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다양한 형태로 존재감을 발휘할 베스트에 관하여.
지난 시즌 셀린느의 낭창낭창한 베스트 룩을 기억하는가. 적당히 워싱된 데님 팬츠,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여기에 핀스트라이프 베스트를 입은 모델이 걸어 나왔을 때, 뭇 여성들은 마음속 커다란 일렁임을 느꼈을 거다. 베스트 스타일링은 다소 고루한 차림으로 보인다는 오랜 편견을 와장창 깨주며, 무심해 보이지만 완벽하게 계산된 듯한 이 스타일링을 여러 번 곱씹은 기억이 난다.
가을과 겨울의 드레싱에는 항상 레이어링이 존재한다. 이번 시즌 레이어링의 키를 쥔 것은 베스트 스타일링이다. 조끼, 즉 베스트의 시작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남성의 드레스 코트인 연미복을 허리 높이에서 커팅해 완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를 웨이스트코트라 불렀으며, 20세기 초부터는 여성복에도 차용해 다양한 디자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소매가 없는 옷을 통용하는 단어가 된 베스트는 매 시즌 어렵지 않게 런웨이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이번 시즌은 고전적 디자인을 탈피한 보다 다양한 형태의 베스트가 등장했다.
가장 활개를 친 건 스웨터 베스트다. 꽤 오랫동안 컨트리풍 스타일로 언급되던 니트 베스트가 잠에서 깨어나 트렌드의 중심에 설 채비를 마친 것이다. 프라다는 몸에 밀착되는 니트 베스트에 셔츠와 넥타이를 매치하고 슬릿 스커트로 다리를 드러내며 다소 캐주얼해 보일 수 있다는 편견을 깨줌과 동시에 새로운 스타일링을 제안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짝을 이룬 회색 양털 베스트와 플란넬 바지로 도회적인 베스트 룩을 완성했으며, 떠오르는 나이지리아 디자이너 케네스 아이제는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받은 화려한 문양의 밝은 네온 니트 베스트로 이국적 무드를 선보였다. 베스트의 활약을 일찌감치 주도한 셀린느는 어땠을까? 엠브로이더리 스타일의 크롭트 베스트를 블라우스와 벨벳 치마에 매치해 특유의 히피풍 프렌치 시크 스타일을 보여주며 기대에 부응했다. 에트로 또한 자수가 놓인 패턴 베스트를 페이즐리 블라우스와 매치해 에스닉 룩을 완성했으며, 코페르니는 미래적인 투명 베스트로 동시대적 발상을 보여줬다. 가장 적극적으로 베스트의 활약을 예고한 브랜드는 디올이다. 전통적인 디자인의 베스트부터 니트·데님·패딩 베스트 등 그야말로 베스트 시대를 예고했다.
“남성들이 훨씬 더 의상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들의 아이템을 통해 여성들에게도 같은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는 1960년대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이후 여성의 옷장을 풍요롭게 채워온 베스트. 빈틈없는 테일러링에 매니시한 스피릿, 섹시함이 깃든 전통의 베스트 룩이 아니어도 좋다. 2020 F/W 시즌의 베스트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니 말이다.
- 패션 에디터
- 김민지
- 포토그래퍼
- 윤지용
- 모델
- 박서희
- 헤어
- 장혜연
- 메이크업
- 황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