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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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밟고 섰던 곳에서 몇 걸음 옮겨가,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반짝임. 모델 정호연이 이제 배우라는 또 하나의 명찰을 들고,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통해 새로운 문을 두드린다. 

검정 울 파넬 장식 재킷, 검정 울 소재 쇼츠, 베이지 색상의 빈티지 체크 삭스 부츠는 모두 버버리 제품.

오늘 모델 정호연이 아닌, 배우 정호연으로 당신을 마주하니 낯설고도 새롭다.

하하. 나도 아직 배우라는 말이 입에 잘 안 붙는다.

최근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나? 당신의 연기 데뷔작이자 9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지난해 촬영을 마쳤다 들었다.

계속 오디션을 보고 연기 수업을 들었다. 영어 공부도 하면서 영어 스크립트를 읽는 훈련도 했다.

벌써 해외 무대를 노리는 건가?

나갈 수 있으면 좋지.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미리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과거 모델로 해외 무대를 밟아본 경험이 있으니 배우로서도 해외 활동에 열려 있을 것 같다.

확실히 두려움은 없다. 모델로 처음 해외에 갔을 땐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보다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 같달까.

며칠 전 당신의 인스타그램에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사진이 올라왔다. 시에서 발췌한 문장을 함께 적었던데.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악, 갑자기 뭔가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든다. 창피하다(웃음). 올여름 혼자 양양으로 3박 4일 여행을 떠났을 때 올린 사진이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바다를 보러 가거든. 해외에서도 늘 숙소만큼은 바다 근처로 잡는 편이다. 자라 본사가 있는 스페인 라코루냐에서도 바닷가 숙소에 머무르며 혼자 돌 위에 앉아 사색하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양양에선 주로 무슨 생각을 했나? 

배우라는 직업에 발을 들이밀면서 엄청난 혼란을 겪은 것 같다. 만나는 사람도, 일하는 환경도 달라졌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딘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니까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을 만나면 자꾸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말만 하게 되고. 그러다 양양에서 한강이 쓴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란 문장을 만난 거다. 그걸 보고 다짐했지. 나도 스스로를 단단히 밀봉해 마음을 잘 정리하자.

오버사이즈 턱시도 재킷과 셔츠, 귀고리는 모두 발렌시아가 제품.

<오징어 게임>은 올 초부터 기대작이라 꼽혀온 작품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데스 게임’을 소재로 한 장르물이자 영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등의 황동혁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이정재, 박해수가 출연했다. 사람들이 공개도 전에 ‘대작 타는 냄새가 난다’고들 하던데, 첫 데뷔작이 이런 기대를 받는 작품이니 부담이 컸을 것 같다. 

말도 못하게 컸다. 작년 1월 지금의 배우 전문 매니지먼트로 회사를 옮겼는데, 당시엔 회사에서 어느 정도 나를 트레이닝시키다 작품에 투입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월에 덜컥 회사 대표님을 포함한 단체 카톡방이 열리더니 <오징어 게임> 대본을 주면서 오디션 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심지어 나는 뉴욕 패션위크 참가로 뉴욕에 있었는데!(웃음)

트레이닝이되, ‘하드 트레이닝’이었네(웃음).

그러고는 카톡방에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영상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대한 빨리’가 언제까지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 그대로 ‘멘붕’ 이었다.

보통 ‘최대한 빨리’란 ‘당장’이란 뜻일 때가 많지. 

그렇지(웃음). 그래서 오로지 하나만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다 쏟아붓자.’ 그때 배우 에이미 애덤스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늘 오디션을 볼 때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한다’는 말. 작품에 캐스팅이 되든 아니든 잘 준비하고 싶었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대본만 본 것 같다. 잠도 거의 못 잤다. 그렇게 3일째 되는 날 오디션 영상을 보냈다. 그걸 보내고 ‘드디어 끝났다’는 심정이 돼서 뭘 엄청 먹은 기억이 있다(웃음).

지금 당신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 ‘환장’하는 일은 실제 오디션을 보러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이틀 후 오디션을 보는 일정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핸드폰을 켰는데 그 무서운 단톡방에 또 어떤 메시지가 와 있었다(웃음). 오디션 추가 대본이 있다는 얘기였다. 분량이 꽤 길었다. 집에 가서 다시 잠을 못 자고 대본만 봤다. 며칠 전 오디션 당시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을 봤는데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와 있더라고.

그 소란을 치르고 오디션에 합격했을 땐 어떤 기분이 들던가? 

충격적이었다. 캐스팅됐다는 대표님의 말에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왜요?’였다. 너무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그것보다 큰 공포심이 밀려왔던 것 같다. ‘정말 감사한데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든 건가?

맞다. 감독님이 나를 왜 뽑으셨는지부터 시작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공포심이 극에 달한 순간은 첫 대본 리딩 때다. 20명 넘는 배우가 참석했는데 단역 선배님들도 연기를 너무 잘하셨다. 게다가 내 앞으론 이정재 선배님, 옆에는 박해수 선배님이 앉아 있었다. 정말 한없이 작아져서 대본 리딩을 마쳤더니 감독님이 나를 붙잡고 말하셨다. “많이 쫄았어?”

하하!

그 공포심이 촬영 초반까지 이어진 것 같다.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짜고짜 감독님 붙잡고 차든 밥이든 좋으니 한번 자리를 갖자고 말씀드렸다. 어쨌든 감독님은 어떤 가능성을 보고 나를 캐스팅했는데 내가 그것의 200%, 300%는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감독님이 믿은 것만큼은 보여줘야 했으니까. 나의 질문은 딱 하나였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잘하고 있어. 넌 이미 충분하고, 네가 맡은 새벽이란 인물이 곧 너야.’ 어쩌면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모든 것이 편해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데, 남은 나를 믿어준 셈이네.

정신이 바짝 들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생각했다. ‘오케이, 아직 내 연기는 부족하다.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연기를 하자.’ 이렇게 정리되니까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재킷과 팬츠, 벨트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 제품.

<오징어 게임>의 예고편에서 당신을 봤는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내가 본 사람이 그 정호연이 맞나?’ 극 중 소매치기까지 하며 거칠게 살아온 새터민 ‘새벽’ 역할을 맡았는데, 예고편에서 당신을 몰라볼 정도로 맡은 캐릭터와 잘 어울리더라.

탈북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봤다. 새터민인 사투리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삶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큰 어려움 없이 새벽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나와 새벽이가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2016년 한국을 떠나 작년 초까지 해외에서 모델 활동을 하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새벽이도 고향을 떠나 부모님 없이 동생과 단둘이 한국에서 살아간다. 그 친구는 소매치기를 했고 나는 모델을 했을 뿐이지,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혼자 꿋꿋이 버티며 산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델 활동 당시의 이야기를 하자면, 2016년 당신이 뉴욕으로 향한 직후 루이 비통과 2017 S/S 시즌 시티 독점 계약이 성사됐다. 이듬해 칼 라거펠트가 직접 촬영한 샤넬의 2018 F/W 광고에도 참여했다. 이른바 ‘톱모델’이던 당신이 갑자기 배우의 길로 방향키를 튼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 처음 모델을 시작했을 때도 이렇다 할 동기가 없었다. 중학생 때 ‘어른이 되면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키가 크니까 주변에서 모델을 해보라는데 정말 그럴까?’ 란 생각이 들어서 모델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처음엔. 하지만 재미있었다. 잘하고 싶었고, 늘 다음 단계를 찾았다. 나는 항상 어떠한 ‘과정’에서 재미를 발견하고, 그 시간을 동력 삼아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다.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뚜렷한 동기는 없었지만, 연기에 대한 동기 부여만큼은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던 것 같다. 혼자 해외에서 지내며 좋은 영화를 많이 봤고, 좋은 책을 읽었고, 그로써 내 안의 허한 마음이 채워졌다. 그러다 문득 그걸 연기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던 것 같다.

허한 마음이 있었나?

아무래도 모델은 보여지는 직업이니까. 예전에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내가 편집한 세상을 보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어떻게 보면 인스타그램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편집해 보여주는 공간이다. 모델 일을 하며 누리는 반짝이는 일상, 이를테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다. 물론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좋아해줄 땐 감사하고 행복하다. ‘나 살아 있구나’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이런 사람인가?’란 생각이 들더라고. 사람들은 나의 반짝이는 모습을 좋아하는데 내가 봤을 땐 나는 그와는 다른 모습을 훨씬 많이 가진 사람이거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해외로 떠나기 직전. 한국에서 막 모델 일을 시작했을 땐 큰 고민이 없었다. 욕심이 많아서 일이 들어오면 ‘무조건 할게’란 마인드였고, 그렇게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치 내가 일하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문득 ‘나는 누구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뉴욕으로 떠나는 짐을 쌌다. 어쩌면 현실 도피였다. 물론 커리어의 성장을 바라고 떠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나의 생활에 변화를 줘야겠다, 나를 힘든 환경에 내몰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스스로에게 박한 사람 같다. 당시 당신은 국내에서 한 잡지의 커버를 장식할 정도로 커리어의 정점을 밟고 있었다.

내가 좀 그런 게 있다. 주위에서도 ‘완벽주의자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한다. ‘이게 부족해?’란 생각이 들면 채찍부터 꺼내 든다. 습관인가 보다. 내 부족함을 동력 삼아 계속 커리어의 발전을 이뤄왔던 것도 같다.

니트 드레스와 테일러드 롱 코트는 알렉산더 맥퀸 제품.

그렇게 떠난 뉴욕에선 어떤 시간을 보냈나?

처음엔 모진 마음으로 뉴욕으로 떠났지만 막상 그곳에서 릴랙스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물론 굉장히 치열한 곳이 맞고 그 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크다. 패션위크가 시작되면 모두가 미친 사람처럼 일을 하거든.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과 휴식의 시간을 명확히 구분한다. 자신의 개인 시간에 터치받고 싶어 하지 않고, 또 그게 존중된다. 한국에서 모델 일을 할 땐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비로소 그곳에서 나를 돌아보고 릴랙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휴일이면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을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 연기란 걸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외로움을 영화, 책으로 달랬고 거기서 느낀 것들을 연기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크게 들었으니까. 그래서 홀리데이 시즌이면 한국에 와서 연기 수업을 들었다.

뉴욕에 간 것이 당신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준 것 같다.

맞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항상 내게 물었다. ‘호연, 지금 너의 상태는 어때? 괜찮아?’ 처음엔 그런 질문이 너무 불편했다. 내 상태를 굳이 남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난 그저 일만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을 얘기하면 그 친구들은 또 말한다. ‘그것도 중요한데 나는 너의 상태가 너무 중요해. 네가 혹시 불편하면 나는 너에게 이걸 시키고 싶지 않아.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그런 말을 계속 듣다 보니 과거 스스로를 도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좀 더 의견 있는 사람으로 변해간 것 같다. 그렇게 해외에서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친구들에게 ‘변했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얼굴이 너무 편해 보인다’고. 어쩌면 뉴욕 생활이 나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 것 같다.

뉴욕에서 나란 사람의 기질이 한 번 바뀌었다면, 연기를 시작하고 느낀 변화는 무엇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연기를 하며 인간에 대해 공부하게 된 것 같다. 예전엔 뉴스를 봐도 ‘이런 사고가 있었구나’ 정도로 끝났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란 생각을 한다. 어떻게 보면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연기를 시작하며 조금씩 세상의 공기가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든다. 똑같은 풍경인데 관점 차이 하나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

모델 정호연과 배우 정호연은 다른 사람인가?

같은 사람이다. 물론 지금 모델로 카메라 앞에 설 때면 어느 정도 여유를 느낀다. 배우 일을 할 땐 긴장되고 서툴다는 생각이 앞서고. 하지만 모델을 해봤기 때문에 좋다고 느끼는 건, 나는 모델로서 신인도 경험하고 성공적인 커리어도 경험했다. 그런데 신인 모델로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잘했나 생각하면, 아니거든. 서툴고 투박했지만 그것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야, 모델 일을 10년 하고 나서야 느낀 거다. 배우의 출발선에 서 있는 지금은 모델 활동 당시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졌다고 느낀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기분을 프레시업하고 환기시키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런 변화가 앞으로의 배우 생활을 건강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다.

뉴욕에서 많은 영화와 책을 봤다고 했다. 그중 유독 당신에게 말을 걸어온 작품이 있는가?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로마>. 극 중 주인공 역할을 맡은 얄리차 아파리시오는 <로마>를 통해 처음 연기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영화를 보면 아파리시오의 연기가 다소 서툴고 투박하지만, 그녀가 그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잘 느껴진다. 그걸 보면서 나도 많은 용기를 얻은 기억이 있다.

오늘밤도 잠들기 전, 책이나 영화를 꺼내 볼 것인가?

앗, 오늘은 아무것도 안 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명상하면 안 되나?(웃음) 요즘 이완 명상에 빠져 있다. 시간이 자정으로 향해 갈 즈음, 침대에 누워 내 호흡에 집중하며 명상하다 잠에 들 것 같다.

컷아웃 장식이 과감한 테일러드 재킷, 슬림 핏 팬츠, 목걸이, 귀고리, 웨지힐 슈즈는 모두 지방시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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