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만나지 않고도 만날 길이,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소통할 길이 있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의 저명한 아티스트에게 만남을 청해온 <더블유>는 이제 그들을 온라인으로 불러들였다. 직접 대면해 화보를 촬영하고 인터뷰하던 물리적 제약과 강박에서 벗어나, 화상에서의 만남을 지면에 고스란히 살려낸 인터뷰 기획은 지면 매체가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인터뷰 퍼포먼스다. <더블유>의 실험이자 색다른 기획에 LA, 파리, 암스테르담, 도쿄에 있는 다섯 명의 해외 아티스트가 응했다.
사람과 사회와 세상을 향한 관심을 비일상적 크기의 이미지로 출몰시키는 아티스트JR . 어느 거리에, 도시에, 혹은 분쟁 지역의 벽에 부착된 그 이미지는 이런 말을 품는다. ‘사람이 여기 있다.’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낯설 수 있다. 마침 한국에는 그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인기 많은 아이돌이 살고, 포털 사이트의 검색 지분을 차지하는 건 아이돌의 몫이다. JR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공장소에 대형 사진 이미지를 설치한다. 비일상적인 크기로 확대되어 거리에, 도시에, 혹은 분쟁 지역에 나타난 초상들은 자연히 이목을 끈다. ‘사람의 초상을 찍고 종이 포스터로 인쇄해, 벽이나 비계 구조물에 부착한다.’ 이 단순한 작업 방식은 그것이 위치한 장소의 맥락, 작업물의 스케일, 무엇보다 ‘사람’이라는 무수하고 다층적인 결에 따라 더 이상 단순하지만은 않은 설치작으로 그 의미를 키워간다. 그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안고 촌락에 사는 여자들의 초상을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선박에 입히고, 여기에 ‘여성이 영웅이다’라는 프로젝트 명을 붙인다. 지금은 고인이 된 프랑스의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작업 여행을 떠나서는, 그녀의 눈과 발 사진을 화물 기차에 붙여 시력을 잃어가고 노쇠한 그녀가 세상 멀리까지 보고 달릴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세상의 발이 묶이고 인터넷 사용량이 증가했다는 올 상반기를 보낸 후, 문득 팬데믹이 아니었어도 세상이 좁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SNS에 붙들려 살고, 그 속에는 ‘인스타그래머블’한 JR의 작업 이미지도 있다. 정작 그는 지구상의 위도와 경도를 바꿔가며 특정 장소에서 그늘 속 사람과 군중을 출몰시킨다. ‘한번 눈으로 본 것을 보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는 일.’ JR의 말마따나 워낙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그의 비주얼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의 거리를 좁히려 한 결과물이다. 이제는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실상에서, 타인과 관계 맺으며 장소 특정적 설치를 하는 그를 호출했다.
안녕하세요, 이제 제 음성이 들리나요?
JR 오! 드디어 들려요!
혹시나 이렇게 연결에 문제가 있을까 봐 다른 노트북을 준비해두어서 다시 접속했어요. 놀라서 땀이 나네요. 이제 문제 없어요, 하하.
지금 있는 곳이 어딘가요? 으슥한 장소 같아요. 여기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동굴이에요. 제 컴퓨터는 고정돼 있어서 웹캠으로 공간을 다 보여주기 어려워요. 잠깐만요, 제 폰으로 우리 미팅 방에 접속해서 이곳을 좀 비출게요… 이거 보여요? 모터를 단 잠수함 장난감이 케이블을 타고 왔다갔다 할 수 있도록 이렇게 위에 달아뒀어요. 미팅할 수 있는 작은 테이블, 수도 시설도 있고요. 요즘에는 거의 여기서 작업해요.
동굴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동굴이나 방공호에 들어가 있는 듯해요. 작업실을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요즘 파리 상황은 좀 어때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에요. 7월 중순 넘어가면서 레스토랑이나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지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해요. 가을쯤이면 좋아질 것 같기도 한데… 어찌 될지는 알 수가 없죠. 한국에서도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나요? 영업도 하고요?
네, 대부분의 시민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녀요. 하지만 회사나 영업 시설 등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요. 우리도 공공 공간에서는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해요. 그래도 자가 격리가 코로나19 확산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당신의 개인전도 다행히 예정대로 열리잖아요. 파리에 있는 페로탕 갤러리에서 8월 말부터 한 달 가까이 하죠? 전시 제목은 <Tehachapi>예요. ‘테하차피’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도시 이름이죠. 그곳에 있는 교도소에서 제가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감옥 안에서 예술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보여주는 전시예요. 예전부터 교도소라는 시스템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교도소에서 뭘 했는데요? 제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찍으면서 작업하잖아요. 교도소라는 일종의 커뮤니티 안에도 많은 사람이 있죠. 테하차피에 있는 감옥은 우선 높은 보안 등급으로 유명해서 관심이 갔어 요. 하늘에서 바라보면 콘크리트 건축물이자 대규모 커뮤니티라는 게 잘 보이고요. 무엇보다 교도소란 수많은 ‘벽’으로 이뤄진 곳이잖아요. 벽은 제 작업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예요. 거기 수감된 사람들, 가족들, 교도소 직원들의 초상을 담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처음부터 말해뒀어요. 무슨 죄목으로 수감됐으며 어떤 사연이 있는지 말하길 원치 않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당신은 사진가이면서 영화 연출 경력도 있고, 작업 특성상 설치형 스트리트 아티스트라는 말이 어울려 보여요. 공공 설치미술의 성격을 가진 스트리트 아티스트라고 해야 할까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나요? 작업을 하러 가면 대부분은 내가 누군지 잘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을 받기도 해요. 어쨌든 거리에 나설 때 저는 그냥 ‘예술가’라고 소개 해요. 예술가라는 말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죠. ‘당신이 예술가라면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여기서부터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 대화가 제 작업의 근본적인 부분이기도 해요.
작년 아바나 비엔날레에 출품한 한 작품은 쿠바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소년의 초대형 초상이었죠. 예를 들면 그런 소년이 ‘아저씨는 그래서 대체 무슨 예술을 해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나요? 하하, 좋은 질문이네요.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라고 대답해요.
그리고 선글라스와 모자 차림을 고수하죠? 저는 종종 위험 한 상태에서 일하거든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게 감추면서도 입었다 벗기가 쉬운 방법을 찾은 거예요. 의외로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으면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
당신과 아녜스 바르다가 출연하고 공동 감독한 다큐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Faces Places)>을 흥미롭게 봤어요. 두 사람이 즉흥적 모험을 떠나 여러 작업을 하죠. 일 할 때 당신은 고뇌하기보다 쉽게, 즐겁게 하는 스타일 같던데요? 과정이 유독 까다롭고 위험했다고 기억하는 작업은 뭔가요? 위험한 순간이야 여러 차례 있었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는 프랑스의 시골을 돌아다녔어요. 시골의 분위기는 대체로 평화롭잖아요. 하지만 전쟁이나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뭘 하는 건 기본적으로 힘들죠. 브라질 파벨라에서 설치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에는 총격전이 벌어졌어요.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이 있을 거예요. 경찰들이 와서 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말하던 순간도 담겼어요.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체감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정리되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실감 났어요.
그때 브라질에서 만난 60대 여성과의 일화를 언급한 인터뷰를 봤어요. 그녀가 ‘이렇게 위험한 곳에 왜 온 거냐’라고 따지듯 묻는데, 당신이 예술가라고 소개하니까 ‘우리는 예술가가 필요해!’라고 누그러지면서 이것저것 도와줬다면서요? 예술하러 온 낯선 이를 환대한다는 것, 그건 무슨 심정일까요? 제 작업 특성상 전 세계 수많은 장소를 돌아다녔어요. 그 경험들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점은, 우리 짐작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인간의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예술이 가진 힘을 이해한다는 거죠. 제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예술이 잠시 멈춰 생각을 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한데 모이게 하고,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꿔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분쟁이나 범죄가 일어나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예술 같은 것과 거리가 멀잖아요? 그런데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덧씌워진 부정적 인식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데 예술의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대표적인 도시 시리즈 이름이 ‘The Wrinkles Of The City’예요. 액면상으로는 노년의 초상들이 낡은 건물 외관에 부착된 형태입니다. 왜 노인들일까 궁금했는데, 도시의 노후화와 해당 지역에 오래 거주한 노인들을 엮는 프로젝트라는 걸 알고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스탄불에서 그 프로젝트를 추진하다 고소당한 적이 있죠? 시 당국이 그런 작업에 절대 허가를 내주지 않죠. 하지만 다수의 지역민들은 작업이 실현되길 바랐어요. 경찰이 들이닥쳐서 벽에 붙은 포스터를 페인트로 덮어버릴 때, 구경 중이던 사람들이 항의하기도 했고요.
그 이후 분위기가 반전됐어요. 그게 2015년 즈음인데, 그 때의 현장 사진이 트위터에서 큰 횟수로 리트윗되며 반향을 일으켰죠. 시에서 부랴부랴 고소를 취하하고 오히려 작업하기 위한 벽 자리를 알아봐준다고 했다는 소식은 조금 웃겼어요. 리트윗 수가 무섭게 불어나자 이스탄불 시에서 저를 공식적으로 초청하고, 작업을 다시 해주길 요청했어요. 하지만 안 따랐어요. 내 작업이 사라지게 한 공권력을 위해 내가 일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물론 그 모든 과정이 그 일을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건 의미 있었어요. 또 경찰이 내 작업을 페인트로 덮어버렸다고 해도 작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번 눈으로 본 것을 보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에요.
당신의 신념이 지역사회의 지지를 받는 경험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해요. ‘거리, 대중과 시민, 자유와 민주주의’는 선이고, ‘국가, 정부와 정치, 법적인 것’은 악에 가깝다는 인식이 좀 생기진 않았을지. 예술가로 살면서 저는 흑백의 영역보다 회색 지대에 가까운 곳에서 일한다고 생각해요. 확실히 회색 지대가 흥미로워요. 어떤 해답을 찾는 사람들만이 이런 영역을 헤쳐 나간다고 봐요.
당신은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지닌 공간을 작업 무대로 활용하죠. 타인과 사회와 연결되는 그 방식이 곧 예술가로서의 책임감으로 연결되기도 하나요? 물론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작업의 맥락에 따라 때로는 허가를 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허가 없이 진행하기도 해요.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협업을 통한 형태로 잘 진행돼요. 국경 부근이나 분쟁 지역처럼 첨예한 장소에서는 애초 허가를 구하는 행위조차 할 수가 없죠. 그런 곳에서 작업하는 일 자체가 불법이니까요. 그때는 협업을 해도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된 소수와의 일이에요.
종군 기자도 아닌데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며 활동하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예술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 어렵거나 실패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죠. 힘들 때면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일단 낯선 장소에 가면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꼭 이렇게 물어봐요. 이곳에서 예술이 의미가 있을지, 과연 예술이 중요한지, 내가 이곳에서 예술 작업을 해도 될지. 그럼 그들은 항상 내가 작업을 해주길 원해요. 분쟁 지역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 주민들마저 저를 환대해준다고요.
가는 곳마다 거리와 벽의 상태를 보면서 그 나라나 도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하나요? 아무도 뭔가를 써놓지 않은 깨끗한 벽을 보면 좀 무섭다고 느껴요. 삶의 흔적도, 표현의 자유도 없는 느낌. 이제 와서 그라피티 문화에 대한 찬반을 따지자는 건 아니고, 다만 그라피티와 같은 건 항상 존재해왔어요. 동굴에 벽화를 그린 최초의 사람은 벽에 자기의 손자국을 남긴 셈이고, 파리에 있는 여러 동상이나 기념탑을 봐도 정말 아주 오래된 그라피티를 볼 수 있거든요. 18세기 사람들도 거기에 자기 이름을 써놨다니까요? ‘내가 여기 있었다’고 자기 존재의 증명을 남긴 거예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누군가의 인상적인 한마디가 있었어요. 지나가던 정유공장 직원이 공장의 한쪽 벽이 달라진 걸 바라보면서 “예술은 사람을 놀라게 하죠?”라고 했는데, 예술에 대한 쉽고 멋진 정의였어요.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는 걸 언제 알았어요? 거리 곳곳의 벽에 대형 사진을 붙이기 시작한 첫 순간부터요. 벽에 그라피티가 있든 말든, 스트리트 아티스트가 뭘 하든 눈길도 주지 않던 의젓한 사람들이 제가 설치하는 모습과 그 결과물에 갑자기 주목하더라고요. 제 전시를 보러 오지는 않을 사람들이고, 어디론가 가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요. 그냥 길을 걷다가 거리에서 예술 작품을 볼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의외의 풍경에 주목하고 즐기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면서 당신의 작업과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확신이 생겼나요? 뭐 확신까지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줄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먼저 깨달았고, 예술가의 힘은 그 이후 천천히 알아차리게 됐어요. 그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고요.
종이를 벽에 부착하는 작업 방식에서는 그 종이가 빗물에 금방 씻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그런 에피소드도 기록했죠. 어느 해안에 절벽에서 떨어져 땅에 박힌 벙커가 있었고, 당신의 팀은 밀물과 썰물 시간까지 계산하며 벙커에 기 부르댕의 초상을 붙였는데 하루 만에 바닷물에 씻겨 사라졌잖아요. 그렇게 일시적인 측면은 이런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있었던 일이에요. 제가 음지를 찾아 프린트를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고, 제 작업을 보여준 곳 대부분이 워낙 공개된 장소예요. 하지만 작업의 이미지는 영원히 남는다고 봐요. 비바람 에 씻겨 사라져버려도 그곳에 남아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제가 생마르게리트로 가던 길의 해변에서 설치한 그 작품 앞에 앉아 아녜스와 나눴던 대화의 내용만은 남아 있다는 거죠. 손으로 쓴 시 한 편 같은 거예요. 처음 쓰인 그 시가 사라지더라도 책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다시 반복될 수 있잖아요? 이미지도 마찬가지예요. 완성해놓은 처음 순간의 것이 사라져도, 작업의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자기만의 여정을 떠날 수 있어요.
대형 포스터를 인쇄할 때 주로 사용하는 프린터는 어떤 제품이에요? 건축 도면 인쇄용 프린터예요. 심플한 복사기와 비슷한데 크기가 더 커요. 레이저로 인쇄하는 아주 기초적인 출력 방식인데, 이것의 장점은 흑백 출력이라 햇볕에 노출되어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주로 흑백 이미지를 사용하죠.
광고와 영화를 비롯해 모든 상업적인 미디어 속 배경에 당신의 작업이 등장하면 소송을 한다고 들었어요. 작업 이미지가 당신 허락 없이 상업적인 어딘가에 노출된 적도 있나요? 그런 적 없어요. 브랜드가 내 작업의 이미지를 쓰게 놔두질 않으니까. 내 작업은 엄밀히 말해 법을 벗어난 방식으로 만든 건데 그걸 상업적으로 사용한다는 것도 앞뒤가 안 맞고요. 내 작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뭔가를 판매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 없어요. 샴푸가 됐든 휴대폰이 됐든, 사람들이 멈춰 서서 생각하게 만드는 게 아닌 그 어떤 상품에도 도움이 되고 싶지 않아요.
혹시 주 수입원은 뭔가요? 작업을 바탕으로 만든 에디션 사진(리소그래피) 판매가 유일한 수입원이에요. 학생들에게는 이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고 가르치죠. 아, 제가 강의도 나가거든요. 이런 이야길 해요. ‘브랜드와 일하고 싶다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겠다. 하지만 이건 선택의 문제다. 네 작업이 뭐라고 말할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페로탕 같은 대형 갤러리와 일하는 경험은 어때요? 페로탕 뿐 아니라 컨티뉴엄, 페이스 갤러리와도 일하고 있어요. 이렇게 규모가 크고 영향력 있는 갤러리와 관계 맺는 건 좋은 일이죠, 나는 작업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으니까. 작업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해요. 제가 작년 초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잖아요? 그런 일도 갤러리의 존재 덕분에 이뤄진 거죠.
당신이 만든 이미지는 ‘인스타그래머블’해요. 요즘은 자기 취향을 넌지시 드러낼 수 있는 미술관도 포토 스폿이잖아요. 당신의 것처럼 야외에 설치된, 스케일이 큰 작업은 피드에 올리고 싶은 그럴싸한 이미지죠. 그런 점을 어떻게 작업에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요. 예를 들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어린이 이미지를 설치한 작업을 했을 때, 특수한 망원렌즈가 필요 없이 어떤 종류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도 적절한 이미지가 나올 수 있게끔 설치했어요. 설치 장소를 정할 때 사람들이 안전하게 차를 몰고 갈 수 있는 곳을 고려하기도 하고요. 누군가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 진을 찍으러 가보자’라고 할 수 있도록요.
그 정도인가요? 브랜드나 광고는 싫지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은 당신에게 중요한 존재군요? 그렇게 해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 사람은 아마 가기 전까지 그곳의 상황을 잘 몰랐을 거라고 짐작해요. 어쩌면 그렇게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국경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장소를 떠날 때 쯤엔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그곳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생각이 바뀌게 될 수도 있어요. 실제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사람들이 서로의 휴대폰을 교환하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어요!
미국과 멕시코 사이 국경 지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나요? 그거 2017년에 설치한 거죠? 트럼프가 2017년부터 미국 대통령이 됐는데… 저는 그런 현상이야말로 정말 강력한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국경을 사이에 둔 이들이 서로 말을 걸고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 못했을 거예요. 심지어 국경 수비대도 몰려드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특별히 저지하지 않았어요. 제가 거기서 벌인 작업은 아주 규모가 컸는데, 미국 기준에서 완벽한 불법이었어요.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업 덕분에 현실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의 관점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일이 벌어진 거죠.
전과 달리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 간 이동이 그리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특정 지역과 연계된 당신의 작업에 또 다른 의미가 생길까요? 작업은 맥락과 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변할 수 있어요. 제 초기 작업 중에 카메라를 총처럼 들고 있는 사람을 찍은 이미지가 있어요. 20년이 지난 뒤 그때 그 사람은 영화 <레미제라블>의 감독으로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죠. 그사이 서로가 성장했고, 당시에 찍었던 사진도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됐어요.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관점은 변화를 겪을 것이고, 진화할 거예요. 우리 인간은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폰으로 손쉽게 초상을 찍고 디지털 데이터 상태로만 남겨 두는 것’과 ‘초상을 물리적 형태로 인화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얼마나 있다고 느끼세요? 제가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아직 필름을 사용하던 시기였고, 디지털이 막 시작되던 때였어요. 저는 디지털의 즉각성이 마음에 들었어요. 디지털을 사용하면 아주 빠르게 상황에 반응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죠. 이것은 내가 속한 세대의 경험이라고 봐요. 10~20년 더 일찍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디지털은 사진에 민주화를 불러일으켰어요. 나처럼 돈이 없던 사람도 이미지를 다룰 수 있게 해줬으니까.
지난해 건축 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여러 재난 현장에서 사람과 시간의 흔적을 포착해온 인물인데, 사람들의 모습 중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을 물었더니 ‘초토화된 집에서 사진을 챙기는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거의 모든 걸 잃은 상황에서도 ‘기억’을 되찾아 간직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같아요. 당신은 어떤 인상적인 장면을 봤나요? 흠, 그렇군요. 제가 오래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저에게 사진 데이터를 보내주면 제가 크게 출력해서 보내주는 식이에요. 지금까지 130여 국가에서 40만 장이 넘는 포스터가 그들 손으로 여기저기 부착됐죠. 사진은 사람들의 존엄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어디에 있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라요.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저라면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장소에 자기 이미지를 붙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그럴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런 행위는 생존에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도 생각해요. 저도 원래는 그 정도로 준엄하게까진 생각 못했는데, 직접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느꼈어요. 사진이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라는 발언에 도움을 주는지 알게 되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데, 혹시 지금 작업실 밖에 누가 찾아왔나요? 네. 누군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대해 궁금했던 것 좀 물어보고 싶어요. 저는 그 작품을 즐겁고 흥미로운 로드 다큐라고 생각하며 편히 보다가 영화 후반부와 엔딩에서 좀 놀랐어요. 여운도 있고 상당히 영화적이에요. 실제 상황이 바탕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설계가 있진 않았나요? 아녜스의 젊은 시절 절친인 장 뤽 고다르의 집으로 우리가 찾아갔죠. 후반부의 진실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 거의 그대로예요. 고다르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그 이후의 모든 장면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촬영된 거예요. 그런 상황은 예상 못했거든요. 아녜스 바르다가 누구예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를 찍었잖아요? 절 대로 자기 영화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어요. 원래 그렇게 울컥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런데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어요. 그래서 저는 후반부의 그 장면들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진실을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고다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하게 된 셈이죠.
당신은 그녀의 발과 눈 클로즈업 사진을 찍어 화물 기차에 붙였잖아요. 기차가 달리기 전까지는 클로즈업된 이목구비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기차가 달리는 순간, 그녀가 세상 멀리까지 간다고 생각하니까 울컥하더군요. 저도 기차에 달린 아녜스의 눈이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기차에 달린 발도 자기 만의 길을 가게 된 셈이고. 그 작업이 어떤 풍경을 보게 될 지는 머릿속으로 상상해야만 알 수 있었어요. 그때 아녜스는 이미 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어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여행을 떠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두 사람이 그 영화를 찍으며 진정으로 한 건 뭐였을까요? 우정을 나눈 걸까요? 예술적 교류의 시간을 보낸 걸까요?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경험이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예술 적 교류로 시작한 작업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녜스와 내가 함께하는 하나의 여정으로 변해갔죠.
지난해 아녜스 바르다가 타계한 이후, 한국의 예술 전용 극장에서도 그녀를 추모하는 작은 영화제가 열렸어요. 당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어떤 표정인가요? 기쁨에 가득 찬 모습이었고, 생기가 넘쳤어요. 그녀가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아녜스는 틈만 나면 당신의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기고 싶어 했죠. 저는 당신의 룩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려는데… 선글라스와 모자 아이템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어요? 선글라스는 몇 개 있는 거 같고. 모자는 이거 하나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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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사진 출처
- JR, PERROTIN