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BL 드라마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를 방증하듯 ‘BL 코인 탔다’는 말도 생겨났다. 오랜 시간 마이너 장르로 여겨지던 BL은 어떻게 ‘양지’에 싹을 틔우게 됐을까?
“언젠가 배우에게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자신이 중동의 자산가인데 몇억원의 개런티를 줄 테니 배우와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물론 제안에 응하진 않았지만 이것도 배우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하나의 척도이지 않을까요?” 올 초 연예기획사에 근무하는 A에게 들은 이야기다. A가 말하는 배우는 인기 드라마에 출연한 한류 톱스타일까? 아니다. 최근 BL 웹드라마에 출연하며 막 연기 경력을 뗀 한 남자 신인 배우의 이야기다. A의 말을 듣고 올해 방영되거나 제작 소식이 보도된 한국 BL 웹드라마를 찾아보니, 그 작품 수만 10편을 웃돈다. 여기엔 영화투자배급사 NEW가 만드는 첫 BL 웹드라마 <블루밍>부터 영화 <건축학개론>,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명필름이 뛰어든 <따라바람>, 한국 BL 드라마 최초로 시즌제를 도입하며 오는 6월 방영하는 <나의 별에게> 시즌 2도 포함되어 있다.
남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 만화, 드라마 등을 통칭하는 장르인 보이즈 러브(Boy’s Love), 이른바 ‘BL’. BL 콘텐츠를 ‘양지’에서 말하는 요즘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시간 BL은 독자가 있지만, 또 독자가 없는 장르이기도 했다. 남성 동성애를 다룬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BL 콘텐츠는 폐쇄형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통되었고, BL물을 즐기는 독자는 은둔성을 띠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철저히 마이너 장르에 머물던 BL 콘텐츠가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불과 1~2년 사이의 일. 바로 웹툰, 웹소설에 국한된 BL 장르가 웹드라마로 제작되면서부터다. 그 시작은 2020년, BL 타이틀을 내건 국내 최초의 BL 웹드라마 <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의 방영이다. 이후 2021년 <나의 별에게>가 공개되며 BL의 허브라 할 수 있는 일본 라쿠텐 TV에서 공개 당시 전체 콘텐츠 1위에 올랐고, 올해 2월 OTT서비스 왓챠에서 <시맨틱 에러>가 공개돼 5주 연속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BL 드라마 시대의 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작년 <새빛남고 학생회>를 비롯한 BL 콘텐츠를 서비스하면서, 이 장르에 확실한 팬층이 있고, 신규 유저 유입에 대한 기대 효과가 높다는 걸 확인했어요. 특히 <시맨틱 에러>의 원천 IP는 2018년 리디북스에서 연재된 저수리 작가의 동명의 웹소설인데, 원작의 팬층이 워낙 탄탄해 이를 영상화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클 거라 판단했죠.” 왓챠 <시맨틱 에러>의 프로듀서 김소희의 말처럼 <시맨틱 에러>는 최근 한국 BL 시장의 빅뱅을 이끈 히트 상품이 되었다. 작품의 인기를 방증하듯 주연 배우 재찬이 속한 아이돌 그룹 ‘동키즈’의 곡들은 음원 사이트에 재진입하며 ‘차트 역주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른바 ‘BL 코인’. 재찬뿐 아니라 BL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BL 팬들의 높은 충성도에 힘입어 팬덤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는데, 이러한 팬덤의 특성에 대해 김소희 프로듀서는 말한다. “현재 2030 여성이 BL 콘텐츠의 주요 시청층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아요. 이를 SNS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해석하고, 2차 콘텐츠를 만들고, 새로운 팬까지 끌어오는 ‘영업력’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죠.” 여기에 A도 덧붙였다. “높은 충성도와 구매력을 갖춘 팬덤, 그리고 현저히 적은 작품 수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요. ‘총알은 있으니 새로운 작품만 나와라,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마’ 아닐까요? 지금 BL 드라마 시장에 높은 포텐셜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전부 이러한 팬덤과 시장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봐요.”
BL 드라마가 남자 신인 배우에게 매력적인 등용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연예기획사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작년 BL 드라마에 소속 배우를 출연시킨 경험이 있는 B는 말한다. “어쨌든 이전까지는 매니지먼트에서 BL 드라마에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했어요. 성격은 다르지만 ‘퀴어’ 영화의 경우 작품성이 있고 관계자들에게 ‘이런 배우가 있다’고 프로모션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BL 드라마는 아무래도 좀 더 가볍고 시장이 막 형성되는 단계이니까요. 회사 입장에서 배우가 거부감을 가지면 어떡하지 싶은 구석도 있었는데, 의외로 요즘 친구들은 LGBTQ, 장르 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어떠한 편견 없이 작품성이 있으면 하고 싶다는 입장이에요. 확실히 이전처럼 배제하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슈가 확실히 보장되기에 진지하게 검토하는 편이죠.” B는 BL 드라마의 인기를 확실히 체감한다고 말한다. OTT 플랫폼을 기반으로 제작, 유통되는 작품의 특성상 국내는 물론 해외 팬덤을 쌓기에도 용이하고, 이는 배우에게 들어오는 ‘해외 송장’이 찍힌 선물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보수적인 제작 환경의 지상파 방송국에서 BL 드라마의 제작 과정을 상세히 묻는 전화도 여러 차례 걸려왔다. B가 말한 배우는 현재 또 다른 BL 드라마의 출연을 검토 중이다.
BL 드라마의 인기는 정확히 OTT의 등장과 맞물린다. “지금의 열풍은 OTT가 변화시킨 콘텐츠 제작 환경 덕분에 가능했죠. OTT가 등장하며 기존 전통적인 영화, 드라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숏폼, 미드폼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전에는 많은 자본이 소수의 콘텐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밖에 없던 반면, 숏폼이나 미드폼 콘텐츠는 특정 타깃층, 소수 취향을 공략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특정 층만 좋아하던 콘텐츠가 대중성까지 획득하고 있다고 봐요.” 왓챠 김소희 프로듀서의 말이다. 확실히 평균 제작비 2억~3억원으로 단기간에 찍을 수 있는 BL 드라마는 ‘저비용 고효율’의 상품이다. 또 TV, 영화보다 접근성이 높은 OTT를 기반으로 송출하기 때문에 소비층이 넓다. 잘만 만들면 BL 문화에 개방적인 동남아, 일본 등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하는 K-콘텐츠로 거듭날 수도 있다. 게다가 웹툰, 웹소설로 시장성이 검증된 원천 IP도 숱하다. 그렇다면 BL 드라마 시장은 앞으로 꽃길을 걸을 일만 남은 것일까?
한국 최초의 BL 드라마 제작사 ‘더블유스토리’ 박인애 대표는 현재 포화 상태인 BL 드라마 시장에 명암이 있다고 말한다. “처음 드라마를 제작하던 2019년만 해도 BL 장르에 K드라마의 노하우를 녹여 새로운 한류 콘텐츠 장르를 개척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2년 정도만 흐르면 BL 왕국인 태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죠. 하지만 ‘돈이 된다’고 여겨 제작사들이 너도 나도 시장에 달려들면서 ‘명분’만 있고 ‘작품성’은 결여된 작품만 부지기수로 나오고 있는 게 현실이죠.” 실제 현재 방영되고 있는 한국 BL 드라마를 살피면 그것이 과연 ‘평가’할 만한 수준인가 고려했을 때 고개가 갸웃해진다. 숏폼, 미드폼의 특성상 탄탄한 서사를 담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서로 좋아하는 마음 확인, 뽀뽀해서 끝’ 식의 전개를 보고 있자면 이는 드라마라기보다 싱그러운 청춘의 ‘영상 화보’쯤으로 다가온다. “소비층이 탄탄하니까 ‘아무렇게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 큰코다치는 경우를 여럿 봤어요. BL 팬들은 소비에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SNS 같은 한 층의 레이어 뒤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데도 적극적이니까요.” A의 말이다. 나아가 BL 장르의 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제작사가 대다수라는 것도 맹점으로 꼽힌다. “BL 소비층의 99%는 여성이에요. 즉 여성의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여성의 욕구가 분명히 드러나고 해소되어야 하죠. 시청층이 좋아할 만한 요소의 밸런스를 잘 맞춰야 하는데, 이 줄타기에 어긋나면 다들 귀신같이 알아차려요. 또 ‘남남 커플’이 기본값인 현실과 동떨어진 연애 세계관의 BL과 실제 동성애자의 삶과 인권 문제를 다루는 ‘퀴어’의 차이를 모르는 경우도 더러 있어요. 그래서 BL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 피디, 작가들에게 BL이란 무엇인지를 인지시키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필수죠.” 박인애 대표의 말이다.
왓챠 김소희 프로듀서는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의 제작 배경엔 BL 장르의 높은 시장성과 잠재력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다음과 같은 자사의 비전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모두의 다름이 인정받고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다양한 세상을 만들자’. 국내 영상 콘텐츠 시장에서 BL은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다. 아직 큰 단위의 제작비를 투자하기 어려운 단계이고, 작품의 오리지낼리티는 부족하며, 만드는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 역시 초보자라는 점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지금 수면 위로 BL 드라마가 이야기되기까지 넘어온 산도 숱했다는 점에서 응원하고 싶다. 김소희 프로듀서의 말처럼 어쩌면 다양한 이야기가 곧 다양한 세상을 만드니까. 더욱 기대해볼 만한 것은, 최근 BL 장르 내부에서 다양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 작년 한국 최초의 사극 BL <류선비의 혼례식>이 방영됐고, ‘BL과 쿡방의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의 <본아페티>는 올해 하반기 방영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과연 한국 BL 드라마가 어디까지 항해할지, 기분 좋게 점쳐볼 일만 남았다.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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