣었다. 스크래치에 퀴어로 살아오며 받은 상처, 관계로부터의 절망 등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이때부터 작업에 과감함이 생긴 것 같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중성적이면서 고전적인 스타일이 좋다. 스페인 가수 겸 배우 마누 리오스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당신의 가장 큰 야망은 무엇인가? 

‘글로벌’한 작가가 되는 것.

포토그래퍼ㅣ레스
피처 에디터ㅣ전여울
헤어ㅣ임안나
메이크업ㅣ최민석
어시스턴트ㅣ신지연

Steve Lacy

스티브 레이시 | 뮤지션

민소매 톱, 바지, 선글라스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 제품.

미국의 얼터너티브 R&B 밴드 ‘디 인터넷’의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알린 스티브 레이시가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게 강렬히 각인시킨 사건은 2022년 솔로 2집 <Gemini Rights>를 발매하면서 일어났다. 타이틀곡 ‘Bad Habit’은 틱톡에서 입소문을 타며 플랫폼에서 이를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한 비디오가 40만 개 이상 탄생했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4주 연속 1위 자리를 사수하고 있던 해리 스타일스의 ‘As It Was’는 ‘Bad Habit’에 밀리며 정상 자리를 내줘야 했다. 스티브 레이시는 자신을 ‘슈퍼스타가 된 아이폰 보이’라 칭한다. 실제 19세 당시 그가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참여한 켄드릭 라마의 앨범 <Damn> 역시 아이폰 7로 작업했다. 1998년생으로 이제 20대 중반인 그는,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을 증명해냈다.

드레스는 모왈로라, 선글라스는 발렌시아가 제품. 신발은 본인 소장품.

드레스는 모왈로라, 선글라스는 발렌시아가 제품. 신발은 본인 소장품.

드레스는 모왈로라, 선글라스는 발렌시아가 제품. 신발은 본인 소장품.

드레스는 모왈로라, 선글라스는 발렌시아가 제품. 신발은 본인 소장품.

‘디 인터넷’의 리드 기타리스트이자 솔로 뮤지션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프로듀싱, 작곡 등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최근 켄드릭 라마, 솔라지, 클로이 앤 할리 등과 협업을 진행했다. 이렇듯 멋진 협업을 진행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스티브 레이시 상성과 유머, 재능이다. 함께 작업한 모든 사람과 프로젝트 이후에도 관계를 유지하고 비즈니스 관계로만 남지 않는다. 디 인터넷은 과연 무엇이 ‘협업’ 인지를 잘 보여주는 팀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안정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끼는데, 이는 어쩌면 각자가 고유한 방식, 리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협업이란 열린 마음을 유지한 채 시답잖은 농담마저 주고받는 일이라는 거다.

2022년 7월 발매한 솔로 2집 <Gemini Rights>는 ‘Static’이란 곡으로 시작한다. 어떤 곡인가?

이별의 시간을 통과할 때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노래다. ‘새 남자친구가 이 공허함을 채워주진 못해’라는 가사는 결코 지난 이별의 아픔을 새로운 만남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으로 썼다. 쓰디쓴 아픔을 고작 반창고 하나로 봉합할 수는 없지 않나. 나 또한 고통에서 도망치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런, 갑자기 몰입되기 시작했다. 앨범에서 거의 처음으로 쓴 곡이다. 실제 연인과 헤어지고 2~3주 뒤에 썼다.

<Gemini Rights>와 2019년 발매한 1집 <Apollo XXI>의 작곡 및 리코딩 과정을 비교한다면?

<Apollo XXI>는 내 삶에서 가장 바쁜 시기에 완성된 앨범이다. 디 인터넷의 투어 활동과 어머니 집에서의 독립, 연애가 한꺼번에 맞물렸으니까. 당시 대단히 충동적이었고, 모든 것이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앨범 만드는 데 두세 달 걸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1집엔 당시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고여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집이나 에어비앤비 숙소 대신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했는데, 스튜디오를 집처럼 여기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편히 쉬고, 긴장을 풀고,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였달까. 친구들도 함께 있어주었고, 정말 향이 기가 막힌 일본산 인센스도 도움이 됐다.

2020년 발표한 EP <The Lo-Fis>의 제작 과정도 궁금하다. ‘Infrunami’는 틱톡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수천 개의 영상 속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The Lo-Fis>는 오래전 만든 데모곡과 그즈음 완성한 곡을 모아 구성한 앨범이다. 개인적으로 데모곡을 무척 좋아한다. 데모곡은 뭐랄까, 대중과 교감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처럼 느껴진다. 미완의 곡이기 때문에 대중이 직접 작업 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프린스의 데모곡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걸 듣고 있으면 그 음악을 만들고 부른 ‘개인’이 온전히 느껴지는 것 같다. 스튜디오에 뮤지션과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달까. <The Lo-Fis> 발매 후 ‘Infrunami’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을 땐 얼떨떨할 뿐이었다. 16세 때쯤 쓴 곡이다. 큰 성공을 바라고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서 기쁘다.

이런 바이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너무 좋다. 많은 사람이 들어줬다는 거니까. 음악을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고 해석하는 것이 신기하고 멋지다. 그렇다고 앞으로 틱톡에서 잘나가는 곡을 만드는 데 정신 팔리고 싶진 않다. 조금 더 멋지고 매력적인 것들을 완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

노래가 온라인에서 유명해지는 것과 실생활에서 인기를 체감하는 것, 둘 사이엔 어떤 차이점이 있나?

라이브를 할 때 ‘리얼’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Infrunami’를 무대에서 부를 때 떼창이 나와 얼마나 기뻤는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정말 오래전에 만든 데모곡이니까. 그 곡을 쓸 땐 크게 소리 내 부르지도 못했다. 누가 듣는 게 싫어서 어머니 집에 있는 내 방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녹음했으니까. 예전에 녹음한 여러 곡을 보면 개미 목소리로 조용히 노래하는 나의 모습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어린 시절 가족과 주로 들은 음악은 무엇인가?

샤데이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여자 형제들은 존 메이어, 트레이시 채프먼을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채프먼의 ‘Fast Car’를 좋아했다. 정말 멋진 노래다.

포토그래퍼ㅣTexas Isaiah
글ㅣMaxine Wally
스타일리스트 | TORI LÓPEZ
그루밍 | ALEXA HERNANDEZ FOR TOM FORD BEAUTY(@THE WALL GROUP)
패션 어시스턴트 | JACQUELINE CHEN
장소 협조 | THE VILLAGE STUDIOS, L.A

The Originals Ⅰ. 모니카 & 립제이

The Originals Ⅱ. 김호영

피처 에디터
권은경 전여울
패션 에디터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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