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은 가벼워지기로 했다. 활활 타는 횃불처럼 이글대던 시간을 지나 고요한 촛불의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진영, 다시 시작한다.
어제 당신의 인스타그램을 봤는데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더라.
진영 그 게시물 올리고 소속사 직원한테 한 소리 들었다.
왜인가?
어쩜 그렇게 SNS에 소질이 없냐면서(웃음). 사진이 유독 뿌옇게 나왔는데 카메라 렌즈에 지문이 잔뜩 묻어 있었나 보다. 소속사를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몇 번 말 붙여본 게 전부인 직원에게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연락이 왔다. ‘진영 씨, 지금 인스타그램에 올리신 사진 원래 스타일이신가요, 실수인가요?’
하하. 부산에는 어쩌다 간 건가? 올해 방영할 tvN 드라마 <악마판사>를 한창 찍는 중이라 들었는데.
드라마 촬영은 아니었고, 현대미술가 문경원, 전준호 작가의 영상 작업 촬영차 부산에 이틀 내려가 있었다. 촬영 마치고 돌아오는 KTX 안에서 거의 기절하듯 잠만 잔 것 같다.
방금 문경원, 전준호라 했나? 올해 9월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들의 대규모 신작을 전시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전이 개최된다.
맞다. 그때 공개될 신작에 참여한 셈인데, 나에게 연락해준 것만으로 너무 감사할 정도로 예술적으로 뛰어난 분들이다. 지인을 통해 참여 의사를 물어왔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말이다. 내가 언제 또 이런 예술 하는 분들과 작업해보겠나.
예술가라는 독특한 인류가 단순히 호감만 가지고 누군가에게 협업을 제안하진 않았을 텐데. 왜 당신이어야만 했는지 그 내막이 궁금하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나도 모른다. ‘왜 절 선택하셨어요?’라는 드라마틱한 질문은 차마 못했다. 그저 현장에서 재미있는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좀 흥미로웠던 건, 촬영할 때 피사체를 어딘가에 가두지 않는다. 어느 정도 디렉션은 있었지만 ‘일단 해보세요’가 전부다. 소재도 독특하다. 나 말고 한 남자 배우도 등장하는데 나와 그가 결코 만나진 못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전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 참겠다(웃음).
아까 당신이 말했듯 가수로 10년 가까이 몸담아온 회사를 떠나 올해 1월 새로운 소속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첫발을 뗀 셈인데, 지금 기분은 어떤가?
설레기도 하지만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걱정을 너무 오랜 시간 해와서 이제 걱정만큼은 좀 접어두려고 한다. 모든 결정에는 후회가 따르니까. 아무리 좋은 결정이라고 해도. 지금은 그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집중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끝이 아니지 않나. 모든 건 그대로다. 올해 2월 갓세븐 멤버들과 싱글 앨범 <Encore>를 발매하기도 했고.
걱정을 너무 오랜 시간 해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 걱정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걱정할 것 없이 계속 열심히 일하면 되는 거였는데.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게 아닐까? 이젠 그걸 좀 내려놓으려고 하는 단계이고.
항간에 이전 소속사와 계약이 만료될 무렵 많은 회사가 당신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후 당신이 가수가 아닌 배우 매니지먼트인 지금의 소속사와 손을 잡았다는 기사가 쏟아졌고. 앞으로 갓세븐에 속한 가수 진영이 아닌, 배우로서의 당신을 자주 접할 것 같은데, 이런 선택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나?
과거 작품을 통해 지금 소속사의 선배 두 명을 만났다. tvN 드라마 <화양연화>에선 유지태 선배와 합을 맞췄고, 영화 <야차> 때는 박해수 선배와 함께했다. 두 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거처를 옮긴다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그 혼란스러웠던 변화의 시기에 두 분이 많은 조언을 해줬다. 그분들이 잘 이끌어줘서 지금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혼란스러웠을 시기에 만난 이들에게 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쿡 박혔던 거겠지.
모든 어른들이 내게 공통적으로 이야기해준 말이 있다. ‘지금 힘든 게 시간이 지나면 생각보다 힘든 게 아니더라, 진영아.’ 솔직히 얘기해도 되나? 사실 나는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전 회사도 너무 좋은 곳이었고, 지금 회사도 너무 좋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회사 두 곳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래서 내가 힘들었다고, 걱정했다고 말하는 게 배부른 소리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돌이켜 보면 정말 별것 아닌 것들이거든. 변화의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때 최선의 결정을 하면 되는 거니까.
올해 1월, 갓세븐 멤버들이 각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 위해 인스타그램에 자필 편지를 올렸다. 거기서 유독 마음을 울린 문장이 있다. ‘그저 희망이 아닌 현실로서 저희 7명이 색다르게 성장하는 좋은 모습 오래도록 보여드릴게요.’
유겸이가 쓴 부분일 거다. (오래 침묵하며) 사실 그 문장을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 미래는 모르는 거고, 우리가 아무리 계획한다 한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데 멤버 모두가 생각한 건 이거였다. ‘일단 뱉자.’ 물론 예전보다 자주 그룹으로 활동할 수는 없겠지. 마크 형도 미국으로 돌아갔고 잭슨도 해외 각지에서 개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고. 하지만 팬들이 정말 기다려준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는 없겠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편지를 쓰면서 나는 <Encore>를 만들고 있었고. 멤버들한테 말했다. 내가 이런 걸 썼다, 우리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멤버들에게 넌지시 곡을 건넸고, 모두가 흔쾌히 수락했다.
멋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참… 착하지.
멤버들 간 사이가 좋다는 사실이 워낙 유명하니까 그 말이 더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제일 많이 싸우는 그룹이기도 하다. 심지어 <Encore>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도 싸웠다.
도대체 그 아름다운 순간 왜 싸웠는가?
모르겠다. 남자는 그냥 일단 모이면 싸우는 것 같다(웃음). ‘아니라고, 여기서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촬영 끝나고 1시간 동안 애들이랑 모여서 얘기했다. ‘우린 왜 또 싸웠을까?’(웃음)
숨 좀 돌려, 현재 작업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지금 촬영 중인 <악마판사>는 순조롭게 항해 중인가?
지금 극 초반을 촬영 중이다. 그런데 언제나 초반 촬영이 중요한지라 감독님, 함께 출연하는 배우 지성 형님이 스파르타식으로 나를 이끌어주고 있다. 어쨌든 작품의 중심은 지성 형님이고 나는 그저 쫄래쫄래 잘 따라가고 있다.
<악마판사>의 극본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문유석 작가가 집필했다. 본격적인 법정 드라마인 데다 문유석 극본이라 하니 기대감이 확 상승한다.
처음 대본을 본 후 첫 마디가 ‘이게 뭐야?’였다. 작가님의 이전 작품이었던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와 결이 완전히 다르다. 판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번 작품은 판타지 장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특하다. 감독님한테 가끔 묻는다. ‘이건 대체 무슨 장르예요?’ 그러면 감독님도 장난삼아 나도 잘 모르면서 찍는다고 말한다(웃음).
어째 궁금증만 쌓여간다.
줄거리가 점점 파국으로 달려가는데 결국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사람들이 정의라고 외치는 것을 깊게 파헤쳤을 때 그걸 과연 온전한 정의라 할 수 있는가? 정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의 열망을 다루는 작품이다. 나는 그 정의를 파헤치려는 순수 청년 ‘김가온’을 맡았고.
맡은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일단 캐릭터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지성 형님이 과정이 어떻든 통쾌한 결과를 통해 판타지적 욕망을 해소해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김가온은 정의가 중요하고 과정에 집중한다. 이런 점에서 나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감독님과 얘기했던 게, 이 캐릭터는 시청자의 눈과 똑같은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거다. 김가온은 자신을 숨기면서 드러낸다. 그래서 지성 형님이 말한다. ‘그래, 네가 하는 거 어려운 거야.’ 잘 표현해서 좋은 평가를 듣는 게 가장 좋겠지만, 못하더라도 벌을 달게 받을 준비를 굳게 하고 있다.
이번에 순수 청년을 연기하게 됐다고 했는데, 과거 인터뷰를 보면 당신은 순수함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유독 순수함에 대해 자주 말했다. 특별한 사연이 있나?
옛날엔 무작정 멋지게 보이고 싶었던 게 있었다(웃음). 그래서 순수함을 자주 얘기한 것 같은데, 실은 단순한 얘기다. 언제나 어린 채로, 순수한 채로 남고 싶다. 어른이 되어가면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아지니까. 그런 사실이 가끔 나를 짓누르고 지치게 한다. 나는 평생 어리고 싶은데 나이가 들면 지켜야 할 사회적 품위가 있으니까.
반대로 섣불리 어른이 되고자 했던 시절도 있었나?
그럼. 과거 인터뷰만 봐도 알 수 있다. 얼마나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겠나. ‘순수함을 지키고 싶어요.’ ‘저 믿음직스러워요.’ 어찌 보면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쓴 거지. 그때도 분명 힘들고 불편한게 있었을 텐데 그걸 결코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솔직하지 못 했던 거다. 인터뷰로, 말로 날 포장하려 했고. 지금은 그런 것들을 버리는 시간인 것 같다.
생각이 변화한 계기가 있었나?
힘들어 보니까 편해졌다. 물론 남들에겐 내가 굉장히 편안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고, 연습생 중 1등으로 합격해 회사에 들어갔고, 단 2년의 연습생 시절을 거쳐 바로 데뷔했고, 갓세븐도 잘됐고. 그런데 문득 내 삶을 직시해보니 죽겠는 거다. 마침 코로나19라 그러고 싶지 않아도 사색할 수밖에 없었고. ‘난 대체 어떤 사람이지?’
그렇게 들여다본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
과거의 나는 스스로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싶어 했다. 너무 예의 바르게만 행동했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한마디로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거지. 정작 자신에게는 야박했고. 프레임에 갇혀서 더는 새로울 것 없는 애처럼 지냈던 거다. 스스로 한계를 느끼니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이 될 순 없으며, 모두에게 맞춰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비교적 최근에야 깨달았다.
지금 좀 홀가분한가?
너무 편하다. 신기하게 최근 MBTI 결과도 바뀌었다. 원래 ISFJ였는데 지금은 ENFJ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졌다. 예전에는 ‘혼자 있어도 돼’가 심했다. 사이토 다카시의 책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맹신하다시피 했다. ‘내가 사람을 왜 만나?’ ‘난 혼자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데?’ 어렸을 때 얼마나 중2병이 심했는지(웃음). 그런데 지금은 같이하는 것의 힘을 안다.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가장 소유하고 싶은 천부적 재능이 있는가?
글씨 잘 쓰기! 팬들이 항상 놀린다. 내 글씨를 보고 ‘마른풀잎체’라고 하더라(웃음). 이것 말고도 자잘하게 많다. 그림 잘 그리는 것, 셀카 잘 찍는 것, SNS 잘 하는 것(웃음). 너무 답답하다. SNS 가지고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나는 정말 트렌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다. 그래서 다가오는 미래가 두렵다. 하하. 빠르게 진화하는 시대에 잘 못 따라가는 느낌?
애늙은이 소리 좀 들어봤겠다.
진짜 많이 들었다. 가장 많이 듣는 오해가 ‘진지하다’다. 목소리도 그렇고 말투 때문에 쉽게 오해받는다. 가만히 말 않고 앉아 있으면 화난 줄 아는데, 나는 매사가 장난이거든.
사실 ‘진영’ 하면 첫사랑의 이미지가 있지 않나. 반듯한 얼굴 덕에 학창 시절 마치 실제 짝사랑했던 상대인 듯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고 해서 ‘기억조작남’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런 당신은 어떤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나?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답변 방향을 외적으로 가야 할지, 내적으로 가야 할지 고민된다(웃음). 우선 나의 연예인은 신민아 선배님이다. 주인공으로 나오신 SBS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보고 펑펑 울었다. 그때 연습생 시절이었는데 지나가던 직원 분이 나에게 휴지를 건네준 기억이 난다. ‘진영아 닦아.’(웃음) 내적으로는 일단 대화가 잘 통하면 좋겠지. 잠깐 반짝거리는 매력 보단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여성이 좋다. 너무 좋고 매력적인데 불편한 사람 있지 않나. 그런 타입에 끌리진 않는다.
드라마 <화양연화>의 상대역 전소니가 맡은 ‘지수’ 같은 스타일은 어떤가? 짝사랑하는 선배에게 딱 한마디 하지. “제 마음 안 변하니까 설득할 생각 마세요.” 이런 직진 스타일은 어떤가?
안 된다. 못한다. 사람 마음이 왜 안 변해. 그 말 확신할 수 있어? 하하. 장난이고. 직진하는 스타일보다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 이른바 ‘자만추’지.
당신을 가장 충만하게 만드는 순간은 언제인가?
사람들이랑 있을 때. 그저 장난치고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제일 좋다. 술 한 잔 기울이면 금상첨화고.
술 좋아하나?
애주가라기보다는 소규모 술자리를 좋아하긴 한다. 요즘엔 이런 자리 갖기가 어렵지만, 네댓 명이 딱 대화하기 좋은 인원수다. 술이 약하진 않고. 주종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맞춰준다. 상대가 위스키가 좋다면 그걸 마시고, 와인이 좋다면 와인 마시는 거고. 혼자 마실 땐 주로 소주나 사케로 달리지만.
그런 자리에서 쉼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면?
영화. ‘그 영화 봤어?’ ‘이거 감독은 누구야?’ ‘음악은 어때?’ ‘요한 요한슨 좋아해? 조니 그린우드 좋아해?’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끊이지 않게 얘기하는 편이다. 다만 취향에 일관성은 없는 편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나 <펀치 드렁크 러브>를 너무 좋아하고. 원래 인스타그램에 영화 추천을 안 하는데 <아이다호>와 <마틴 에덴>은 보고 너무 좋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 말하고 보니 좀 농도 짙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올해로 스물여덟을 맞았다. 지금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나?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선배님들한테 많이 배우고 싶다. 연예인이란 직업이 사실 박수를 받는 직업이지 않나. 그러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게 과연 맞는 건지 잘 모르는 망각 상태에 빠지기 쉽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분명 있었고. 그래서 모든 걸 내려놓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지내고 싶다. 일단 30대까지는. 어차피 인생은 기니까.
다가올 30대가 두려운가?
아니. 두렵지 않다. 20대에 좋은 작품으로 나를 잘 기록하다 보면 선물같이 30대가 찾아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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