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진 가을,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킬리안 향수.
여기,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를 떠올리게 하는 향이 있다. ‘이게 뭐지?’ 싶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심플’과는 거리가 먼, 사연이 많아 조금은 어렵다 싶은 향. ‘관능’, ‘중독’, ‘도발’, ‘미스터리’, ‘드라마’는 킬리안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단어들이다. 킬리안 향수는 고급스럽고, 퇴폐적이며, 매혹적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원상아 관장(엄지원), 영화 <기생충>의 사모님 연교(조여정),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에게서 풍길 법하다.
코냑을 만드는 ‘헤네시(Hennessy)’ 가문의 상속자로 태어난 킬리안 헤네시는 스스로를 가족 경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자립해 자기 힘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던 그가 찾은 것이 향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종종 방문한 코냑 저장고에서 맡은 오크통 냄새와 달달한 슈거 향, 톡 쏘는 알코올 향···. 신과 인간의 공통된 언어로 향의 의미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쓴 그는 이후 ‘엔젤스 셰어’를 떠올리며 향수의 세계에 입문한다. ‘엔젤스 셰어’는 코냑 숙성 과정에서 일부가 자연적으로 증발해 사라지는 현상을 두고 신에게 바쳐진다는 의미로 헤네시사에서 만든 표현이다. 공기 중에 휘발되는 향수 역시 ‘엔젤스 셰어’의 일부이니, 향을 신에게 바치는 셈이다.
킬리안은 오래 지속되는 향을 위해 원료의 품질에 공을 들이고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다. 또한 진정한 럭셔리는 영원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모든 향수의 리필을 보장한다. 덕분에 고급스러운 보틀은 평생 소장할 수 있다. 아르데코 정신을 담은 디자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 영감 받은 케이스 등 그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킬리안 보틀은 향을 맡는 즐거움에 이어 보는 즐거움까지 더한다.
올해 15주년을 맞이한 킬리안이 조향사 칼리스 베커와 10년 전에 출시한 아이코닉 향수를 다시 선보인다는 소식이다. 주인공은 ‘마이소르 샌달우드’를 오마주한 ‘세이크리드 우드’와 관능적이고 중독적인 ‘로즈 우드’로, 따스한 온기가 맴돌아 가을에 더없이 어울린다.
샌달우드의 정수, 세이크리드 우드
‘세이크리드 우드’는 샌달우드, 시더우드 등 다양한 우드에 럼, 코냑, 위스키와 같은 헤네시 가문의 유산을 조합한 ‘더 셀라(The Cellars) 컬렉션’의 걸작이다. 이름 그대로 신성한(Sacred) 향으로, 특유의 우아함과 부드러움으로 진귀하게 여겨진 인도의 ‘마이소르 샌달우드’를 모티프로 했다. “ 마이소르 샌달우드가 향료로 사용되었을 당시 이 향을 경험하고 향수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에센셜 오일을 목에 바르고 다닐 정도로 말이죠. 이 향은 매우 복잡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로 완벽한 향수입니다.” 마이소르 샌달우드는 킬리안 헤네시가 가장 아끼는 원료였지만 무차별적인 수확으로 2000년부터 수출이 금지됐다. 이후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재현한 향수가 바로 세이크리드 우드인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해 손목과 귀 뒤에 스프레이했다. 온종일 술에 취한 듯 향에 취해 있었고, 귀가 후에도 벗어나고 싶지 않아 베개와 이불 안쪽(반드시 안쪽이어야 한다!)에 묘약처럼 묻혔다.
열정과 매혹이 가득한 향, 로즈 우드
또 다른 주인공은 ‘로즈 우드’. 킬리안 특유의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플로럴 계열의 향수 컬렉션 ‘나르코틱스(The Narcotics)’의 하나로 이름 그대로 장미(Rose)와 우드(Oud)를 메인 향조로 한다. 로즈 우드에 사용된 장미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프랑스와 모로코산 장미에 불가리아산 로즈 오일을 블렌딩했으며, 사프란으로 우아함을, 리치로 달달함을 가미했기 때문이다. 나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수지를 굳힌 침향(우드, Oud)은 흙과 레더, 나무 내음을 풍기는 인도산 식물인 사이프리올 오일로 만들어냈다. 그렇게 완성된 로즈 우드는 다소 어둡고, 센슈얼하며, 살냄새로 삼고 싶을 만큼 중독적이다.
킬리안은 모든 사람의 취향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유혹적인 향은 한번 맡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우아한 미스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깊은 황홀경에 빠질 테니까. 그나저나 이런 설명이 다 무슨 소용일까? 피어오르는 향에 자꾸만 숨을 들이쉬고 싶어진다면 그거로 충분한 걸.
- 뷰티 에디터
- 천나리
- 사진
- 킬리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